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93)화 (293/393)

<던전리셋 293화>

*   *   *

어느 날, 미국의 앨런 와이즈먼이라는 학자가 세상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구에 모든 인간들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결국 ‘숲’이 된다.

던전도 마찬가지였다.

던전이야말로 오래전 종말이 와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사인간들이 사라져 버린 세상이었다.

아무리 융성하게 발전했던 도시라도 관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대부분은 50년, 나무로 된 건물이라면 10년이면 폭삭 무너진다.

아무리 단단한 석조 건물이라도 몇 년 후면 그 위에 푸르른 새싹이 돋아나고, 벽에 뿌리를 내려 결국엔 건물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면 어떻게 될까?

점점 과거의 인공적인 흔적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 위에 울창한 숲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끝까지 모습을 유지하는 ‘특별한’ 건축물도 있었다.

그게 바로 유적지.

마법적인 가호를 받아 세월의 풍파를 버텨 낼 수 있는 장소들이었다.

하지만 던전에는 건축물이 아니라 숲 자체에 특별한 가호가 깃들어 있는 지역도 존재했다.

[‘가호’라고 말하니까 몹시 이롭게 들리지만, 다른 말로 하면 ‘저주’받은 숲도 있다는 말이다. 크르릉.]

루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이 관리하는 던전을 이렇게 소개했다.

스테이지-3 하룬.

[환영한다. 나의 불타는 숲 ‘하룬’에 도착한 것을.]

“하룬?”

화륵! 화르륵!

깃털의 힘으로 스테이지-3에 도착한 정다운의 앞에는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어우, 여기 너무 덥네요. 쳐다만 봐도 토끼구이 될 기세임.]

토끼가 손부채질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푸르른 초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풀과 잎사귀 대신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시뻘건 화마가 불타며 독사의 혀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다운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여기 왜 이래? 산불이라도 난 거야?”

[아니, 하룬은 사시사철 원래 이런 곳이다. 불이 식더라도 던전을 리셋하는 순간 다시 이렇게 불타기 시작하지.]

설명하는 루갈은 평소보다 더욱 근엄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토끼가 그에게 물었다.

[님, 왜 그렇게 신났어요? 혹시 님네 동네 왔다고 신났음?]

[크륵? 그게 무슨 소리지? 난 평소와 똑같다.]

당당!

[…….]

말과는 다르게 루갈의 꼬리가 전에 없이 빳빳하게 위로 뻗쳐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던 토끼의 이마 위에 갑자기 작은 불똥 하나가 툭 떨어졌다.

타닥.

[앗뜨! 갑자기 뭐임? 왜 하늘에서 불비가 내림!?]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어 오르는 토끼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루갈이 클클 웃었다.

[크르륵! 가끔 그러기도 하지. 여기선 매사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히잉. 이걸 어째. 내 모자에 구멍이 났음!]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불비가 야금야금 계속 내리고 있었다.

토끼는 슬픈 표정으로 구멍이 숭숭 난 까만 중절모를 벗어서 후후 불다가, 정다운을 쳐다봤다.

[여기에선 천으로 된 옷은 절대 못 입겠네요. 님도 조심…….]

“응?”

이제 보니 정다운은 황금 투구를 쓰고 있어서 불비를 전부 피하고 있었다.

토끼가 순간 욱했다.

[이 치사한 인간아! 혼자만 그런 거 입고 있으면 좋냐!]

“흠, 이 숲에서는 천으로 된 옷은 절대 못 입고 다니겠는데?”

[방금 내가 한 말이잖아요! 이 따라쟁이야!]

“우산이라도 만들어 주려고 했더니 필요 없나 보네.”

[생각해 보니 제가 나중에 말한 것 같네요. 제가 바로 따라쟁이입니다.]

돌아서며 중얼거리는 정다운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환하게 웃는 토끼.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인형 옷이라는 게 보통 그렇듯이 토끼의 옷장에는 천으로 된 옷이 대부분이었다.

“저번에 바하무트한테 만들어 줬던 양산을 몇 개 더 만들어야겠다.”

정다운은 태양을 피하고 싶었던 눈사람을 위해 화염 저항력 옵션이 달려 있는 양산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이미 한번 만들어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기에 본인이 직접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림자 비술.”

“먀아옹?”

“두 마리는 양산 만들고, 나머지는 완성되기 전까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똥들 좀 대신 처리해 줄래?”

“먀아앙.”

그의 명령에 그림자 가내수공업자들이 양산 제작을 시작했다.

나머지 그림자 고양이들은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주변을 돌며 불똥들을 날름날름 삼키기 시작했다.

그중 두 마리는 아예 정다운과 토끼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똥들을 하나하나 막아 주었다.

토끼가 탄성을 터뜨렸다.

[크으! 역시 그림자 고양이들이네요!] 

“그러게! 스테이지-4에서 얻은 녀석들이라 하위 던전에서는 무적이네!”

그림자 고양이들에게 빛은 장난감이자 간식.

빛을 머금은 불똥도 한입에 삼켜 버리면 금방 열기를 잃고 식어 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크륵. 던전 한가운데서 이렇게 여유부릴 정도로 하룬이 편안한 곳은 아니지.]

루갈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쫑긋!

그때 갑자기 그림자 고양이들의 귀가 일제히 쫑긋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화르륵!

갑자기 주변의 화염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불길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살아 있었다.

화륵! 화르륵!

갑자기 온 사방에서 빨간 불똥들이 정다운과 토끼를 둘러싸며 벌 떼처럼 날아오기 시작했다!

[으익! 큰일 났음! 화염충이 몰려와요!]

“……!”

지금은 죽고 없는 석정호가 쓰던 스킬 화염충!

그런데 석정호의 스킬과는 다르게, 불타는 숲 하룬에서 사는 화염충들은 크기가 더 크고 화력도 훨씬 강했다.

[크르륵.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완전히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된 화염충들이 이 숲에 넘쳐 나니까.]

루갈의 설명을 들을 것도 없이 정다운의 눈앞에서 다 큰 어른이 된 화염충들이 장렬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왜애앵- 콰쾅! 쾅! 콰앙!!

엄청난 폭발력!

과거에 봤던 석정호의 스킬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크륵. 어떠냐. 이 정도 폭발력이라면 아무리 갑옷을 입고 있어도 데미지를 입을 것이었다.]

“아, 뜨거워! 도착하자마자 정신없게 하네!”

루갈의 말대로였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화염충의 폭발에 의해 정다운은 자잘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갑옷과 갑옷의 틈새로 열기가 흘러 들어온 탓이었다.

그가 그림자 고양이들을 전부 자신의 앞으로 불러들였다.

“양산 그만 만들고 전부 저 벌레들을 막아!”

“먀앙!”

“어? 벌써 다 만들었니?”

어느 샌가 그림벨 2마리가 당당하게 막 완성된 양산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정다운은 흐뭇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누구 닮아서 그렇게 빠르니? 아차, 나 닮았지?”

하지만 아직 강화를 안 해서 화염 저항 옵션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 강화나 하러 다녀올까? 게이트 설치!”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파아앗!

갑자기 불타는 숲 한가운데 황금빛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이곳은 부유섬도 아니라서 어디서든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에 루갈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크륵!? 뭐냐! 던전을 탐험하다 말고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응, 집에.”

[휴, 더웠는데 잘됐다. 그럼 바람 쐬러 집에 좀 다녀올게용.]

[자, 잠깐! 크르렁!]

[뿅.]

파앗!

[이, 이봐!]

미련 없이 게이트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정다운과 토끼.

[이, 이놈들이! 설마 던전을 탈출을 할 줄이야!]

루갈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실 그는 도우미의 자격으로 정다운이 던전 공략하는 모습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관할이 전혀 아니었기에, 정다운이 무슨 짓을 하든 남 일처럼 여겼던 것이다. 

당연했다. 

지금까지는 분명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스테이지-6까지 넘어간 인간이 이제 와서 스테이지-3로 다시 내려오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루갈이 목 놓아 솔리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솔리아 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그러게?]

부엉-.

그때 루갈의 머리 위에서 하얀 올빼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솔리아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참가자들만 봐 왔던 솔리아.

그녀는 설마 참가자가 던전에 도착하자마자 게이트를 열어서 탈출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쟤네 게이트도 열 수 있었어?]

[크르렁!]

[화내지 마! 나는 몰랐단 말이야!]

[캬오!]

푸드덕!

*   *   *

죽음의 산맥 정상.

대신전의 제단 위에 열린 게이트 안에서 정다운과 토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짠! 내가 왔다!]

“와, 여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는 것 같지? 감자도 많이 자랐네.”

정다운은 대신전에 심어 둔 감자가 무성하게 자라난 모습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자라서 탈이었다.

알파가 크게 슬퍼했다.

<아아, 대신전이 밀림이 되어 버리다니…….>

비료를 팍팍 줬더니 감자 줄기들이 거의 나무 기둥처럼 두꺼워져 있었다.

얇은 줄기들로 참가자들의 발목을 휘감던 식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러다 세계수라도 될 기세였다.

“그럼 먼저 양산부터 강화하고…… 어?”

콧노래를 부르며 제단 위에 손을 올리던 정다운이 순간 멈칫했다.

사라락.

자신의 몸 주위로 은빛 가루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 전 하룬에서 입었던 자잘한 화상들이 점점 아물어 갔다.

<세계수의 가호입니다.>

“와, 이거 진짜 죽이는데? 응?”

기뻐하던 정다운.

그런데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 커졌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제단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던 탓에, 그 바로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에르테아의 몸을 뒤늦게 발견하고 만 것이다.

정다운과 토끼의 입에 동시에 쩍 벌어졌다.

“우와, 이거 뭐야? 엄청나잖아!”

[대박! 진짜 대박!]

에르테아는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과거에 공룡 박물관처럼 새하얀 뼈만 남아 있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유골 안에 황금빛 모세혈관들이 아름답게 채워지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조차도 볼 수 없었다.

<기뻐하고 경배하십시오! 에르테아 님의 부활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알파의 말대로였다!

에르테아의 뼈 위에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근섬유들이 한 올 한 올 채워져 있었다!

대학교에 공룡 해부학 수업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대로 교보재로 사용해도 될 정도!

토끼가 탄성을 터뜨렸다.

[히야, 엄청 아름다워요! 부활하다 보면 점점 징그러워질 줄 알았는데, 피와 살들이 전부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니!]

<생명의 용 에르테아 님의 육체는 생명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빛의 용이라고도 불리셨지요.>

[빛의 용! 쩐다!]

그 호칭이 너무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뻥 뚫린 대신전의 천장 위에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볕까지 에르테아를 축복해 주고 있었다.

실로 장엄한 광경! 

격이 낮은 이들이 봤다면 저절로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어지게 하는 극한의 경이로움이 에르테아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괜찮았다.

격이 높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이미 콩밭으로 가 있었다.

진짜 콩밭이었다.

“흠, 여기에도 던전 콩을 좀 많이 심어 놔야겠어.”

토끼가 버럭 했다.

[이 마당에 농사나 하겠다고요!? 이 공감능력 없는 작자야!]

“나중에 솔리아 같은 애들이 이곳에 쳐들어오면 어떡해? 방어를 좀 해 둬야지.”

[공감요정이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얼른 태세를 전환하는 토끼였다.

알파는 흐뭇했다.

<점점 신전의 주인다워지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에르테아 님의 부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바로 ‘온기’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