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09)화 (309/393)

<던전리셋 309화>

‘드디어 찾았다! 마녀의 방울!’

정다운은 지금까지 솔리아가 자신을 귀찮게 했던 행동들을 쿨하게 전부 용서해 주기로 했다.

솔리아가 자신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저 방울만 있으면 드디어 세 번째 그림벨을 만들 수 있다고!’

현재 정다운이 소환할 수 있는 그림자 하인의 숫자는 총 17마리.

그중에서 그림벨은 단 2마리뿐이었고, 나머지 15마리는 전부 평범한 그림자 하인들이었다.

그리고 일반 그림자 하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림벨 한 마리의 효용성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림벨은 정다운의 행동만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스터한 스킬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바로 ‘흙 뭉치기’와 ‘돌 깨기’, 그리고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 만난 메모리는 방울을 쿨하게 넘겨주던 꼬마 메모리 때와는 돌아오는 반응이 전혀 달랐다.

메모리가 갑자기 토끼 인형을 자신의 뒤로 홱 감추더니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다운을 노려보며 외쳤다.

“앗! 역시 당신! 착한 척하더니 진짜 속셈은 바로 이거였구나! 내가 이걸 순순히 넘겨줄 것 같아?”

“응? 얘가 갑자기 왜 이런데?”

뜬금없는 메모리의 날선 반응에 정다운은 황당했다.

[……네가 이해해.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라 청개구리 심보가 좀 있어. 잘 달래면 아마 줄 거야.]

솔리아의 머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퍽이나 도움이 되는 조언이네.”

정다운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여기 있는 황녀님은 겉보기엔 사춘기 고딩처럼 생겼어도, 그 진면목은 바로 그림자 비술을 만들어 낸 당사자였다.

‘게다가 어쩌면 던전의 모든 것들을 창조해 냈을 수도 있는 대단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런 녀석의 기분을 괜히 상하게 했다간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이럴 땐 어른스럽게 대화로 해결해야지. 이런 애송이 구슬리는 것 쯤은 일도 아니니까.’

정다운은 메모리에게 척하고 손을 내밀며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아가야, 밥 먹을래?”

“당신이나 먹어. 이 분위기에 밥이 넘어가?”

“그런데 너 왜 아까부터 반말……?”

“……넘어가냐고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진짜 웃기는 아저씨야 정말.”

“…….”

“…….”

파직!

그 순간 참으로 어른스러운 꼰대 정다운과 예의 바른 사춘기 애송이 간의 치열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정꼰대의 선공.

“내가 왜 아저씨야?”

바로 애송이의 반격.

“그럼 아줌마 하든가요.”

“뭐, 아줌마? 아줌마는 너겠지?”

“헐? 내가 왜 벌써 아줌마임! 이 꽃다운 나이에!”

“지금 그게 중요해? 아무튼 그 못생긴 인형은 됐고, 그 방울만 딱 떼어 주란 말이야!”

“은근슬쩍 처음 주제로 돌아가지 마요! 내가 왜 아줌마…… 아니, 잠깐! 그런데 내 토끼 인형이 못생겼다고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만든 건데!”

“열심히? 그런데 실밥이 그렇게 숭숭 튀어나왔어?”

“앗? 그러네? 여긴 다시 꿰매야겠다.”

“처음부터 밖에서 실이 안 보이게 안쪽으로 감았어야지!”

“아, 나도 안다고요! 딱 여기만 실수한 거라고요!”

“앉아 봐!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지금 꿰매!”

“아, 그럼 고맙죠.”

[……?]

아니, 대화의 흐름이?

솔리아는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둘의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던 정다운과 메모리가 갑자기 마주 앉아 토끼 인형의 실밥을 같이 꿰매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묘하게 죽이 잘 맞는 둘의 모습이 이상하면서도 뭔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화르륵…….

솔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정다운에게 말을 걸었다.

[이러는 중에도 숲에 점점 불이 번지고 있어. 이제 며칠 안에 이 숲은 네가 아는 ‘하룬’처럼 불바다로 변할 거야.]

“…….”

[그러니까 그 방울이나 받고 돌아가도록 해. 돌아가는 방법은…… 너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지?]

“어? 방금 뭐라고 했어?”

[…….] 

물론 안 듣고 있었다.

정다운은 컴퓨터 하느라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말을 전혀 못 들은 아들처럼 토끼 인형을 수선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우와, 아저씨 손이 제법 야무지네요?”

“너도 제법인데?”

“당연하죠. 할 게 없어서 밥만 먹고 바느질만 했거든요.”

“어? 그런데 이건 뭐야? 등에 지퍼가 달렸네?”

문득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토끼 인형을 뒤집었더니 등 쪽에 길게 지퍼가 붙어 있었다.

무심코 지퍼를 열어 보려는 그의 손을 메모리가 정색하며 붙잡았다.

“그만. 역시 이게 목적이었네. 당신, 역시 황제가 보낸 첩자죠?”

“바분 개새끼.”

“아, 아니구나. 의심해서 죄송.”

그의 발 빠른 대처에 바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메모리였다.

제국민 중에 감히 황제의 이름을 욕할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이 세상에서 바분 황제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이 인형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길래 이렇게 민감한 거야?”

“……아저씨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보네요. 그럼 살짝만 보여 줄게요.”

찌익.

정다운의 물음에 메모리는 인형의 지퍼를 살짝 열어서 그 안을 보여 줬다.

그러자 놀랍게도 토끼 인형의 안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순간 정다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설마……?”

“내 일기장이에요.”

“헉? 그 전설의!?”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에요? 내가 일기 좀 쓸 수 있지!”

진심으로 깜짝 놀란 정다운의 반응에 메모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하지만 정다운은 진심으로 소름이 돋아 버렸다.

그 말로만 듣던 일기장의 원본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흡사 연예인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솔리아가 혀를 차며 메모리에게 말했다.

[‘생명의 서’에 낙서 좀 그만하라니까.]

“솔리아 님, 너무해요. 내 소중한 일기를 낙서라니요? 그리고 나한테 책이라곤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그래도 명색이 성녀가 돼서 생명의 서에 낙서하면 양심에 찔리진 않니?]

“하나도 안 찔려요. 흥. 내가 뭐 언제 성녀가 되고 싶어서 성녀 됐나? 그냥 태어나 보니까 성녀였고, 황녀였지.”

[…….]

그들의 대화를 들은 정다운은 혼란을 느꼈다.

“뭐? 생명의 서? 종말의 서는 알아도 생명의 서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 메모리, 아니 황녀야. 나 이거 한번 읽어 보면 안 될까?”

“진짜 이상한 아저씨네. 남의 일기를 왜 읽으려고 그래요? 그리고 어차피 아저씨는 봐 봤자 읽지도 못해요.”

정다운의 부탁에 메모리는 코웃음을 치며 생명의 서를 토끼 인형 안에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활짝 펼쳐 그에게 보여 줬다.

그 안은 놀랍게도 새하얀 백지였다.

“생명의 서에 적힌 내용은 오로지 성녀만 읽을 수 있어요. 내가 괜히 탑에 갇혀 산 게 아니라고요.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축복의 기도문을 읽을 수 없으니까요.”

“아하, 그래서 일기를?”

“네. 생명의 서에 일기를 쓰면 나 외엔 아무도 못 읽으니까요. 심지어 격이 워낙 높은 물건이라 찢기거나 불타도 다시 원래대로 복원되요.”

“최고의 일기장이네.”

정다운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 온 마녀의 일기장의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 안에 모두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 뿐.

관련 있는 키워드가 검색된 순간, 그에 해당되는 내용이 위로 떠오른 게 분명했다.

다만 여기서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자신이 가진 마녀의 일기장은 한두 권이 아니었다.

스테이지-4 마녀의 서재에는 똑같이 생긴 빈 일기장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럼 설마 그 모든 책들이 전부 생명의 서였다는 걸까?

정다운이 물었다.

“혹시 이 생명의 서라는 게 혹시 엄청 흔한 물건이야? 아니면 분실을 대비해서 복사본을 많이 만들어 놨다던가.”

“이 아저씨 아까부터 이상한 말만 잔뜩 하시네.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그 말에 메모리가 그를 진심으로 한심하게 쳐다봤다.

“생명의 서는 세상에 유일한 물건이에요. ‘유니크’(Unique)를 복사했다간 격이 떨어지고 만다고요.”

“또 그놈의 격이야?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건 잘 아시네. 아저씨처럼 격이 낮은 작자는 알다가도 모르는 게 격이긴 하죠.”

메모리가 코웃음을 치자 정다운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런데 너 아까부터 자꾸 살살 긁는다? 언제 봤다고?”

“아, 그건 죄송해요. 나도 이상한 말인 거 아는데, 오늘 처음 봤는데도 묘하게 아저씨가 편하게 느껴져서 그래요. 이건 뭘까요? 설마 운명 같은 사랑?”

“…….”

“왜 그런 한심하단 표정으로 쳐다봐요? 은근 기분 나쁘네?”

정다운은 메모리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너…… 진짜 이상한 성격으로 커 버렸구나. 어릴 때는 꽤나 귀여웠는데.”

“나 어릴 때를 보기나 한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봤지.”

“……?”

정다운의 말에 메모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저씨는 좀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하는 성격이신 듯…….”

그때였다.

쿠쿵!

“꺄악!?”

땅이 흔들렸다.

“흐억!”

서 있던 모든 숲의 종족들이 일제히 휘청거리며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심상찮은 지진이 숲 전역에 일어나고 있었다.

[시작됐구나.]

솔리아의 나직한 음성에 정다운이 중심을 잡으며 소리쳤다.

“뭐가 시작된 건데!?”

[……이 모든 재앙의 시작.]

애초에 숲을 탐색하던 성기사들은 선발대에 불과했다.

선발대의 목적은 먼저 도착해서 뒤따라오는 ‘위대하신 분’의 앞길을 미리 터놓는 것.

그리고 그분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세계수를 찾아낼 수 있게, 그의 앞길을 방해하는 미천하고 불길한 숲의 종족들을 모두 치워 버리는 것.

그게 바로 선발대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후발대가 도착하고 말았다.

[바분 황제가 숲에 들어왔다.]

쿠르릉!

숲이…… 울부짖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방문에 숲이 몸을 떨고 있었다.

“왠지 오싹한데?”

정다운은 이유 없이 소름이 돋아 있는 두 팔을 쓸었다.

불길한 감각이 엄습해 왔다.

솔리아는 진심을 다해 그에게 경고했다.

[정다운, 당장 이 그림자 세계에서 나가라. 그는 네가 아는 도우미 바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까마득한 격의 차이가…….]

바분이 그토록 자신의 격을 높이기 위해 악착같이 다른 도우미들의 던전을 탐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격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추락해 버린 불쌍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숲에 발을 들인 이는 바로 그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던 바분 황제였다.

솔리아는 다급한 어조로 메모리를 설득했다.

[너도 이만큼 친해졌으면 그깟 방울 하나쯤은…….]

“아저씨, 이 방울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모리가 토끼 인형에 달려 있던 방울을 똑 뜯어서 정다운을 향해 내밀었다.

“가지세요. 사실 이런 방울쯤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어? 어, 고맙다?”

어색하게 방울을 건네받는 정다운에게 메모리는 공손하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처음엔 미안했어요. 난 아저씨가 생명의 서가 들어 있는 내 인형을 노리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솔리아 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황제의 부하일 리 없죠. 그러니까…….”

메모리는 진심을 담아 정다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당장 도망치세요. 이 숲에 남아 있다간 아저씨도 우리와 함께 죽게 될 거예요.”

“…….”

메모리의 의연한 태도에 정다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여태까지 자신과 티격태격하던 애송이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염려해 주는 기특한 꼬맹이만 있을 뿐이었다.

“이제 보니 잘 컸네. 녀석.”

정다운이 피식 웃으며 꼬맹이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가뿐히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메모리가 당황하며 외쳤다.

“잠깐! 아저씨 지금 뭐하려는 거예요? 그쪽은 위험……!”

“네가 이해해라. 내가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라 청개구리 심보가 좀 있어.”

청개구리, 아니 정개구리가 눈을 번뜩이며 숲의 초입, 바분 황제가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