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06화>
* * *
‘솔직히 좀 놀랐다.’
정다운은 솔리아의 분노가 담긴 힘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대박. 저 큰 놈을 한 방에 터뜨려 버리네요? 역시 여신님이시다!]
반면에 토끼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자신도 기다란 귀를 휘둘러 오러를 날리는 방식으로 공격을 하지 않던가.
솔리아의 마법도 그와 비슷했다.
오러가 실린 깃털.
깃털을 빠른 속도로 날려서 은린어를 맞춘 것이다.
은린어가 덩치에 비해 방어력이 약한 탓도 있겠지만, 단순히 구멍만 뚫린 것이 아니라 저렇게 화끈하게 폭발해 버릴 줄이야…….
그 결과가 바로 저것이었다.
촤아악!
흡사 거대한 물풍선이라도 터진 것처럼 하늘 위에서 상당한 양의 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그 바로 밑에 있던 영원히 불타오를 것 같던 숲의 불길이 빠른 속도로 잡혀 갔다.
[크륵. 결국 불이 꺼지고 말았나.]
루갈은 곤란한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다.
이곳의 도우미인 그는 이미 변화의 조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불이 꺼진 땅 위로 귀기 어린 검은 연기가 이글거리며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불이 식으면서 발생하는 연기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게다가 땅의 색깔도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불에 타서 그을린 수준이 아니라 정말 새까맣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불길할 정도로 진한 검은 색이었다.
크드득!
이윽고 땅이 점점 들썩거리더니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그리고 하룬의 불길 아래 숨죽이고 웅크려 있던 불길한 존재들이 땅 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끄렇게 나타난 존재들의 모습이 기이했다.
황금 갑옷!
온갖 금은보화로 치장된 화려한 전신 갑옷들이 사람처럼 땅속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갑옷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시꺼먼 연기가 사람처럼 갑옷을 입고 움직이고 있었다.
번쩍!
황금으로 된 투구 안에서 검은 안광이 폭살되자, 그 안에서 불길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분노의 포효 같기도 했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음 소리 같기도 했다.
척, 척, 척!
몸을 일으킨 그들은 진열을 갖추고 손을 대신하는 황금 건틀렛으로 검과 방패를 들고 사열했다.
그 무기들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새까맣게 물든 땅 위에서 유독 빛이 났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에 도착한 훈련받은 기사들 같았다.
[크르륵! 결국 사자귀환(死者歸還)이 시작되고 말았구나!]
루갈은 깊게 탄식했다.
[하룬에 봉인되어 있던 악령기사(惡靈騎士)들이 눈을 뜨고 말았다! 하룬의 불은 놈들을 억제하는 유일한 족쇄였는데……!]
루갈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솔리아를 쳐다봤지만, 정작 솔리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날개깃을 위협적으로 세웠다.
[겨우 이 드넓은 숲의 한 귀퉁이만 불이 꺼진 거잖아? 거기서 몇 마리 기어 나와 봤자 내가 다 잡아 버리면 그만이야.]
[솔리아 님, 또 무력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우리 도우미들은…….]
[잔소리 그만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난 규칙을 어기지 않았어. 이번엔 규격 외의 일이라고.]
[…….]
던전의 존재들에게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도우미에게 주어진 규칙이었다.
하지만 솔리아는 은린어를 죽였는데도 그에 따른 패널티가 없었다.
그것은 애초에 은린어라는 존재 자체가 던전에 귀속된 괴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셋을 해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규격 외의 존재를 해치는 일 정도는 솔리아 정도의 상급 도우미라면 충분히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말은 즉, 저 악령기사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규격 외! 저 악령들 또한 던전이 리셋되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이란 말이지. 끄응.’
루갈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유적지로 들어가고 있는 참가자들을 재촉했다.
[크르륵! 어서 공략을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악령들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악령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날수록 하룬의 난이도도 점점 올라갈 거다.]
“……!”
상상하기도 싫은 계산법이었다.
불이 꺼진 숲에선 악령들이 기어 올라온다.
지금 이 순간도 하룬의 불은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서 점점 식어 가는 중이었다.
하룬의 불이 다 꺼졌다가는, 이 숲 전체가 악령들로 둘러싸일 수도 있다는 결론이었다.
루갈의 말에 참가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인 마음으로 유적지에 진입했다.
루갈이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았어도, 이미 저 검은 연기를 멀리서 본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악령기사들이 뿜어내는 지독한 사기(死氣) 때문이었다.
“솔리아.”
이런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정다운은 진지하게 솔리아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내 선물은?”
[아, 네가 있었지 참.]
솔리아는 복잡한 심경으로 정다운을 쳐다봤다.
자신을 삼켰던 은린어가 어떤 놈인지 알려 주는 대신 그에게 내건 조건.
솔리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되물었다.
[정다운 너는 악령기사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는데도 두렵지 않아? 아무리 격이 높아도 그렇지,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사기의 영향을 받을 텐데?]
“그래서 그 악령기사라는 게 대체 뭔데? 망령하고 다른 거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라. 망령은 자아를 잃고 떠도는 영혼의 잔재일 뿐. 하지만 악령은 원한을 품고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사악한 존재라고.]
[그렇다면 정화 스킬로 녹여 버리면 그만이지요! 얍얍!]
갑자기 토끼가 짠 나섰다.
녀석은 정다운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서 허리에 두 손을 짚고 당당한 포즈로 우쭐거렸다.
[심지어 상급이지롱! 상급 정화는 범위 스킬이라 악령 몇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전체 공격이 가능하다는 말씀!]
“왜 내 스킬로 네가 우쭐대냐?”
[에헴. 우리 사이에 네 거, 내 거가 어딨음?]
전혀 긴장감이 안 느껴지는 둘의 모습에 루갈은 씁쓸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크륵. 쉽게 생각하지 마라. 정화 스킬은 절대 만능이 아니다. 너희는 저 악령들을 상대할 생각 말고 유적지 공략이나 돕는 게 좋을 거다.]
참가자들은 가급적이면 악령기사들과 마주치지 않는 편이 안전했다.
마주치는 순간 잡혀 죽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솔리아가 정다운을 불렀다.
[아니. 정다운, 너는 유적지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외벽을 봤으면 좋겠어.]
“외벽을?”
[그래. 그게 바로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
솔리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정다운이 눈을 돌렸다.
상황이 정신없이 흘러가서 주의 깊게 못 봤는데, 세이렌의 호수 밑에 있던 유적지의 모습은 피라미드를 연상시켰다.
물론 피라미드보단 좀 더 복잡하게 생기긴 했다.
그 주변을 돌로 조각된 온갖 건축물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니까.
[여긴 원래 황제의 무덤으로 지어진 곳이었어.]
“아! 역시 무덤처럼 생겼다 했더니 황릉이었구나.”
정다운의 말에 솔리아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래. 황릉이 될 뻔 했지. 하지만 이곳에 들어갔어야 할 제국의 황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금단의 비술을 사용하고 말았다.]
“금단의 비술?”
어쩐지 익숙한 단어였다.
[가까이 가서 직접 보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거야.]
솔리아의 안내에 따라 정다운은 유적지의 입구가 아니라 비스듬하게 경사진 벽으로 다가갔다.
이 호수는 세이렌들이 이끼까지 다 뜯어먹어서 물속에 오래 잠겨 있었던 건물이라 할지라도 보존 상태가 훌륭했다.
문득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누가 솜씨 좋게 벽에 낙서를 해 놨네요?]
황릉의 외벽에는 벽화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몹시 정교하게 음각한 벽화였다.
“이건 설마?”
정다운은 불현듯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각품들도 어떤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킬을 썼다.
“그림자 비술.”
이건 그림자 하인을 소환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파아앗!
갑자기 그의 그림자가 길어지더니 황릉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그러자 그 그림자가 벽화의 음각을 따라서 빠른 속도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그렇게 황릉의 외벽 전체에 새겨져 있던 벽화 전체에 정다운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 순간.
파아앗!
이변이 일어났다.
“……!”
[최초 업적 달성!]
“그림자의 추억을 되새기다!”
그림자 비술의 원래 목적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던전이 감탄합니다.
- 보상 : 바분 황제의 악몽
“……바분?”
익숙한 그 이름에 정다운이 의문을 떠올린 순간, 정다운의 그림자가 파도처럼 올라와 그의 몸을 뒤덮었다.
풍덩!
[앗! 님, 조심하……!]
삽시간에 토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하지만 뒤쫓아 오는 이들이 있었다.
먀오옹!
이미 그림자 안에 살고 있던 그림자 고양이들이 덩달아 주인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 * *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정다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함정일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어차피 이건 자신의 스킬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고, 이와 비슷한 상황은 몇 번 경험해 봤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업적의 보상.
‘바분 황제라고?’
바분이라는 이름이 흔하진 않다.
자신이 아는 ‘바분’이라면 딱 한 놈뿐이었다.
스테이지-2의 도우미였던 바분.
토끼를 쫓아내고 스테이지-1을 강탈해 갔던 바분.
거기서 더 욕심을 부려 스테이지-4까지 넘보다가 자신의 손에 죽은 바분.
‘그래, 그 말하는 개코원숭이의 이름이 바로 바분이었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개운한 표정을 짓는 정다운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황제라는 거야? 여기 제국의 황제를 위한 무덤이었다며?’
그 순간 어둡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광경은…….
“어?”
어느새 정다운은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뜬금없이 화창한 날씨였다.
따사로운 햇볕과 시원한 바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완연한 봄이었다.
“여긴 어디지?”
[하룬이야.]
“솔리아?”
어디선가 솔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다운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릴 뿐 정작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정다운의 시야에 다른 엄청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거대한 나무 한 그루.
그게 숲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라고 있었다.
“저거, 설마 세계수?”
[맞아. 그리고 이건 진짜 세계수야. 네가 뿌리째 뽑아 간 가짜와는 다른…….]
“너 어디서 말하는 거야?”
[정원사인 내가 어디 있겠어? 나는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수를 통해 말을 하고 있어. 하지만 이것도 곧 불가능해질 거야.]
“불가능해진다고?”
[세계수가 곧 사라질 테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정다운을 둘러싸고 있던 평화로운 분위기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녀들을 죽여라!”
“이 숲에 사는 사람들은 다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이다! 모두 불길한 존재들이다! 보이는 족족 즉참하라!”
“마녀들을 찾아라!”
살기 가득한 험악한 목소리들의 주인공을 발견한 정다운은 눈가를 찌푸렸다.
더없이 화려한 황금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숲속에 들어온 것이다.
정다운 본인도 몇 번이나 입어 봐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저런 갑옷은 실용성보단 장식품에 가까운 사치품일 뿐이었다.
그런데 저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진지하게 누군가와 싸우려고 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아, 그리고 말해 줄 게 있는데. 등천로에 있던 아라크네의 탑 기억하지? 여긴 그곳처럼 과거의 기억이 실체화된 곳이야.]
뒤늦게 솔리아가 중요한 말을 꺼냈다.
[여기서 죽으면 너 죽어.]
“야. 선물이라며? 이러기야?”
[…….]
솔리아는 찔리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내 선물은 세계수에 있어. 저 성기사들이 세계수를 찾기 전에 네가 먼저 도착해야 할 거야.]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계수를 찾기 전에? 저렇게 버젓이 보이는데 왜 찾아?”
[저 성기사들의 눈에는 세계수가 안 보이니까. 그러니까 더 서둘러야 해. 저들은 결국 이곳을 불태우고 말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