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05화>
나름 은린어들에게는 각각의 이름도 붙어 있었다.
은둥이, 은돌이, 은길이, 은숙이, 은선이, 은철이, 은…….
처음에는 꼼꼼히 이름을 지어 주던 정다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걸 느꼈다.
다름 아니라 녀석들의 번식 속도가 이름 짓는 속도보다 빨랐던 것이다.
은린어들은 가끔씩 연못 구석에 알을 낳곤 했는데, 그 알이 부화하게 되면 녀석들의 숫자가 2배씩 쭉쭉 늘어났다.
처음에는 정다운도 마냥 좋아했다.
가만히 놔둬도 식량이 저절로 늘어나는데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들의 숫자는 고리대금업자의 빚잔치처럼 끝도 없이 늘어났다.
물 반, 고기 반…….
그러다 나중엔 아예 낚시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연못에 손을 넣고 아무렇게나 휘저어도 물고기가 잡혔으니까.
이쯤 되니 정다운도 위기감을 느꼈다.
‘연못이 미어터지는데? 안 되겠다. 연못을 더 키워야겠어!’
정다운은 별수 없이 틈틈이 연못을 확장해 나갔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는 땅굴을 따라 뗏목을 타고 다니는 물길이 있었으니 공간은 충분했다.
물도 충분했다.
사자 분수대의 입에서 지하수가 무한정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던전이 리셋되면 지하수도 리셋되어서 지하수가 동날 걱정도 없이 계속해서 연못을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것조차 한계가 있었다.
나중엔 녀석들의 번식력이 점점 감당이 안 되어, 정다운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바로 각방.
‘남녀칠세부동석! 연못에 벽을 쳐서 암수를 따로 길러야겠어. 물고기들에게도 사생활이 있으니까.’
물고기들의 암수를 구별하는 건 쉬웠다. 수컷이 암컷보다 지느러미가 좀 더 화려했다.
그날부로 은린어들은 강제로 솔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쪽은 남탕.
다른 한쪽은 여탕.
물론 이 과정에서 은둥이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우! 잔인한 처사임! 은둥이들에게도 썸탈 권리가 있다!]
토끼의 비난에도 정다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떳떳했다.
“인생은 원래 혼자야. 우리 중에 솔로 아닌 사람 있어?”
[…….]
토끼(솔로)는 설득당했다.
하기야…… 물고기가 무슨 벼슬이라고. 좀 혼자 살면 어떻단 말인가?
아무튼 그렇게 여러 방법을 총동원해서, 정다운은 간신히 은둥이들의 번식 속도를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녀석들을 한 마리씩 낚아서 먹을 때마다, 오늘 죽은 녀석의 이름을 새로 태어난 물고기에게 물려주었다.
예컨대 오늘 저녁 메뉴로 ‘은돌이’를 먹었다면, 아직 이름이 없던 어린 물고기에게 ‘은돌이 2세’라는 이름을 지어 주는 식이었다.
…….
[자, 잠깐! 생각하면 할수록 찔리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쉿! 조용히 해. 그냥 웃어! 눈 마주치지 마!”
[히히…….]
“헤헤…….”
정다운과 토끼는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하늘을 나는 은둥이를 어색한 미소로 환영해 주었다.
‘녀석들’이 지난 일을 기억해 내는 순간 몹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꾸어엉!
꾸엉! 꾸엉-!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게이트 안에서 은린어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 나오고 있었다.
겨우 5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은둥이 7세, 은숙이 3세, 은철이 5세……. 오늘 여기서 정모하나 본대요?]
모두가 얼빠진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뒤늦게 퍼뜩 정신 차린 루갈이 황급히 소리쳤다.
[크르렁! 뭐하는 거냐! 어서 저 게이트를 닫아라! 저놈들이 더 들어오기 전에!]
“아! 그렇지!”
던전에 저런 규격 외의 존재들이 멋대로 난입했다간 던전의 생태계가 깨지게 된다.
정다운도 그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게이트를 닫았다.
겨우 5초 만에 정신 차렸으니 이 정도면 빠르게 대처한 편이었다.
다만 1초에 한 마리씩, 총 5마리의 은린어들이 하룬의 하늘에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꾸어엉?
꾸엉?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와 버렸다.
녀석들의 크고 동그란 눈이 정다운과 토끼를 발견하고 말았다.
꾸우엉!
녀석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정다운과 토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쟤, 쟤네 지금 우리 알아본 것 같지?”
[으악! 이쪽으로 몰려와요! 튀, 튀!]
꾸어엉!
“정다운 씨! 피하십시오!”
“저희들이 합세하겠습니다!”
호수 밑에 서 있던 헬스맨들이 정다운을 돕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대처가 늦었다.
참고로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정다운과 토끼를 포위했다.
워낙 당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고,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정다운조차 간신히 무기를 꺼내 든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녀석들이 바로 공격을 해 오지 않았다.
“뭐, 뭐지?”
[히익. 가까이서 보니까 얘네들 진짜 많이 커 버렸네요.]
꾸우엉!
“……?”
오늘 먹은 식사가 어찌나 영양이 풍부했는지, 녀석들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이 중에서 가장 작은 개체인 은숙이 3세만 해도 벌써 관광버스만 한 크기였다.
그리고 가장 큰 개체인 은둥이 7세가 그 두 배쯤.
입을 벌리면 골렘조차 씹어 먹을 것 같은 그런 터무니없는 놈들이 지금 정다운과 토끼를 포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콕콕.
꾸엉?
콕콕.
꾸엉?
“……머리 치지 마라. 아프다.”
정다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린어들이 거대한 주둥이 끝으로 그와 토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말이 ‘툭툭’이지, 당하는 입장에선 관광버스가 전진 후진을 반복하며 머리통을 퍽퍽 밀치는 느낌이었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의사 표현이 너무 정확했다.
‘이거, 밥 달라는 뜻 맞지?’
- 보상 : 멍청한 은린어들이 밥 준 사람을 알아보고 기억합니다.
은린어들은 격이 올랐어도 여전히 멍청했지만, 정다운과 토끼에게 다가가면 먹을 게 떨어진다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콕…….
[아얏!]
털푸덕!
급기야 토끼는 뒤통수를 맞고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토끼가 벌떡 일어나 성질을 부렸다.
[야잇! 니들은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냐! 아얏! 뒤통수 좀 그만 때리라고! 줄 게 준다니까!]
콕콕. 콕콕.
콕콕. 콕콕. 콕콕.
콕콕. 콕콕. 콕콕. 콕콕.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꾸우엉!
[야잇……!]
은린어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지능이 높지 않았다.
차라리 뽀뀨가 몇 배는 똑똑했다.
“그래. 먹어라, 먹어.”
녀석들의 성화에 못 이긴 정다운이 결국 소지품에서 이번에 잡은 불귀신의 고기를 몇 덩이 꺼내 주었다.
그러자 녀석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고깃덩이를 한입에 냉큼 삼켰다.
그리고 퉤!
“응?”
퉤! 퉤! 퉤!
서로 짠 것도 아니고 은린어들이 동시에 불귀신의 고기를 도로 토해 버렸다.
주는 사람 입장에선 묘하게 기분 나빴다.
“뭐야? 기껏 줬더니 왜 뱉어?”
[그러게요? 격이 올랐다 이건가? 갑자기 안 하던 편식을 하네?]
“아, 잠깐. 이 상황 어디서 봤는데……?”
정다운은 문득 데자뷰를 느꼈다.
키우던 짐승이 갑자기 편식을 한다? 어디서 봤더라?
‘뽀뀨! 퉤!’
그렇다. 바로 뽀뀨였다.
정화된 뼛가루만 먹더니 입맛이 고급스러워진 건방진 땅다람쥐.
‘생각해 보니 은린어들에게도 주로 정화된 뼈를 뿌려 줬었지. 괜히 독성 있는 뼈를 썼다가 연못이 오염될 수도 있으니까.’
“정화.”
파아앗!
결국 정다운이 불귀신의 고기를 정화해 주자, 비로소 은린어들이 서로 경쟁하듯 열심히 주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다운이 혀를 찼다.
“와, 편식 쩌네. 설마 앞으로도 정화해서 줘야 하나?”
퉤!
그런데 또 뱉었다.
“아, 또 왜 뱉……! 어?”
철퍽!
[앗!]
정다운과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번에 녀석들이 침 뱉듯이 바닥에 뱉어 버린 건 불귀신의 고기가 아니었다.
[끄응…….]
은둥이의 체액에 홀딱 젖은 하얀 올빼미가 걸레짝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오! 솔리아다!”
[우왓! 여신님 살아 계셨네! 내가 분명 말했죠? 안 죽었을 거라고!]
뜻밖의 재회에 반가워하는 정다운과 토끼.
루갈이 혼이 날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솔리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크르렁! 솔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그가 걸레짝처럼 늘어진 솔리아를 거칠게 흔들며 울부짖었다.
[솔리아 님! 살아 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크릉! 괜찮으십니까? 무슨 말씀이라도 해 보십시오! 크르렁!]
[……그, 그만 좀 흔들어. 이 하룻강아지야.]
엄청 흥분한 루갈을 성질 나쁜 눈매로 쏘아보는 하얀 올빼미의 행색은 처참할 정도였다.
자랑하던 하얀 깃털은 물에 젖고 찐득한 체액이 들러붙어 더럽고 지저분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난 솔리아의 기분보다는 더럽지 않았다.
[나 삼킨 놈. 나와.]
오싹!
솔리아의 작은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은린어들을 향해 쏘아졌다.
[소, 솔리아 님……?]
그녀를 들고 있던 루갈의 털이 쭈뼛 서 버렸다.
그녀의 엄청난 위압감에 은린어들에게서 정다운을 구하러 다가오던 참가자들은 그 자리에서 그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잠깐이지만 한낱 미물 따위에게 잡아먹혀 죽을 뻔한 태양의 여신의 분노에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멍청한 은린어들은 풀릴 다리도 없고, 워낙 멍청했다.
……꾸어엉?
[나오라고. 나 먹은 놈.]
꾸엉?
꾸엉 꾸엉.
솔리아의 분노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녀석들이었다.
은린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며 유유히 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거지꼴을 하고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솔리아.
그 뒤에서 참가자들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곁에서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극한의 두려움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흠흠. 우, 우리는 그냥 유적지나 들어갈까요?”
“그럽시다. 아, 바쁘다. 바빠.”
[크르륵. 가, 같이 가자. 내가 친히 유적지를 안내해 주겠다.]
“어, 어이쿠.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루갈도 솔리아의 몸을 살포시 바닥에 내려 주고는 빠른 속도로 참가자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 던전 빨리 공략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지?”
정다운과 토끼도 슬그머니 그 무리에 묻어갔다.
하지만.
[너흰 남아.]
움찔!
솔리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으, 으응? 나 바쁜데?”
정다운은 어색한 표정으로 뒤를 천천히 돌아봤다.
솔리아는 여전히 시선을 하룬의 하늘을 날고 있는 은린어들에게로 고정한 채로 그에게 말했다.
[저 중에 나 먹은 놈 누군지 알려주면 선물을 주지.]
“은길이 5세, 그동안 즐거웠다.”
정다운은 선물에 약했다.
그의 손가락이 자동적으로 은길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마법처럼…….
아니, 마법이 맞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거대한 은린어 한 마리가 하늘 위에서 펑! 하고 폭발해 버렸다.
여신의 분노는 무서웠다.
[히익. 은길이 5세. 여기서 죽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물의 정령을 잡아먹고 진화한 은린어.
그 몸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퍼엉!
후두둑!
루갈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크륵!? 솔리아 님! 안 됩니다! 하룬의 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그래서 한 마리만 골라서 죽였잖아.]
후두둑!
은길이의 몸에서 터져 나온 물이 비처럼 불타는 하룬의 숲을 적셨다.
그리고 그 땅에서 어떤 변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