<던전리셋 315화>
황금 갑옷으로 무장한 바분 황제의 성기사들.
그들이 전장에 나타나면 적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
전장에서 그들을 마주쳤다는 뜻은 다시는 내일 해를 볼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제발 죽어! 죽으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그들은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불사의 악마들이었고.
‘사, 살려 줘! 제발 살려 주세요!’
동시에 저주나 독이 통하지 않는 거룩한 존재들이었으며.
‘끄아악! 죽어서도 저주하겠다, 이 악마들아!’
신의 가호 아래 기적 같은 신위를 발휘하는 무적의 기사단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한 번이라도 마주했던 이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전장의 망령.
망령 기사단이라고.
성기사들은 자신들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신을 모시는 고결한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부정한 이름이었으니까.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신을 모시는 성기사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온전히 신을 위하여!’
‘우리는 살아도 신을 위해 살고, 죽어도 신을 위해 죽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더 이상 고결하지 않다는 것을.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적을 찾아 전장을 영원히 떠도는 피에 젖은 망령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적들을 학살하는 살인귀가 바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바분 황제가 죽는 날까지.
이 저주스런 운명은 영원토록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울고 있었다. 아니, 울고 싶었다.
하지만 언데드로 전락해버린 타락한 육체는 눈물을 흘리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단 한 가지, 그들이 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바분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영혼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것.
그때 흘러나오는 피눈물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세계수를…… 불태워라! 끄윽!”
성기사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결코 퀘르쿠스를 불태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불귀신이여……! 불을 뿜어라!”
화르륵!
불귀신.
태양신을 섬기는 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들만 다룰 수 있다는 불의 거인이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그 자욱한 화염이 퀘르쿠스뿐만이 아니라 온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허허, 과연. 이런 속셈이었나. 이제 보니 너희들은 처음부터 나에게 반역을 꾀하고 있었구나. 조금 충격이군.”
바분 황제는 어느덧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처음의 당혹스런 표정을 거두고,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세계수를 찾는다면서 불귀신부터 앞장세우더라니.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스윽.
그가 갑자기 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더니, 책을 활짝 펼치고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감히 자신에게 거역하는 불충한 기사들을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불충한 종들이여, 이것은 반역이다. 너희는 그 죗값으로 이 땅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다.”
파아앗!
그 순간 책에서 불길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이 검은 사슬로 변해 성기사들의 사지를 휘감아 땅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으헉!”
“아, 안 돼!”
“우리가 죽더라도! 세계수를 어떻게든 불태워야……!”
성기사들은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필사적으로 퀘르쿠스에 불을 붙였다.
공교롭게도 그 모습은 정다운이 가짜로 만들어 냈던 그림자 손과 너무나 흡사한 광경이었다.
“저항하지 마라. 불충한 종들이여. 어차피 전쟁이 끝났으니 너희들의 역할도 끝났다. 이제부터는 다른 종들이 너희를 대체할 것이다.”
팔락.
바분 황제가 메마른 손가락이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 안에서 또 한 번 불길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일어나라, 나의 병사들이여.”
크드득……!
“……!”
그 순간 놀랍게도 그들이 서있던 땅 위로 수많은 ‘비석’들이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동묘지처럼.
그리고.
키키키키!
키키케케케!!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해골 병사’들이 비열한 웃음소리와 함께 땅 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이놈들은 설마!”
그 광경에 성기사들이 경악하며 바분 황제를 쳐다봤다.
바분 황제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알아보겠느냐? 이들은 바로 너희들의 손으로 직접 죽인 적군의 병사들이다. 이들이 앞으로 너희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 봉사할 것이다. 영원토록.”
“……!”
그 말에 성기사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고인을…… 능욕하려는가!”
“저들의 죽음을! 더럽히지 마라……!”
“쯧. 이제는 존대할 생각도 없나 보군. 건방진 것들.”
바분 황제는 피식 웃으며 혀를 찼다.
키키케케케!
케케케케케케!
소수 정예였던 성기사들에 비해 해골 병사들의 숫자는 끝도 없이 늘어났다.
미니맵으로 그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 해골 병사들, 틈새 지역에서 나오던 해골 병사들 맞지? 원래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건가?”
[맞아. 정확히 말하면 이미 만들어져 있었지. 세계를 통일했으니 바분 황제는 더 이상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순간, 저 해골 병사들을 이용해 공포 정치를 시작할 생각이었어.]
“허허, 혼란하다. 혼란해. 해골들이 돌아다니는 나라라니.”
이러는 중에도 정다운은 여전히 메모리를 어깨에 들쳐 메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바분 황제도 문제였지만, 당장 지금 이 순간도 퀘르쿠스가 계속해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퀘르쿠스가 이동하면 그 뒤를 또 성기사들과 불귀신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면 또 그 뒤를 바분 황제가 졸졸…….
“어째 기차놀이라도 하는 기분인데, 막상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하나도 재미없네.”
“아저씨, 저 무거우시면 이제 내려놓으셔도 되요.”
어깨 위에서 메모리가 하는 말에 솔리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안 돼! 그러다 네가 바분 황제에게 잡히면 죽을 거라고!]
“허허, 혼란하다 혼란해. 그러니까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거지?”
성기사들은 세계수를 불태우고 싶고.
바분 황제는 세계수를 찾고 싶고.
“그리고 나는 바분을 죽이고 싶고.”
따지고 보면 무척 간단했다.
[맞아. 바분 황제만 없어지면 모두가 안전해지는 거야. 세계수도 이 아이도.]
그러다 문득 정다운이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퀘르쿠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거 어차피 진짜 세계수도 아니잖아. 애꿎은 퀘르쿠스 사이에 두고 다들 너무 심각한 거 아냐?”
[너 때문에 일이 지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 이대로라면 성기사들은 전부 사라질 테고. 바분 황제는 결국 ‘진짜’ 세계수를 찾아내고 말 거야.]
“음, 그럼 진짜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는 절대 가면 안 되겠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군.”
“……!”
오싹!
정다운은 갑자기 들려오는 바분 황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 미니맵이었다!
심지어 이번엔 바분 황제를 보고 있지 않았는데도, 강제로 화면이 움직여서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바분 황제가 정다운에게 말했다.
“저 나무 거인이 세계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에 눈치챘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엔 생명 에너지가 너무 미약했으니까. 자, 그래서 진짜는 어디에 있지?”
“모른다! 이 악마야!”
대답 대신 정다운은 서둘러 미니맵을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니맵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다운은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항의했다.
“아니, 이번엔 완전 딴 데 보고 있었다고! 아까부터 자꾸 남의 스킬 마음대로 쓰기 있어?”
“스킬이라? 생소한 말을 쓰는 군. 아까부터 넌 대체 누구지?”
“네, 제가 누구냐면…….”
흠칫?
그가 묻자 정다운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할 뻔하고 깜짝 놀랐다.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들처럼.
격의 차이는 정말 놀라웠다.
그와 겨우 한두 마디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도 두려움에 손이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싶었다.
“에라잇! 이게 다 몸이 허해서 그래! 보약이라도 먹자!”
정다운이 갑자기 버럭 성질을 내며 소지품에서 비명초를 한 뭉치 꺼내 입으로 와구와구 씹어 먹었다.
삐이익-! 빼액! 빽!
입안에서 비명초가 사정없이 물어뜯기며 비명을 꽥꽥 질렀지만, 바분 황제의 거대한 존재감에 짓눌려서 그 비명 소리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의 효과가 있었다.
비명초의 차는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걸 생으로 씹어 먹었더니,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콸콸 흘러내리며 바분 황제가 뿜어내는 위압감을 전부 밖으로 배출시켰다.
“어?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입에 써야 몸에 좋다더니!”
정다운의 표정이 한결 개운해졌다.
비록 일시적인 효과겠지만 덜덜 떨리던 손까지 멈춰 있었다.
바분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이 그의 손에 들린 비명초를 쳐다봤다.
“호오, 그것은 만드라고라(Mandragora) 아닌가. 그 귀한 약초를 잘도 구했구나.”
정다운은 대답 대신 그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댁도 잘도 그 귀한 책을 구했네? 그거 종말의 서 맞지?”
“……!”
“앗! 그걸 말하면 안 돼요!”
메모리가 깜짝 놀라며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바분 황제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이 종말의 서를 어떻게 알아본 거지! 이 책의 이름은 격을 갖춘 자만 읽을 수 있을 터인데!”
“아, 이거 비밀이었나.”
정다운은 자신이 괜히 입방정을 떨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자신을 쳐다보는 바분 황제의 눈빛이 광인처럼 변해 있었다.
“설마 네놈도 종말의 서의 선택을 받은 것인가!”
그 모습에 메모리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네. 그거 비밀이란 말이에요. 황제가 종말의 힘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 살해당했다고요.”
누구한테 살해당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결같이 무료하고 메마른 표정이었던 바분 황제가 흉신악살처럼 정다운에게 살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반쯤 미쳐 있었다.
“이 책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이건 온전히 내 힘이다! 나만의 것이란 말이다! 감히 내 힘을 탐내다니!”
“어, 저기요? 잠깐만요. 황제 아저씨? 내가 무슨 선택을 받았다고. 지금 좀 오해가…….”
[이미 늦었어. 저자는 지금 너를 ‘경쟁자’로 인식해 버렸어.]
솔리아가 탄식했다.
“뭔 경쟁자?”
[황제는 항상 두려움에 떨며 살았어. 종말의 서를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봐. 종말의 서에게 버림받을까 봐.]
“종말의 서야말로 지금의 그를 있게 해 준 모든 것이니까요.”
메모리는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생명의 서와 종말의 서는 원래부터 한 쌍이었다.
생명의 서는 축복을.
종말의 서는 경고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아무도 읽을 수 없었던 두 권의 책.
그중 생명의 서에게 선택받아 성녀가 된 어린 소녀와.
종말의 서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황제.
그 두 명이 바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바분 황제가 음산하게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흐흐. 맞다. 이 종말의 서가 나에게 속삭이며 말을 걸어온 날,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
그렇다.
애초에 황실에서만 살던 바분 황제가 사령술을 익힐 수 있었던 이유.
전설상의 존재인 세계수의 비밀을 알 수 있었던 이유.
영원한 생명에 집착하게 된 이유.
“종말의 서는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말했지. 이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라고!”
파아앗!
바분 황제가 미니맵 너머에서 정다운을 향해 종말의 서를 펼쳐 들었다.
번쩍!
종말의 서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한 빛이 바분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 모든 결실들을 거두게 되는 날이다.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불충한 자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키케케케케!
케케케케케케!
그의 앞에 수없이 많은 해골 병사들이 도열했다.
“죽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골 병사들이 한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다운 한 명을 잡기 위해서.
“도망쳐야 해요!”
메모리가 정다운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솔리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젠 다 끝났어! 너 당장 이 그림자 세계에서 빠져나가! 어차피 이곳은 지나간 과거……!]
그런데 그때였다.
메모리가 안고 있던 토끼 인형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 것은.
번쩍!
그리고 그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야잇! 이 양반아! 그렇게 혼자 들어가면 어떡하냐고요!]
“응?”
엄청나게 시끄럽고 발랄한 목소리.
정다운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