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90화>
일기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1) 마녀가 나무를 심었다.
2) 나무가 무럭무럭 자랐다.
3) ‘세계수처럼’ 훌륭해졌다.
[즉, 여기 있는 세계수는 짝퉁이라는 말이네요? 진짜 세계수가 아니라?]
“응. 게다가 이런 짝퉁 세계수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지.”
[호오.]
토끼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정다운을 훑어봤다.
[의외로 님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네요? 그냥 무턱대고 베려는 건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또 언제 봤대?]
“그러는 너는 생각이라는 걸 해서 날 응원했냐?”
[나야 원래 아무 생각 없죠. 에헴.]
“……?”
[왜요. 뭐. 왜.]
쓸데없이 당당한 토끼였다.
아무튼 그간의 경험상 마녀의 일기장에 나온 내용은 고스란히 던전에 적용되어 있었다.
세계수도 마찬가지일 터.
거두절미하고 알파가 정다운을 재촉했다.
<아무튼 일단 벱시다. 그리고 하늘 신전을 불러들여 그 장작들을 제단에 올리시면 됩니다.>
“저번에는 안 된다며? 신전의 에너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그 전에 먼저 세계수를 베어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신나셨네. 우리 꼰대 님…….]
강경파 알파는 이미 제물에 눈이 뒤집혀 있었다. 눈은 없지만.
<저 세계수 안에는 막대한 생명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잘만 하면 에르테아 님의 부활이 코앞까지 앞당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반강제로 묵언수행을 해야 했던 알파는 이번 정다운의 과감한 결단에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고 있었다.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았어. 그럼 이번에 한번 제대로 일확천금을 노려 보자고.”
정다운은 도끼를 들쳐 메고 솔리아를 쳐다봤다.
천장에서 구불구불 뻗어 내려와 있는 세계수의 뿌리들.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진 솔리아는 그 앞에 우뚝 서서 인간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다가오면 다 밟아 버릴 거야!]
쿠르릉!
솔리아는 누구라도 가까이 오면 당장이라도 개미처럼 밟아 죽일 기세였다.
그리고 여기서 ‘개미’라는 건 절대 비유법이 아니었다.
20미터를 훌쩍 넘기고도 그녀는 여전히 커지는 중이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참가자들의 고개가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도우미는 왜 자꾸 커져?”
“무슨 성장기 어린이야?”
“이 정도면 무슨 아파트와 싸우는 기분인데?”
세계수 안에서는 그래도 싸워 볼 만한 크기였는데, 이제는 좀 무리였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솔리아의 진노한 음성에 깃든 살기가 피부가 저릿저릿하게 했다.
세계수에 진입하기 전에 들었던 비명초 같은 음성에 그들은 서둘러 귀를 막았다.
슬금슬금.
[정다운 너! 은근슬쩍 다가오지 마! 다 보여!]
움찔!
솔리아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야금야금 세계수를 향해 다가가던 정다운과 토끼가 결국 딱 걸리고 말았다.
무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쳇. 들켰네.”
[에이, 그래서 내가 멈추라고 말했잖아요.]
“뭐라고?”
[응? 아하, 귀 막았으면 막았다고 하시지. 이제부턴 귓말로 하죠.]
슬금슬금.
[대화하는 척 은근슬쩍 또 다가오지 마!]
“쳇. 들켰네.”
[에이, 그래서 내가 멈추라고 했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야금야금 다가오는 정다운의 모습에 솔리아가 주먹을 부들거렸다.
쿠웅!
그녀가 발을 구르며 으름장을 놓았다.
[진짜 오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너라도 봐주지 않아.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초대장’이 발동할 거야. 그때까지만 얌전히 기다려.]
“초대장이라고?”
솔리아의 엄중한 경고에도 정다운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귀는 막았어도 워낙 큰 목소리라서 작게라도 그 말소리가 들리긴 했다.
혹시나 하고 재빨리 소지품을 열어 봤더니, 그 안에 떡하니 ‘낙원으로의 초대장’이 들어와 있었다.
무간도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정다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이 깃털이 또 생겼네? 그럼 역시 여기 같은 낙원이 또 있다는 말이네?”
[그래. 있다, 있어! 격을 높이는 시련이 겨우 한 번으로 끝날 리 없잖아! 하지만 그렇다 해서 네가 이 나무를 함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야!]
버럭 하며 순순히 자백하고 마는 솔리아.
사실 이건 비밀도 아니었다.
낙원으로의 초대장은 어두운 밤이 되어야 낙원으로 참가자들을 인도한다.
참고로 지금은 낮.
어차피 이제 반나절만 기다리면 이곳의 참가자들은 전부 다른 낙원으로 날아가게 될 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다운은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이고, 이거 그럼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구나! 밤이 되기 전까지 저 큰 나무를 다 베어야 한다는 거잖아!”
<갑시다!>
[출발!]
“뿌우-!”
엉겁결에 덩달아 소리를 지르는 문어 지팡이!
이젠 눈치고 뭐고 없었다!
정다운은 다짜고짜 문어 열차를 타고 세계수의 뿌리를 향해 날아갔다.
[너 진짜……!]
그러자 그 앞을 막아서는 솔리아의 거대한 손바닥!
후와악!
[히이익!]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순간!
“응, 나 불교 아니야.”
정다운도 손바닥을 펼쳐 그녀의 거대한 손과 공중에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철썩!
[어어?]
사라락……!
그 순간 허무하게도 솔리아의 손바닥이 정다운의 앞에서 구름처럼 흩어져 내렸다.
그 사이를 뚫고 맹렬하게 돌진하는 문어 열차!
[아, 안 돼!]
솔리아는 다급하게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자꾸 손이 흩어져 버려 잡을 수가 없었다.
착!
결국 정다운은 세계수의 뿌리 위에 올라서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나무 베기! 나무 베기!”
쾅 쾅 쾅!
거침없는 도끼질!
그에 따라 세계수의 뿌리가 퍽퍽 신나게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공간이 확장되어 있던 안쪽보다 밖에서 나무를 베는 게 훨씬 효율적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꺄악! 왜 안 잡히는 거야!?]
솔리아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계속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내친김에 정다운은 속도의 룬(복제)까지 찢었다.
그 순간 벌목 속도가 그야말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나무 베기! 나무 베기!”
쿠콰콰콰……!
분명 도끼질을 하고 있는데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문득 더 좋은 생각이 났다.
“그렇지!”
정다운이 대장간에서 만든 커다란 톱날을 꺼내 그 중심에 손가락을 꽂고 돌렸다.
“돌리기!”
위이이잉!
그리고 세계수의 뿌리에 갖다 대는 순간.
크와아앙!
신세계가 펼쳐졌다.
카가각! 카드드드득!
“나무 베기! 돌리기!”
나무 베기와 돌리기 스킬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
그 순간 세계수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톱밥들!
그 중심에서 정다운은 선글라스를 끼고 더없이 화려한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엄청나게 빛나고 있었다!
“신난다! 우푸풉!”
괜히 스킬 쓴다고 입을 벌렸다가 톱밥만 먹었다.
<그럴 땐 그냥 삼키시면 됩니다. 티끌 모아 태산처럼 제물을 바칩시다.>
“……꼴깍.”
정다운은 즉석에서 천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썼다.
그렇게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꼈더니.
[님, 엄청 수상해 보임. 밤길에 마주치지 말죠.]
밤길이 아니라도 충분히 그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솔리아에겐.
[꺄아악! 세계수가! 나의 세계수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솔리아.
뻔히 눈앞에서 뿌리들이 차츰차츰 잘려 나가고 있는데도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솔리아가 괴물 문어들을 불러들였다.
[문어들아! 저 인간을 공격해!]
뿌우! 뿌우우! 뿌뿌뿌!
그녀의 부름에 낙원 곳곳에서 문어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세계수의 표면에서도 새로운 문어들이 태어나 정다운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호오?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요?]
그 모습에 토끼가 나무 베기에 심취해 있는 정다운의 뒤로 날아가 참가자들을 향해 박수를 짝짝 치며 소리쳤다.
[자, 여러분! 다들 모이셈! 우리가 나무 베는 동안 이 키 크고 예쁜 아가씨랑 문어들 좀 막아 주셈!]
“……?”
“……?”
“……뭐래?”
수군수군.
어리둥절.
다들 귀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눈치는 있었다.
“아, 그렇지! 우리가 저 도우미를 막겠습니다!”
“문어들 쯤이야 우리가 맡고 있겠습니다!”
“뒤는 우리들에게 맡기세요!”
“정다운 씨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너도 나도 자기 말만 늘어놓으며 두 팔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꺄악! 이 인간들이 진짜 아까부터 자꾸……!]
솔리아가 아무리 크더라도 기본 전술은 어차피 똑같았다.
“가까이 가지 마! 원거리 공격을 해!”
“다리를 공격해서 중심을 무너뜨리자고!”
똑똑똑.
“응?”
“먀옹.”
“아, 고맙…….”
바쁜 와중에 누가 옆을 돌아다니며 복제 전단지(주문서)를 나눠 주고 있었다.
그림자 알바생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동안 참 많이도 찍어 내서 복제 주문서는 썩어 날 정도였다.
그리고 토끼는 열심히 깃발을 흔들며 응원을 했다.
[잘한다! 우리 편 이겨라! 생산직은 앞에서 나무 베고! 전투직은 뒤에서 전투하고! 몹시 완벽한 팀워크임!]
완벽한 것치고는 순서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아무튼 완벽하긴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정다운이 뿌리들 중에서 표면에 룬 문자가 새겨져 있는 뿌리에 흠집을 낸 순간.
번쩍!
그 안에 아직까지 갇혀 있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휴이 번스타인이라든가…….
류승우라든가!
파앗!
“어? 밖인가?”
“승우 형!”
“저, 정다운?”
류승우는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정다운이 보낸 문어 골렘이 류승우의 앞에 도착했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은 일단 주인님을 도와주시게.]
바하무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숲의 마녀 솔리아를 가리켰다.
[가급적이면 다리를 노려 주시게나.]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격이 상승한 류승우의 두 눈에 시퍼런 광휘가 터져 나왔다.
콰르릉! 쾅!
“맡겨 둬!”
그 순간 류승우의 전신에서 뇌전이 줄기줄기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가 소지품에 가지고 있던 ‘철’로 된 검들을 전부 꺼내 들자…….
파지직! 파직!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의 뇌전들이 그 모든 철검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허공에 떠오르게 한 것이다.
휘오오오!
푸른 뇌전과 함께 수많은 검들이 휘몰아치는 중심에서 류승우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하앗!”
그의 손짓을 따라 검들이 원격으로 날아가 문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 대박! 류승우 님 이번에 깨달음이라도 얻으셨음?]
“아니, 이건 일부일 뿐이지!”
류승우는 그야말로 전장의 화신이 되어 문어들을 도륙해 나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검의 폭풍이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뿌우…….”
그 참혹한 현장을 보며 정다운 쪽에 붙은 문어 지팡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배신하길 잘했다고.
“뿌뿌.”
끄덕끄덕.
역시 문어는 줄을 잘 서야 하는 법이었다.
사실 한참 전부터 잘려 나간 다리들을 재생할 수 있었지만, 그냥 계속 이러고 있기로 다짐하는 문어 지팡이었다.
그리고 정다운은 그 틈에 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뿌리들을 다 잘라 내고 말았다.
“응? 이게 마지막인가? 더 없어?”
[아아아. 왜 이렇게 낮이 긴 거야…….]
절망하는 솔리아.
밤이 오기도 전에 모든 뿌리가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겨우 뿌리 아닌가.
‘괘, 괜찮아. 나무 기둥은 여전히 낙원의 천장에 박혀 있으니, 양분만 충분하면 다시 뿌리가 돋아날 테니까!’
그녀는 절망 속에서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정다운이 뿌리를 다 잘라 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알파.”
<옙.>
재깍 대답하는 알파에게 정다운이 물었다.
“제물이 제단 위에 살짝 삐져나와도 바칠 수는 있지? 아무리 커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이제 장작은 충분히 모았으니, 전부 긁어모아서 신전으로 가져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알파의 텐션이 평소보다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알파는 배포가 부족했다.
정다운은 세계수의 거대한 기둥이 꽂혀 있을 낙원의 천장을 힐끔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신전의 제단을 저 천장 밑에 딱 붙이면 나무 기둥을 통째로 바칠 수도 있으려나?”
<……!>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
알파가 진심으로 정다운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