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92화>
* * *
낙원은 연보라색 구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풍선과 같았다.
그 거대한 풍선 안의 빈 공간이 바로 낙원이었고, 그 풍선 위에 우뚝 세워져 있던 나무가 바로 세계수였다.
그리고 그 풍선 안에 있던 정다운과 솔리아는 천장에서 내려와 꾸물거리던 세계수의 뿌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세계수가 뿅 사라지자, 그 빈자리에 뻥 뚫린 구멍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펄럭.
그리고 그 구멍 위에서 아주 작은 점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건……?”
눈을 게슴츠레 뜨는 정다운.
자세히 보면 그것은 네모난 손수건 같았다.
아니, 눈을 크게 뜨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뽀오뀨-!”
펄럭 펄럭!
날다람쥐로 진화한 뽀뀨가 몸을 네모나게 활짝 펼치고 휘적휘적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뽀뀨야!?”
“뀨잇!”
정다운은 자신의 품으로 휘리릭 날아드는 뽀뀨를 받아 들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토끼도 감탄했다.
[오잉? 얘 털색이 갑자기 엄청 예뻐졌네요?]
자신들이 알고 있던 뽀뀨가 진짜 맞나 싶을 정도로 뽀뀨의 외견이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배 아래쪽은 여전히 새하얀 솜털.
하지만 등에 있던 지저분한 갈색 줄무늬가 사라지고, 은빛 찬란한 털이 등과 꼬리를 보송보송하게 뒤덮고 있었다.
마치 세계수에서 내려오던 은빛 꽃가루처럼 뽀뀨는 은빛 땅다람쥐가 되어 있었다.
“뽀뀨 뽀뀨!”
뽀뀨가 동글동글한 까만 눈망울을 깜빡이며 의기양양하게 정다운을 쳐다봤다.
알파가 뽀뀨가 변한 이유를 눈치챘다.
<이 미물도 격이 상승했군요.>
“격이?”
그렇다!
땅속을 기어 다니던 미천한 땅다람쥐는 결국 세계수 등반이라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그 결과 뽀뀨에게는 드라마틱한 진화가 일어났다.
마치 세계수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인간들이 격이 올랐듯이.
아니면, 죽어서 숲의 종족으로 다시 태어났듯이.
뽀뀨는 ‘날다람쥐’가 된 것이다!
네 개의 다리를 사방으로 쫙 펼치면 날개가죽이 네모나게 펼쳐지며 활강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쪼르르- 퍼얼럭!
“뀨우우!”
정다운의 머리 위로 쪼르르 올라가 폴짝 뛰어내리는 뽀뀨가 종이비행기처럼 허공을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딱히 날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날아다니는 모습이, 엄청 우쭐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루갈이 묘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크르륵. 한낱 미물 주제에…….]
그러고 보니 뽀뀨의 털은 루갈의 은빛 갈기와 정확히 같은 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서는.
[이건 꿈일 거야…….]
솔리아는 허망한 얼굴로 천장의 구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르릉.
퀘르쿠스도 마찬가지로 정다운이 있는 하늘 신전의 바로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다운을 쫓으려다 솔리아까지 방해한 퀘르쿠스였지만 지금은 미동도 없었다.
퀘르쿠스는 눈이 없다.
그래서 주변의 나무들을 통해 정다운을 보고 있었는데, 정다운의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가 사라지자 퀘르쿠스는 장님이 되어버렸다.
[이런 게 현실일 리 없어…….]
후두둑.
갑자기 솔리아의 거대한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헉!”
“도우미가 무너져 내린다!”
“모두 뒤로 물러나!”
그녀를 막고 있었던 류승우와 다른 참가자들은 크게 당황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점점 크기가 작아지면서도 솔리아는 당황하기보단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신은 오랫동안 살던 집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고.
정원사로서 기르고 있던 세계수를 잃었으며.
도우미로서 관리하고 있던 던전조차 잃고 말았다.
던전 리셋을 하면 된다고?
물론 된다.
하지만 그 거대하던 세계수가 원래 크기만큼 다시 자라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 낙원은 문을 닫고 당분간 참가자들을 받기 힘들게 되었다.
당분간? 아니, 정정하겠다.
아주 오랫동안.
이제 낙원이고 뭐고, 앞으로 여긴 한낱 문어들을 키우는 어항이 되어 버린 셈이다.
솔리아는 계속 계속 작아졌다.
한도 끝도 없이 작아지다가 결국 사람보다도 더 작아졌다.
애초에 솔리아는 이미 죽은 몸이었다.
죽어서조차 숲을 가꾸던 정원사의 영혼이 주변의 환경과 동화해 인간과 같은 몸을 임시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 진정한 정체는…….
부엉-.
솔리아는 농구공만 한 크기의 순백색의 부엉이로 변해 버렸다.
그녀의 놀라운 변신에 참가자들이 주춤거리며 수군거렸다.
“부엉이?”
[올빼미야! 이 멍청이들아!]
발끈 화를 내는 솔리아.
정정하자. 하얀 올빼미였다.
‘그런데 왜 부엉 하고 우냐고!’
참가자들은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부엉이나 올빼미나 울음소리는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문득 깨달았다.
“잠깐, 저 깃털 설마……?”
그러고 보니 솔리아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새하얀 깃털이 눈에 익숙했다.
낙원으로의 초대장.
자신들을 이곳으로 초대했던 ‘깃털’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푸드득!
솔리아는 하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올라, 부리부리한 눈으로 참가자들을 째려봤다.
[아무튼 이제 밤이야! 조금 이르지만 날이 어두워졌으니 다들 다음 낙원으로 얼른 가 버렷!]
부엉-!
그 순간 그녀의 새하얀 날개깃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아앗!
그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참가자들의 소지품 안에 있던 ‘깃털’들이 저절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번쩍! 번쩍!
깃털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내며 참가자들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어어?”
“또야?”
당황하며 몸을 허우적거리는 참가자들.
이번에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음 낙원을 향해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 전체 회복 덕분에 모든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정다운도 마찬가지로 새하얀 빛에 둘러싸여 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파아앗!
“어어어? 이제 또 다른 낙원으로 가는 건가?”
<그곳에도 분명 세계수가 있을 겁니다. 날아가는 중에 도끼날을 미리 갈아 두시는 건 어떻습니까?>
눈에 띄게 적극적으로 변한 알파였다.
그 모습을 아니꼽게 쳐다보는 솔리아의 입에서 침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아……. 겨우 한 그루 없어진 거야. 아직 다른 낙원들이 있으니까 아직 괜찮아.]
그래, 아직은 괜찮았다.
솔리아는 정원사.
‘정원’을 관리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곳을 정원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천만다행히도 그녀가 기르는 ‘세계수 화분’은 여기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스테이지-6이야말로 솔리아의 정원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뭐냐면, 저 악랄한 나무꾼이 이제 다른 화분을 향해 날아가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돼.]
솔리아는 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남은 세계수들을 그에게서 지켜야 했다.
파아앗!
“응?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정다운은 자신을 떠올려 주던 깃털이 갑자기 방향을 틀자 어리둥절했다.
토끼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앗! 지금 저 부엉이 님이 님 깃털에만 뭔가 수작을 걸었어요! 상급 도우미만 쓸 수 있는 권능임!]
[올빼미라고! 부엉이와 올빼미는 엄연히 다르단 말이야!]
부엉-!
하늘 신전으로 푸드덕 날아올라와 발끈 화를 내는 솔리아.
그녀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다운을 쏘아보며 말했다.
[정다운 너를 절대 다른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보내지 않겠어! 내 권한으로 네 초대장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게 될 거야!]
“와, 치사……!”
[앗! 치사하다! 그런 게 어디 있음!]
정다운이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빽 소리를 지르는 토끼였다.
하지만 솔리아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어디 있긴, 여기 있어! 이건 내 깃털이니까 내 마음대로라고! 그리고 토끼 너는 얌전히 스테이지-1에나 짱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따라 올라온 거야!]
[오? 나를 아셈?]
[널 왜 몰라! 도우미 중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너 하나뿐이라고!]
자기를 알아보자 상황에 맞지 않게 급반가워하는 토끼였다.
토끼가 눈을 글썽거리며 솔리아에게 아련하게 물었다.
[제가 대체 누군데요? 왜 저만, 저만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거죠? 역시 내가 바로 마녀의 환생…….]
[뭐라는 거야! 당연히 인형이니까 그렇잖아! 인형 옷을 그렇게 많이 입고 다니면서 그것도 몰라!?]
[……!]
솔리아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토끼였다.
설마 자신의 ‘옷장’에 가득한 옷들이……!
[소오름! 그게 전부 인형 옷이었다고? 어쩐지 너무 이쁘더라!]
“자, 수다 그만 떨고.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나 알려주면 안 될까?”
똑똑.
정다운이 옆에서 솔리아의 등에 노크를 하며 물었다.
솔리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뭐야! 왜 그렇게 태연해?]
“훗. 어차피 오류 인생. 이런 일 쯤은 너무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지.”
경로가 강제로 틀어졌는데도, 정다운은 달관한 표정으로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현자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이미 단톡방을 통해 여러 귓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정다운 : 나 잠깐 다른 곳 좀 들렀다 올 테니까, 그때까지 잘 살고 있어!>
<류승우 : 우리는 걱정 마! 나 이번에 엄청 강해졌으니까!>
<윤진수 : 그보다 진짜 돌아올 수는 있는 거죠?>
<정다운 : 당연하지! 먼저 가서 세계수가 있는지나 확인하고 알려줘! 바로 문어 열차 타고 후딱 날아갈 테니까! 하늘 신전 타고 가도 되고!>
<알파 : 류승우 사도에게 미니 제단이 있는 이상 방향 잡는 건 어디서든 가능합니다.>
[범독수리들이 네가 날아오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아?]
솔리아가 귓말들의 내용을 보고 발끈 화를 냈다.
세계수를 빼앗긴 것에 단단히 삐친 모습이었다.
그런데 생긴 게 동글동글한 올빼미라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화를 내는 표정이 참 귀엽기만 했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가게 된다고? 한집에서 동거도 한 사이에 막 바다에 떨어뜨리는 건 아니지?”
정다운이 솔리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슬쩍 마녀의 일기장을 컨닝 페이퍼처럼 들고 있었다.
푸드덕!
솔리아가 부엉 하고 화를 냈다.
[친한 척하지 마! 내가 말해 줄 것 같아!?]
[크르릉. 솔리아 님의 깃털은 어차피 숲이 있는 곳으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흠, 이 방향이라면…… 젠장. 내 관할이구나.]
“뭐? 숲? 네 던전으로?”
숲.
그 말 한 마디에 내심 안도하는 정다운이었다.
[루갈 너어! 진짜 나빴어! 그걸 말해 버리면 어떻게 해!]
[크륵!?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런데 알아 봤자 어쩌겠습니까. 솔리아 님의 깃털은 어차피 해를 끼치는 저주가 아니라서 막는 것이 불가능할 텐데.]
곧바로 솔리아에게 사과하는 루갈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정다운이…….
저 미친 오류종자가 자신의 던전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불안했다. 진짜 너무 불안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솔리아의 선택은 탁월했다.
자신의 맡고 있는 던전은 ‘땅끝’.
세계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어떻게든 정다운을 세계수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들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과연 상급 도우미시구나. 그가 내 던전들을 그냥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쪽으로 보내시다니. 게다가 내 던전이라면…….’
루갈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무리 자신의 관할이 하위 던전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정다운에게는 오히려 그곳에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이 오류종자라도 인간의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생존자 전체 회복이라도 매일 받는 게 아닌 이상 말이다.
하지만 루갈은 미처 몰랐다.
정다운이 세계수를 바치고 받은 보상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