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07화>
평화롭던 숲속을 헤집고 다니는 황금 갑옷의 성기사들.
그들의 목적은 바로 이 숲에 모여 살고 있는 마녀들의 말살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마녀들은 전부 세계수 앞에 모여 있다고 솔리아는 설명했다.
[저 성기사들은 격이 낮아서 세계수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어. 그래서 결국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해 숲에 불을 지르게 돼. 일일이 찾지 못해도 다 죽이는 건 가능하니까.]
“……일단 가면서 말하자.”
쫙!
솔리아의 말에 정다운은 거두절미하고 ‘속도의 룬(복제)’ 주문서부터 꺼내 찢었다.
그리고 세계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빼곡한 나무들과 바위들이 끊임없이 그의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는 눈부신 속도로 모든 장애물을 지나쳐 갔다.
외뿔멧돼지의 기운에 주문서의 효과까지 합쳐진 결과였다.
솔리아가 경고했다.
[절대 골렘을 꺼내면 안 돼! 네가 성기사들에게 들키면 세계수로 향하는 네 이동 경로가 저들에게 파악될 거야!]
“누굴 바보로 알아? 그래서 이렇게 직접 내 발로 뛰고 있잖아.”
그동안 항상 골렘을 타고 다니던 탓에 이렇게 전력 질주한 적은 오랜만이었다.
귓가로 싱그러운 바람 소리가 휙휙 지나쳐 가자 정다운은 감회가 새로웠다.
“갑자기 소풍이라도 와서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네.”
날씨도 소풍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게다가 마침 숲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다만, 보물찾기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너무 살벌한 게 최대 흠이었다.
“절대 살려 두지 마라! 우리의 목적은 생포가 아니라 말살이다!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야 한다!”
“마녀들은 불길한 존재다! 보는 즉시 바로 죽여라!”
“괜히 말을 섞었다간 그들의 마법에 홀릴 수도 있다!”
정다운은 성기사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돌아서 세계수로 향하고 있었다.
저렇게 살벌한 말을 하는 놈들과 마주쳐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숫자도 워낙 많았지만, 저들의 무장도 심상치 않았다.
[성기사들이 저런 비효율적인 황금 갑옷을 입고 다니는 이유는, 황금이야말로 신의 가호를 극대화시켜 주는 물질이기 때문이야.]
“게임으로 치면 버프 효과가 훨씬 잘 먹힌다는 말이네.”
이를테면 알파가 생명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시킬 때 황금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성기사’들은 신의 가호를 자신의 몸에 받아들여 본인의 능력을 뻥튀기해서 싸우는 직업이야. 그리고 그들 중 최정예가 바로 이곳에 몰려와 있는 거고.]
정다운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성기사들은 머리가 없어? 왜들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지? 저 소리에 오히려 마녀들이 더 숨어 버리겠는데? 나야 물론 피해 다닐 수 있어서 편하지만.”
[서로를 독려하는 거야. 동시에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거지. 자신들의 일이 얼마나 잔혹한 짓거리인지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테니까.]
솔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들은…… 그 잔혹한 짓거리에 따른 자신들의 죗값을 처절하게 치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정다운, 이제 와서 굳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어. 저들과 싸우려 했다간 아무리 너라도 위험할 거야. 저 성기사들은 황제가 기르는 사냥개들이니까.]
바분 황제의 사냥개들.
그 말에 정다운은 문득 바분의 마법 창고 안에 가득했던 금은보화들을 떠올리자 절로 납득이 갔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다녔던 황금 갑옷이 바로 저 성기사들의 갑옷이었던 것이다.
“역시 그 바분이 그 바분 황제였나. 충격적인데. 설마 제국의 황제가 개코원숭이였을 줄이야.”
[예전엔…… 인간이었어. 그것도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으며, 가장 부귀영화를 누린 제왕이었지. 세계를 통일했을 정도니까.]
“세계를 통일했다고?”
솔리아의 설명에 정다운의 표정이 휘둥그레 변했다.
세계 정복.
초등학생들이 한 번씩은 장래희망에 적어 봤을 정도로 유치하고 뻔한 목표를 결국 이뤄 낸 인간이 실제로 존재했을 줄이야!
게다가 그게 하필 그 바분이라니?
진짜 안 어울렸다.
“그 바분이 그렇게까지 대단해보이진 않았는데?”
[당연하지. 그는 금기를 어기고 격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금기?”
[그래. 페널티 말이야. 그는 부귀영화의 정점에 올라선 끝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탐욕을 부리고 말았어.]
솔리아가 말해 준 진실은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였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힘과 권력, 그리고 부귀영화.
그 모든 것들을 한 손에 거머쥐게 된 바분 황제.
그가 최종적으로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했어.]
“뻔한 이야기네.”
솔리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정다운의 시야에 점점 가까워져 가는 세계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아하! 저거였어! 세계수의 가호를 원했던 거구나!”
그동안 참가자들의 모든 상처들을 회복시켜 주던 세계수의 은빛 꽃가루!
최근에 정다운도 받았던 보상, ‘세계수의 가호’를 바분 황제라면 충분히 욕심을 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대답이었다.
[아니야. 바분은 세계수의 가호가 아니라 세계수 자체를 원했어.]
“와, 진짜 나쁜 놈이었네. 욕심부릴 게 따로 있지.”
[……?]
“왜?”
[……아니다.]
정다운의 뻔뻔한 말에 솔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가짜 세계수를 송두리째 뽑아 간 인간이 지금 바분을 욕하고 있었다.
바분은 차라리 실패하기라도 했지…….
그런데 그때 정다운의 눈이 더 불길하게 반짝였다.
“와, 그럼 저 진짜 세계수만 있으면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어?”
결국 솔리아가 폭발했다.
[이 바분보다 더한 인간아! 욕심내도 소용없어! 저 세계수는 그냥 과거의 기억일 뿐이라고! 지금은 하룬과 함께 불타서 사라지고 없으니까 건드리지 마!]
“바분보다 더하다니! 그건 너무 심한 말이잖아.”
정다운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내심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화르륵!
숲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서둘러! 마녀들을 찾지 못해서 성기사들이 결국 숲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어!]
“와 씨, 저 아저씨들 왜 이렇게 포기가 빨라!”
정다운은 결국 속도의 룬(복제) 주문서를 또 한 장 찢었다.
그 순간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는 족발을 하나 꺼내 입으로 뜯으며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길이 불편한 땅 대신 나뭇가지들을 밟고 다니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그러다 발을 삐끗.
“으헉?”
순간 휘청하는 정다운.
신체 능력이 좋아졌다 해서 운동 신경까지 좋아진 건 아니었다.
“개, 개미 더듬이!”
쭈뼛!
스킬을 썼더니 부족한 균형 감각이 보완됐다.
그는 본격적으로 나뭇가지들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원숭이처럼.
[…….]
솔리아는 기분이 찝찝했다.
자신이 지금 제2의 바분 황제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솔리아는 정다운을 믿었다.
탐욕스런 바분 황제와 욕심꾸러기 정다운에겐 결정적으로 큰 차이점이 있었다.
인간들의 정점이었던 바분 황제.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기에 오히려 고독했다.
모든 인간들을 발아래 두고 있었기에 믿고 의지할 친구들이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그냥 친구가 없었다.
계속 땅굴 속에만 살다 보니.
그래서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일단 만나면 반가워했다.
“마녀들이다!”
정다운은 결국 세계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모여 떨고 있는 ‘마녀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 응? 그런데 마녀들이라더니 남자도 있네?”
정다운은 감탄했다.
“우와, 갑자기 방송국이라도 온 기분인데?”
세계수 앞에는 연예인들처럼 잘생기고 예쁜 남녀노소가 수십 명이나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피부도 뽀얗고 아름다웠다.
정다운은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을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잠깐. 이 사람들 설마 숲의……?”
[맞아. 숲의 종족들이야. 제국에서는 마녀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럼 남자는 마남이라고 불러? 혹시 미남 미녀를 잘못 발음한 거 아니고?”
[제국민들은 숲의 종족들이 전부 여자인 줄 알고 있거든. 숲의 종족은 남자들도 너무 아름답다 보니, 멀리서 보면 다들 여자인 줄 착각하더라고.]
“음, 이해되네.”
정다운은 숲의 종족들의 잘생김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최근에 숲의 종족으로 다시 태어났던 참가자들의 외모도 사진 어플로 보정이라도 한 것처럼 상향됐었다.
하지만 진짜 숲의 종족들은 그냥 유전자 레벨부터 잘생기고 예쁜 느낌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빛 머리카락과 빠져들 것 같은 영롱한 눈동자.
섬섬옥수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손가락, 발가락까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웠는데, 남자들 또한 우락부락한 근육 대신 여자라고 오해할 정도로 가녀리고 하늘하늘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정다운이 다가오자마자 결사의 표정으로 무기를 들며 외쳤다.
“다가오지 마라!”
“감히 낙원을 침범하다니!”
“자연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음, 화내도 잘생겼네. 겁나 부럽다.”
정다운은 그들의 적개심에 당황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상 이런 반응이 당연했다.
순식간에 숲의 종족들이 그를 포위했지만, 그는 태평했다.
“음, 사람들이 화냈을 때는 역시 이게 최고지.”
번쩍!
“헉!”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짜고짜 그들을 향해 튀어 나갔다.
감히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속도에 숲의 종족들은 당황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애초에 이들은 호전적인 전사들이 아니었다.
숲에서 오순도순 살면서 자연을 가꾸고 마법을 연구하던 평화로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주문서까지 사용해서 최대치로 빨라진 정다운의 속도에 갑자기 대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헙!?”
“으업!”
가장 선두에 서있던 이들의 입 안에 다짜고짜 큼직한 고기가 물려졌다.
모름지기 화났을 땐 밥부터 먹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정다운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리 일단 먹으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의 장을 열어 볼까요?”
“우웨에엑!”
“……응?”
“쿠웨에엑! 감히 우리에게 고기를 먹이다니!”
“우릴 독살할 계획이구나!”
갑자기 엎드려서 토악질을 하는 숲의 종족들의 모습에 정다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고기 못 먹지? 깜빡했네. 미안해요.”
[넌 정말…… 악마야.]
“미안하다니까. 그럼 우리 고기 대신, 수박이라도 먹으면서 대화를…….”
[수박 선인장 꺼내지 마! 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선물은 저기 있으니까! 가지고 당장 나가!]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지르는 솔리아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정다운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