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00)화 (300/393)

<던전리셋 300화>

[너, 제법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있네? 그거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그냥 오다 주웠는데?”

[장난치지 마. 던전의 진실이 적혀 있는 책을 그냥 주웠다는 게 말이 돼?]

정다운을 쳐다보는 솔리아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던전의 진실?”

이쯤 되니 오히려 정다운이 더 묻고 싶었다.

토끼도 귓말로 속닥거렸다.

[아무래도 저 예쁜 언니 일기장에서 태어난 가짜 여신인 것 같은데, 그래도 여신쯤 되면 뭔가 알고 있으려나요?]

사실 마녀의 일기장은 마녀의 서재에 버젓이 꽂혀 있던 빈 마법서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많은 마법서들 중 아무거나 상관없이 손에 들고 던전의 존재들을 만지면 일기장의 내용이 나타나는 식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손에선 그냥 빈 마법서일 뿐이었다.

오로지 정다운의 손에서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정다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솔리아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하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루갈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입을 열었다.

[아, 그런가. 너 그러고 보니 그림자 비술을 익혔었지? 종말과 함께 소실되었던 진실들이 그림자 비술의 힘으로 다시 심연 위로 떠오르는 건지도.]

“아? 이게 그림자 비술 때문이었어?”

[오호라! 그런 원리였음?]

그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알게 되자 태평하게 기뻐하며 박수를 치는 정다운과 토끼였다.

[애초에 그림자 비술은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그 아이…… 가 연구하던 금단의 비술이니까. 그 힘을 이어받은 존재라면 능히 진실을 엿볼 자격은 충분하겠지.]

[호우! 그림자 비술이 그렇게나 중요한 거였다고요? 의미심장 쩌네!]

어깨춤을 들썩이는 토끼의 모습에 솔리아가 눈가를 찌푸렸다.

[다만, 자격이 있다 해서 그 진실을 엿보는 방법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 정다운, 너는 대체……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아낸 거지?]

그녀의 물음에 정다운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어쩌다 보니?”

[말해 줄 생각이 없나 보구나.]

“아니, 진짜로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건데.”

[하기야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 리는 없지.]

“……?”

정다운은 억울했다.

저 하얀 올빼미가 지금 엄청난 흉계를 꾸미고 있는 악당을 보듯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다운, 너는…… 대체 어떤 계획인 거지? 설마 평소에 아무 생각 없어 보였던 모습들까지 전부 노림수였던 거야?]

“아니, 저기요?” 

정다운은 진짜 억울했다.

왜 이렇게 진지한 걸까!

계획은 개뿔, 자신은 그냥 남들처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오해임! 이 인간은 진짜로 평소에 아무 생각도 없는 멍청, 아얏. 왜 때림? 편들어 줘도 지라르…… 아얏. 넵.]

토끼가 꿀밤을 맞고 겸허히 뒤로 물러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유치한 행동들이 솔리아에겐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녀가 제일 처음에 정다운이 했던 질문에 대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내가 마녀를 죽였냐고 물었지? 그 대답을 듣고 싶다면 너희는 이곳 하룬부터 공략해야 할 거야. ……물론 할 수 있다면.]

“아니, 그 정도로 딱히 엄청 궁금한 건 아닌데. 부모의 원수도 아니고.”

[흥. 또 그런 식. 이젠 안 속아.]

“…….”

[와우, 저 언니 의심병 보래요? 맨날 속고만 사신 듯.]

*   *   *

어찌 됐든 정다운 입장에서도 하룬을 공략하긴 해야 했다.

자신이 너무 불귀신들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곳의 참가자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적지의 위치까지 알게 된 이상, 그 안에 어떤 보물이 또 숨겨져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치를 알았다 해서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순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룬 깊은 곳에 존재하는 넓은 호수는 바로 화염충들의 서식지였다.

화염충들은 유충 때는 물에서 살다가, 성충이 되면 날개를 얻어 화기를 먹는 벌레로 다시 태어나 하룬 곳곳으로 퍼져 나가곤 했다.

어찌 보면 이 호수는 불타는 숲 하룬의 심장과 같은 장소였다.

루갈의 안내에 따라 정다운과 모든 참가자들은 불타는 숲을 지나 호숫가를 향해 이동했다.

그 모든 여정에서 수많은 화염충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폭발을 일으켰다.

실로 위험한 상황에 알파가 다급히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화염충들이 연쇄폭발하게 된다면, 아무리 골렘이라도 산산조각 나고 말 겁니다!>

“알아. 다이너마이트로 산 무너뜨리는 느낌인 거지?”

정다운은 골렘들에게는 최소한의 방어진만 구축한 뒤, 참가자들과 힘을 합쳐 화염충들을 상대해 나갔다.

물론 직접 힘을 합치는 건 그가 아니라 그림자 하인들이었다.

먀오옹! 

캬웁! 캬웁!

[꿀꺽꿀꺽 잘도 삼키네요. 그런데 님은 왜 놀고만 있는 거임! 뭐라도 하라고요!]

“나도 지금 바쁘거든?”

실제로 정다운도 나름 바쁘게 두 손을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솔리아가 의심가득한 눈으로 게슴츠레 쳐다봤다.

[저 손짓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거지? 설마 마법을 위한 수인? 금단의 비술?]

물론 아니었다!

그 정체는 정다운의 50가지 손그림자 놀이!

그는 다양한 손 그림자를 즉석에서 계속 생각해 내서, 그림자 고양이들이 변신할 수 있는 가짓수를 늘려 주고 있었다.

그림자 고양이들은 나비처럼 날아서 표범처럼 변해 화염충들을 습격하거나, 반대로 화염충이 폭발하려는 낌새면 허공에서 급격히 형태를 바꿔 피신하기도 했다.

“이게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야금야금 쌓이면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고! 내가 바로 전장의 마에스트로! 합! 합!”

던전의 정마에가 당당히 뒤에 숨어서 그림자 고양이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굳이 기합까지 지를 필요는 없었다.

[와, 그냥 뒤에서 손가락이나 꼬물대는 주제에 당당한 거 봐라?]

“그러는 너도 놀고 있잖아!”

[헷. 노는 게 제일 좋음.]

토끼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때마침, 열심히 그림자 하인들을 부려 먹은 덕분에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그림자 비술> 스킬이 5레벨로 발전했습니다.]

[히익? 이분 놀면서 레벨 업 하시네!]

“봤어? 노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합! 합!”

덕분에 더욱 당당하고 거만하게 전장을 지휘하는 던전의 정마에스트로였다.

[크릉…….]

*   *   *

호숫가에 다다르자, 앞서 걷던 참가자들 몇몇이 안색을 굳히며 사람들에게 주의를 줬다.

“모두 멈추세요!”

“더 앞으로 가면 위험합니다!”

그렇게 외치며 그들은 서둘러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아아아-!”

“……!”

어딘가에서 미성이 들려왔다.

듣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마성의 노랫소리였다.

알고 보니 호수까지 도착하는 길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물로 이루어진 매력적인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들이 호수 위에 서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인간들을 홀려 물에 빠뜨리는 세이렌들이었다.

[크르륵. 이곳은 ‘세이렌 호수’라고 불린다.]

루갈의 뒤늦은 소개에 참가자들이 따졌다.

“그런 건 미리 말해 주라고!”

“빨리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면서!”

[미리 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너희들은 저 세이렌들을 지나쳐야 유적지에 들어갈 수 있으니.]

루갈은 팔짱을 낀 채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고고한 야수들의 왕.

난폭한 숲의 지배자.

한때 누구보다도 지혜로우며 흉포했던 숲의 귀족 루가루 일족에게 세이렌의 노래 따위는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다.

“아아아-!”

“푸학! 사, 살려 줘!”

첨벙 첨벙!

이미 세이렌 호수에는 선객들이 있었다.

바로 정다운과 별개로 한참 전에 이곳에 도착했던 참가자들.

그들은 세이렌에게 홀려서 물에 빠진 채로 세이렌들과 필사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노래에 홀려 물에 빠지면 정신이 번쩍 들지만, 그땐 이미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 후였다.

[크르륵. 저들은 화염충들과 불귀신에게 쫓겨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보통은 저게 하룬의 정상적인 흐름이지. 너희도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빨리 귀부터 막는 게 좋을 거다.]

루갈의 조언이 아니라도 그들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호수 안에서 태어나고 있는 화염충들을 상대해야 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

[그런데 저 유적지로 어떻게 내려감? 역시 잠수뿐임?]

귀를 꽁꽁 묶어 청각을 차단한 토끼가 호수 아래를 가리키며 물었다.

호수의 물이 너무 맑다 보니 그 아래 잠겨 있는 유적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루갈은 귀를 막은 참가자들 모두를 돌아보며 전체 귓말로 미션을 공지했다.

[크르렁! 다 듣거라! 네놈들은 이제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세이렌들과 싸워 이겨야 할 것이다. 세이렌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저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적지로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

“뭐? 물속에서 세이렌을 상대하라고!?”

“신종 자살인가?”

당황한 모습으로 술렁거리는 참가자들.

“말도 안 돼! 세이렌은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물속에서 세이렌들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지?”

“유적지에 들어가야 하니까 밖에서 공격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잖아?”

“이런 거면 애초에 세이렌에게 홀리거나 홀리지 않거나 똑같은 거잖아?”

비로소 참가자들은 루갈이 굳이 세이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알파도 깨달았다.

<이런! 어째서 저 가짜 여신이 정다운 님을 하필 이곳으로 추방했는지 알겠습니다.>

[그러게요. 상성 최악인데요? 호우! 여신님의 잔머리가 완전 쩔어 버림! 우리가 세계수 찾아서 못 가게 하려고 엄청 시간 끌 생각이었네!]

토끼가 솔리아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탄성을 터뜨렸다.

놀라운 심계였다.

아무리 정다운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다른 잔머리를 굴릴 수가 없었다.

[크륵. 맞다. 네놈들의 주 무기인 흙 골렘들도 물속에 들어가면 힘을 잃고 만다. 내가 시간이 없다고 한 말이 이제 이해가 되나? 이곳을 통과하는 일은 엄청 오래 걸린다.]

루갈과 솔리아는 자신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정다운이라도 하룬의 유적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참가자들과 똑같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네가 자랑하는 흙 뭉치기 스킬도 여기서는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호수를 흙으로 다 메우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뜨끔?

정다운의 표정에 루갈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크륵. 만일 그랬다간 유적지도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심지어 호수의 물이 전부 위로 넘쳐흘러 하룬의 불을 전부 꺼 버리겠지. 그때는 진짜 게임 오버다.]

“괜찮아.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뭐? 설마, 네놈 또?]

정다운의 자신만만하게 소지품을 열자 루갈이 표정을 굳혔다.

생각해 보니 그는 예전에 한 번 세이렌의 인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전혀 싸우지 않고.

힘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로 배 터질 때까지 음식을 먹여서 세이렌을 굴복시켰던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크르렁. 허튼짓 마라! 네놈이 얼마나 식량이 많은진 몰라도 이 많은 세이렌들을 다 배부르게 하는 것이 가능할 성싶으냐! 식량만 버리는 짓이다!]

“음. 가능할걸? 알파만 허락해 준다면.”

<…….>

쿵 쿵 쿵 쿵!

정다운의 앞에는 이미 그동안 착실하게 모아 둔 식량들이 산처럼 쌓여 가고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고, 크기도 엄청 컸다.

외뿔 멧돼지의 고기, 범독수리의 고기, 슬러그 조각, 불귀신의 고기…….

자잘한 채소와 곡식들은 다 제외하고도 이만큼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양을 본 알파가 간만에 폭발했다.

<대체 그동안 얼마나 꿍쳐 두고 있었던 겁니까! 이 제물들을 다 바쳤더라면 %&[email protected]#……!>

“그랬다면 여기서 시간 낭비를 했겠지. 얼른 에르테아 온기를 모아야 한다며?”

<과연 훌륭한 대비책이셨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셨군요.>

“너 어째 점점 토끼를 닮아 가는 것 같다?”

<…….>

결국 자린고비 알파의 허가까지 떨어지자, 더 많은 식량들이 그의 발 앞에 쌓여 갔다.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참가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와, 저게 다 뭐야?”

“맙소사. 저게 다 식량이라고?”

“역시 정다운 씨다.”

“처음 보는 괴물도 있어!”

“대체 저분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옥을 지나오신 걸까.”

물론 오해였다.

그런데 참가자들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걸로 뭘 하실 생각이지? 어어? 왜 저 아까운 것들을 호수에 던지시는……!?”

“자, 먹어라!”

퐁당 퐁당!

식량 대방출!

정다운이 식량들을 세이렌들을 향해 하나하나 던져 주기 시작했다.

그에 대처하는 세이렌들의 반응이 격렬했다.

“아아아-?”

“아아호!?”

“요호!”

풍덩 풍덩!

세이렌들은 노래를 부르다 말고 깜짝 놀라 경쟁하듯 너도나도 호수 밑으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다른 세이렌들보다 식량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앗! 저거 보셈! 쟤들 서로 싸워요!]

“어허! 더 있으니까 싸우지 말고 나눠 먹어, 이 녀석들아!”

정다운은 허허 웃으며 금붕어들한테 모이 뿌려 주듯이 아낌없이 뿌려 대고 있었다.

[크륵. 정말 한 치도 아깝지 않은 표정이라니. 설마 저것 말고도 식량이 더 있다는 말인가?]

그 어이없는 광경에 루갈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솔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솔리아 님, 이 정도면 진짜 생각보다 빨리 공략이 가능하겠…… 솔리아 님? 어디 가셨습니까?]

옆에 있던 솔리아의 모습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루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퍼뜩 놀라고 말았다.

[이런 설마! 솔리아 님!?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저 앞에 하얀 날개를 펼치고 빠르게 날아가고 있는 하얀 올빼미가 보였다.

그 앞엔 물의 정령 세이렌의 호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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