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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297)화 (297/393)

<던전리셋 297화>

*   *   *

이 세상에는 참 많은 음식들이 존재하지만, ‘우유’가 빠진다면 아마 그 숫자는 반으로 뚝 줄 것이다.

쓰임새도 참 많다.

치즈를 만들 때도 쓰이고.

생크림을 만들 때도 쓰이고.

하지만 우유는 식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매우 훌륭한 음식이다.

그냥 시원하게 마셔도 맛있고.

빵과 곁들여도 고소하고.

곡식 시리얼에 말아 먹어도 끝내주고…….

그동안 던전에서 참 많은 음식들을 먹어 본 정다운이었지만, 우유만큼은 아직까지 한 번도 먹어 볼 수 없었다.

우유가 있으려면 먼저 소를 찾아내야 하는데, 던전에서 소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있었다!

바로 스테이지-3에 소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지!?’

정다운은 자신의 무심함을 통감하며 자책했다.

언젠가 참가자들이 소금값으로 줬던 ‘불귀신의 장갑’은 스테이지-2에서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주로 뜨거운 함정을 해체할 때나 쓰는 가죽 장갑이었는데, 뜨거운 물건을 직접 만져야 하다 보니 내구도가 빨리 닳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다. ‘가죽’ 장갑이었던 것이다!

“이게 설마 소가죽이었을 줄이야!”

아무리 정다운이라도 가죽을 보자마자 그게 무슨 가죽인지 맞출 안목은 없었다.

워낙 괴물들의 가죽들이 많다 보니 불귀신의 장갑도 그냥 괴물의 가죽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게 바로 우유의 실마리였을 줄이야!

게다가 그 실마리를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도 아니고 잔뜩 가지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정다운이 소지품에서 불귀신의 장갑을 계속 계속 꺼내는 모습에 토끼가 혀를 내둘렀다.

[뭐임? 왜 이렇게 많아요? 정작 본인은 스테이지-2에는 발을 들인 적도 없으면서.]

“예전에 사람들이 소금값으로 많이 얹어 줬었거든.”

[아항. 그러고 보니 님이 한창 내구도 깎인 잡템들을 위주로 받았었죠.]

“오! 이게 그나마 내구도가 절반쯤 남아 있네.”

정다운은 그나마 가장 멀쩡해 보이는 불귀신의 장갑을 양손에 착용했다.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우유를 짜 보실까? 수컷은 위험하니까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치고, 암컷만 울타리 안에 가둬야겠어.”

그 말에 토끼가 품에서 잽싸게 애꾸눈 안대를 꺼내더니 한쪽 눈을 가렸다.

그리고 머리에 해적 모자를 고쳐 쓴 후에 불한당 같은 표정으로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모두 들었느냐! 우리 선장님이 수컷은 전부 죽이고 암컷만 납치하랍신다! 낄낄낄! 모두 공격!]

“응? 야, 그러니까 꼭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난 그냥 우유를 짤 뿐이라고!”

크워어!

정다운의 억울한 외침은 앞으로 우르르 달려 나가는 골렘들의 험악한 괴성에 묻혀 버렸다.

어느새 골렘들의 눈에도 자그마한 애꾸눈 안대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은근히 디테일에 집착하는 토끼였다.

크워어!

크오오옴!

골렘들과 불귀신들이 본격적으로 맞붙자 주변의 나무들이 우지끈 부러졌다.

그러자 그 나무에서 치솟고 있던 새빨간 불길이 다른 곳에 옮겨 붙으면서 숲속이 더욱 불지옥으로 변해 갔다.

골렘과 불귀신의 괴력은 막상막하였다.

심지어 몸이 재생하는 특징까지 비슷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숫자는 불귀신들이 훨씬 많아서 본격적으로 싸웠다간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싸워서 이길 생각이 아니라, 가두기만 하는 거면 얘기는 달라지지.’

처처처처척!

정다운은 골렘들과 맞서 싸우는 불귀신들의 사이사이에 흙벽을 쳐서 그들을 제각각 떨어뜨렸다.

“크오옴?”

전투 중이던 불귀신들은 갑자기 눈앞이 벽에 가로막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싸우려면 일단 상대가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이 상황에서 불귀신들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벽을 파괴하거나.

벽을 돌아서 가거나.

처음엔 일단 파괴를 시도했다.

“크오옴!”

콰쾅! 콰르르……!

엄청난 괴력에 흙벽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형태만 조금 허물어졌을 뿐, 그 안에도 어차피 흙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히히! 소용없지롱! 평소보다 두세 배는 두껍게 쌓았거든!]

“네가 쌓았냐고! 왜 네가 생색…….”

[앗! 쟤 또 옆으로 돌아감!]

“그렇겐 안 되지!”

처처처처척!

정다운의 손짓에 벽을 돌아가려던 불귀신들의 움직임을 따라서 새로운 벽이 세워졌다.

“크오옴?”

또 당황하는 불귀신들.

그 벽을 피해서 계속 옆으로 이동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처처처척!

“크오……?”

[헹! 또 막혔지롱!]

벽이 자꾸 따라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자, 이번엔 새로운 마음으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보기로…….

처처처척!

“크오오…….”

불귀신들은 답답했다.

싸우고 싶었다.

뻔히 이 벽 너머에 골렘들이 있는 걸 아는데,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독방에 갇힌 후였다.

“크오오옴!?”

퍼뜩 놀라며 포효하는 불귀신들을 보며 토끼가 박수를 쳤다.

[아싸! 한 마리 납치 성공!]

“납치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 그러네요. 감금 성공!]

“…….”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반박하기 힘든 정다운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괴물을 가두는 것이 나쁜 일은 절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은 떳떳했다!

“자, 이번엔 저놈이다! 저기 또 한 마리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여봐라! 우리 두목님이 저 암컷도 잡아 오랍신다!]

“이젠 아예 두목이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다운은 재빨리 새로운 벽을 쌓아서 불귀신의 진로를 방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흙벽이 점점 길게 이어져 갔다.

그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불귀신들도 늘어났다.

[크르륵…….]

루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하룬의 모습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숲속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미로.

그 복잡한 벽 사이를 불귀신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한두 마리씩 흩어진 채.

놈들은 이미 저 미로 안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크륵. 이래선 마치…….]

[그래. 마치 던전(Dungeon) 같구나.]

부어엉.

솔리아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던전은 저런 식으로 위험한 괴물들을 가두는 데 쓰이는 감옥이었지. 던전 속의 던전인 셈인가.]

[……어떤 마법사도 저렇게 우악스러운 방식으로 던전을 짓지는 않습니다.]

[아니다. 오히려 저게 정석이다. 마법이 발전하기 전에는 건물이나 던전을 모두 사람의 손으로 직접 짓곤 했으니까.]

[…….]

솔리아의 말에 루갈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분명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 옛날에도 적어도 저런 용도로 짓지는 않았을 터였다.

던전이라니? 저래서는 그냥 젖소 농장 아닌가.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크오옴……!”

정다운이 공중 계단 위를 걸어서 독방으로 다가오자, 그 안에 갇혀 있던 불귀신이 험악하게 이를 갈았다.

[음. 저 표정을 해석하자면 ‘인간, 죽이겠다.’라는 느낌일 듯?]

정다운도 이를 갈았다.

“우유, 짜 주겠다.”

그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 선생님처럼 멋지게 눈을 번뜩이며 불귀신의 장갑을 고쳐 맸다.

그리고 마법 창고를 이용해 골렘들을 독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자, 너희는 내가 우유 짜는 동안 얘 꼼짝 못하게 잡고 있어.”

“크워어!”

“크옴!”

당연히 반항이 심했다.

하지만 이쪽이 숫자가 많아서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다운은 불귀신의 앞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열심히 젖을 짜기 시작했다.

“잘 봐 둬, 애들아. 다음부터는 너희가 해야 되니까.”

“먀앙?”

밑에서 큰 항아리를 받쳐 들고 대기하고 있던 그림자 하인들이 넙죽 대답했다.

“이래 놓고 우유 안 나오면 진짜 반전인데…….”

물론 반전은 없었다.

“크오옴!”

[앗! 나와요! 우유가 나옴!]

“좋았어!”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요령이 좀 필요했지만, 정다운은 그 요령을 금방 깨우쳤다.

불귀신의 젖에서 뜨거운 우유가 정수기 뜨거운 물 나오듯이 철철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우유였다.

“와, 누가 불귀신 아니랄까 봐 우유도 뜨겁네? 어디 맛부터 좀 볼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맛이었다.

독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상급 정화 스킬 덕분에 독 같은 건 걱정 없었다.

그는 우유를 한 컵 가득히 따라서 후후 불며 입으로 홀짝거렸다.

호로록.

“……!”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토끼가 옆에서 안달을 냈다.

[왜요? 어때요? 맛있어요? 괜찮음?]

“지, 직접 마셔 봐.”

토끼도 한 잔 따라 주었다.

그리고 호로록.

[크읏! 대, 대박! 이거 진짜 뿅 감!]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은 어릴 때 우유를 먹고 산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물론 토끼는 인형이지만.

정다운은 순식간에 불귀신의 우유 한 컵을 다 마셔 버리고 탄성을 터뜨렸다.

“와, 엄청 고소한데? 온도가 뜨끈해서 그런가?”

그런데 그때 알파가 말했다.

<흠. 불귀신의 우유에 이런 효능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응? 무슨 효능?”

<조금 전에 비해 더위가 좀 가시지 않았습니까?>

“어?”

그 순간 정다운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진짜 안 덥네!?”

당연한 말이지만 불타는 숲 하룬은 엄청나게 더웠다.

위험하고 말고를 떠나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무더운 던전이었다.

이것도 그나마 화염 내성 갑옷을 입고 있어서 이 정도였지, 맨몸이었다면 땀이 줄줄 흘러내렸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전보다 훨씬 덥지 않았다!

“이거 설마?”

<불귀신의 가호입니다. 이 우유를 섭취하게 되면 불귀신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놀라운 사실이었다!

아무리 화염 내성이 붙어 있는 갑옷을 입어도, 갑옷 틈새로 흘러 들어오는 열기에 화상을 입을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은 원래 나약한 동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불귀신의 우유를 먹게 되면?

<매일 꾸준히 섭취하다보면 불에 타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건강식이었구나! 산삼을 많이 먹으면 여름에도 덥지 않은 거랑 비슷한 느낌인가?”

“크옴?”

그 순간 괜히 불길한 기분을 느낀 불귀신이 몸을 움찔거렸다.

할짝.

자신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조그만 인간의 시선에 기가 눌린 것이다.

그의 시선은 그동안 자신이 봐 왔던 인간들의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공포의 제왕인 자신을 한낱 음식으로 치부하는 탐욕스러운 시선이었다.

“안 되겠다. 이건 도저히 혼자 먹기 아까워. 이번에 온 김에 아예 여기에 우유 공장을 차려 볼까?”

정다운은 우유 짜는 것을 그림자 하인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다시 공중 계단을 밟고 성큼성큼 하늘 위로 올라갔다.

“구획을 제대로 짜야겠어.”

그는 미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좀 더 실용적으로 개조하고 확장해 나갔다.

“자고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소에게서 좋은 우유가 나오는 법이지.”

미로를 떠도는 수컷들은 전부 밖으로 내몰고, 암컷들은 좀 더 안락하고 쾌적한 원룸을 제공해 주었다.

“아, 그렇지. 여물도 줘야겠다. 불을 많이 먹으면 우유가 더 진해지지 않을까?”

[음? 여물이 뭐임?]

“태양석.”

그는 아예 불귀신들의 독방에 태양석을 던져 넣고 불을 더욱 지펴 주었다.

화르륵!

“크오오옴!”

그러자 불귀신들이 미로 곳곳에 갇힌 채 광폭한 포효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무서운 기세가 하룬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숲을 탐험하던 참가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미친…….”

“저기는 대체 뭐지?”

“지옥이라도 되는 건가.”

“설마 저기가 유적지는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그런데 그때 누군가 경악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헉! 저기 봐! 저 안에서 불귀신들이 줄지어서 나오고 있다고!”

“이런 젠장! 역시 유적지였구나! 모두 전투 개시!”

“크오오오옴!”

참가자들은 미로 안에서 줄지어 빠져나오는 수컷 불귀신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숫자가 절반이라 상대하기는 비교적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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