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08)화 (308/393)

<던전리셋 308화>

*   *   *

그 시각 아라크네의 성.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미야앙.

갑자기 메모리가 어딘가를 쳐다보자, 그녀의 무릎에서 얌전히 몸을 말고 있던 세르파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누가 날 부른 것 같아서.”

한동안 말이 없던 메모리의 작은 입술이 어느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누구긴 누구겠어?”

[또 그 인간이군요.]

그 말에 세르파는 코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녀의 무릎에 턱을 괴었다.

하지만 무심한 태도와는 달리 이미 그의 눈동자 위에는 작은 마법진이 맺혀 있었다.

굳이 마력을 쓰지 않아도 자신의 주인님께 닿아 있는, 보이지 않는 끈을 감지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가 또 그림자 세계에 진입했나 봅니다.]

“그림자 세계? 그게 뭔데?”

처음 듣는 말에 메모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은 고양이를 쳐다봤다.

[그림자 비술을 이용해 환상을 실체화시킨 세계를 뜻합니다. 바로 이곳처럼.]

“아하. 고마워, 세르파.”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세르파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이 지금 많은 기억을 잃었지만, 그래도 이 어린 주인님에 대한 기억들은 제법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동시에 감탄했다.

이름이니 이론 같은 걸 굳이 알지 못해도, 메모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메모리 본인 또한 그림자 비술로 인해 생겨난 기억의 조각에 불과하면서도.

[그에게 대답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난 이곳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

자신의 물음에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는 어린 소녀의 모습에 세르파는 입을 다물었다.

훗날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세르파에겐 이 어린 날의 주인님의 의기소침한 성격이 가끔은 낯설었다.

하지만 이럴 때 위로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를 위해 숯이나 태우시지요.]

“아! 그럴까?”

[…….]

그리고 노가다를 할 생각에 금방 표정이 밝아지는 주인님의 모습은 익숙했다.

“기분이 울적할 땐 역시 숯 냄새를 맡아야지!”

[아, 예…….]

*   *   *

“메모리! 너 여기에도 있었구나!”

정다운은 아름다운 숲의 종족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소녀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10대 후반쯤 되었을까.

보기만 해도 눈이 정화될 정도로 청초하고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안 본 사이에 훌쩍 커 버려서 처음엔 바로 못 알아봤지만, 아직 어릴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다운이 반가워하며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메모리에게 한 발 다가가자, 그녀가 질색하며 그를 뾰족하게 노려봤다.

“꺄악! 다가오지 마! 이 타락한 종자가 어딜!”

“……와, 나 지금 좀 상처받았어.”

정다운을 쳐다보는 메모리의 눈빛이 불량 청소년처럼 적개심과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이해해. 쟤가 지금 한창 사춘기라서.]

솔리아의 말에 정다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쪽의 메모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지금쯤 아라크네의 탑에서 숯을 만들며 지내고 있을 꼬마 메모리와 이곳의 사춘기 메모리는 서로 별개의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강한 척을 해 봤자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 증거로 저 가녀린 어깨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망울을 그렁거리고 있었다.

불쌍해 죽겠지만, 정다운은 현실을 직시했다.

어쨌거나 이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지나간 과거에 불과했다.

아무리 불쌍해도 이제 와서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정다운은 실속이나 챙기기로 했다.

“솔리아, 설마 네 선물이라는 게…….”

그때였다.

숲의 종족들이 날선 기세로 메모리의 앞을 척 막아섰다.

“황녀님께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황녀님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킬 것이다!”

파앗. 팟! 팟!

그들의 양손에서 황금빛 마법진들이 생성되었다.

처음의 어설펐던 대응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그들은 전력을 다할 기세였다.

제국민들이 숲의 종족들을 마녀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증오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그들이 타고난 마법사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그들의 날선 대응보다도 그들이 한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발 부탁인데 호칭 좀 통일해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황녀님? 성녀도 마녀도 아니고, 이번엔 또 황녀님이라고? 명함이 대체 몇 개야?”

꼬맹이 하나가 온 세상 직업은 다 가질 기세였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 잠깐? 그런데 바분이 황제라며? 그러면…….”

정다운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메모리를 쳐다봤다.

“설마 너 바분의 딸이었어?”

“…….”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와, 진짜로? 갑자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출생의 비밀이 튀어나온다고?”

정다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끄응. 이러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황녀님께 다가오지 말……!”

“거, 잠깐 조용히들 좀 있어 봐요. 생각 좀 하게.”

정다운은 자신에게 마법진을 들이대는 숲의 종족들을 향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처처처처처척!

그러자 그들과 정다운 사이에 높은 흙벽이 생겨났다.

갑자기 앞이 가로막히자 숲의 종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 마법!?”

“맙소사! 숲의 종족이 아닌데도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다니!”

“설마 저자도 숲의 종족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머리색이 다르잖아!”

“그렇다면 설마! 혼혈인가!”

“설마 숲의 종족이 인간과 결혼을!”

어쩐지 점점 정다운에게서도 메모리 못지않은 출생의 비밀이 생겨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다운은 흙벽 너머에서 팔짱을 낀 채 솔리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 설명해. 명색이 여신님인데 아는 게 많을 거 아냐? 메모리한테, 아니 저 황녀님한테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후우…….]

대답 대신 솔리아에게서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정다운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어지간해서는 남들 인생에 별로 관심을 주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얘기는 이번 기회에 꼭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러는 중에도 숲이 불타고 있으니까 최대한 짧게 말해.”

[……그리 긴 이야기도 아니야. 말해 줄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전부 바분 황제의 야욕 때문이었어.]

솔리아는 바분을 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계를 통일한 정복왕 바분 황제.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밟은 행보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전쟁. 또 전쟁…….

끊이지 않는 전쟁 끝에 이 세상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로 바다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수많은 죽음이 온 땅을 적셨다.

[그리고 그 참혹한 죽음들이 제물이 되어 이 땅에 진정한 종말을 불러왔지.]

이건 정다운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루살이들의 숱한 죽음들로 가득한 무간도에서 종말의 용이 부활을 꾀했듯이.

수많은 죽음은 결국 종말을 앞당기는 법이었다.

[물론 처음엔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어. 종말의 징조가 여기저기서 드러날 뿐이었지.] 

처음엔 종말이 시작된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황궁에 있던 예언가들이 앞다투어 닥쳐올 종말을 예언하기 시작하자, 바분 황제는 결국 종말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비책은 바로 자신의 딸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었지. 그는 자신의 어린 딸을 탑에 가두고 매일 신에게 기도를 드리게 했어.]

“그게 바로 메모리구나. 아니지, 얘 진짜 이름은 뭐야?”

“나한테 이름 같은 건 없어. 신에게 바쳐진 순간 이름 따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까. 오로지 ‘성녀’라는 역할만 중요할 뿐.”

“응?”

이번에 대답한 이는 솔리아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였다.

어느새 정다운은 메모리를 위시한 숲의 종족들에게 또 포위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그들의 접근을 한참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어느덧 그들의 표정에서 적대심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것 같은 표정으로 정다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고, 이 불쌍한 사람아! 숲의 종족의 혼혈이었으면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닌가!”

“……?”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설마 혼혈이라고 박해할 것 같았나! 그런 건 인간들이나 할 행동이라네!”

“…….”

아니, 이 순박한 사람들 보게?

정다운은 허탈해졌다.

‘뭔가 단단히 오해들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들 행복해 보이니까 그냥 내버려 둘까.’

그런데 단 한 명, 메모리만큼은 오해를 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등 뒤에 있는 세계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얘기할게. 괜찮죠, 솔리아 님?”

[……그래.]

“너희들, 둘이 서로 친해 보인다?”

정다운이 묻는 말에 메모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난 성녀니까.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당연하지. 그런데 당신은 성녀도 아니면서 어떻게 솔리아 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지?”

“난 성자인가 보지.”

자기가 말하고도 너무 아무 말이었다며 민망한 표정을 짓는 정다운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예능을 다큐로 받았다.

“뭐? 당신이 성자님이라고!? 우와!”

“……?”

대체 이 숲에 사는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이리 순박할까?

아까의 뾰족한 눈빛은 다 어디로 가고,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순박한 반응에 정다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냥 다 미안하다. 이건 그냥 넘어가자. 그래서 그 다음 얘기가 뭔데?”

그가 말을 돌리자 메모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여기서부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야. 나는 성녀가 되었고, 매일매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어. 그런데도 종말은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지.”

그 당시의 무력한 기분을 떠올린 메모리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뒤로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성녀가 기도를 하는데도 오히려 온갖 재앙들이 더 심해지자, 사람들의 비난은 이제 황제가 아니라 성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바분 황제가 적극적으로 그 모든 원인을 성녀의 탓으로 돌렸으니까.]

“와, 나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나쁜 새끼였네.”

정다운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우매한 대중과 군중 심리, 그리고 선동질.

그 더럽고 치사한 일들이 모두 합쳐지면서 불쌍한 꼬맹이 하나를 마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화풀이를 하려 해도 그 더없이 나쁜 자식은 정작 지금 죽고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에 죽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냥 죽은 것도 아니라, 뜨겁게 불타고 던전 콩에 얻어맞고, 아주 원 없이 흠씬 두들겨 맞아 죽었다.

“그래서 난 이 숲까지 도망쳐 온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고 마녀라며 비난했으니까, 진짜 마녀들이라면 나를 받아 주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

지난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뭔가 물으려던 정다운은 분위기상 입을 다물어야 했다.

담담히 말을 마친 메모리의 눈에서 결국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숲의 종족들이 그녀를 위로한다며 우르르 다가와 등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내 탓이야. 내가 기도만 더 열심히 했어도…….”

[지금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면서 뭘 더 해? 제발 기도 좀 그만해. 귀가 따갑다고.]

“그래도 덕분에 솔리아 님이 깨어나셨잖아요. 이젠 다 괜찮아질 거예요.”

[…….]

메모리의 더없이 순수한 반응에 솔리아는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진짜 여신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정다운은 입이 근질근질해서 결국 못 참고 입을 열고 말았다.

“저기,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진짜 미안한데. 혹시 아까부터 품에 안고 있는 거 나 주면 안 될까?”

“……내 인형을? 왜?”

아까부터 메모리는 굉장히 낯익은 토끼 인형을 품에 꼬옥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형 옷에 작은 방울이 하나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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