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89화>
* * *
한편, 바하무트는 여전히 세계수 밖에 남겨져 있었다.
그 또한 분명 정다운과 함께 세계수 안으로 들어가려 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바하무트는 세계수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 나오고 말았다.
마치 오류종자 정다운이 던전의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했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수는 ‘생명수’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바하무트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언데드’.
부정한 존재인 언데드가 감히 세계수 안에 발을 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세계수는 철저히 바하무트를 무시했다.
어느 순간 낙원에 있던 참가자들 모두가 세계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수는 그대로 우뚝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 앞에서는 여전히 바하무트가 버젓이 문어 골렘을 타고 날아다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수는 그를 전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생명을 가진 존재만 상대한다는 듯이.
그 덕분에 바하무트는 때아닌 휴가를 누리고 있었다.
[허허, 한가롭구나…….]
어쩌다 보니 할 일이 전혀 없어졌다.
정다운이 걱정되긴 했지만, 여기에선 그를 도와줄 방법이 전혀 없었다.
정 할 게 없으면 괴물 문어들이나 잡을까 고민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못 느꼈다.
그럴 바에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최대한 아끼는 편이 이롭다 판단했다.
그래서 바하무트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진짜 눈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로 했다.
언제쯤에나 주인님이 돌아올까 하고, 멍하니 세계수만 쳐다보며…….
문어 골렘을 타고 낙원을 유유히 떠다니는 바하무트였다.
그래도 세계수는 나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관광 명소였다.
볼거리가 많았다.
파앗! 파아앗!
[음? 또 저러는군.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바하무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세계수의 뿌리 곳곳에 룬 문자들이 표면 위로 떠올라 있었다.
추측하건데 저 룬 문자가 생겨난 곳들이 바로 참가자들이 있는 곳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렀을 때, 갑자기 세계수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파아앗!
[음?]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하던 바하무트는 이윽고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샤라라…….
별빛이 내린다.
세계수 위에서.
다시 보니 그것은 ‘생존자 전체 회복’을 뜻하는 은빛 가루였다.
바하무트가 크게 기뻐했다.
[오오! 드디어 던전이 공략된 것인가! 주인님이 부디 무사하시길!]
정다운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비는 바하무트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계수 안에서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콰쾅 쾅! 콰릉!
[헉!?]
쿠르릉! 콰르릉! 콰르릉!
세계수 깊은 곳에서부터 거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바하무트는 깜짝 놀랐다.
[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처음엔 류승우의 천둥소리인가 싶었지만, 다시 들어 보니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천둥이 아니라, 천둥처럼 무언가를 강하게 두들겨 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갑자기 성난 목소리가 연달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하는 거야!?]
[그만두지 못해? 감히 세계수를 파괴하려 하다니! 세계수는 세상을 받치는 기둥이라고!]
[그, 그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도우미야! 이 바보들아!]
당황.
그다음엔 분노.
그리고 그다음엔 애걸복걸.
[누가 저 인간 좀 말려 봐!]
[너희들…… 진짜 내 손에 죽고 싶어!?]
[꺄악! 그렇다고 다짜고짜 총공격하지 마! 이것들이 진짜!]
[……?]
뭔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리에 바하무트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쿵쿵거리는 소음은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쩌적!
콰앙-!
세계수의 뿌리 하나가 안에서부터 폭발하고 말았다.
[안 돼……!]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
그리고 뒤이어 활기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뚫렸다!]
“만세! 밖이다!”
“우리가 해냈어!”
단절되어 있던 두 공간이 연결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순간 무한히 확장되어 있던 세계수의 공간이 뒤틀리며, 그 안에 들어가 있던 참가자들을 한꺼번에 뱉어 냈다.
[무사히 나오셨구나!]
바하무트는 그 가장 선두에 보이는 정다운의 얼굴을 확인하고 재빨리 문어 골렘을 그쪽으로 출발시켰다.
나온 것은 좋은데 그대로 추락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드르르르르……!
[음?]
모두를 태운 문어 열차가 낙원의 하늘을 무지개처럼 날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열차의 운전석에 있던 정다운은 마침 다가오고 있는 바하무트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바하무트! 전투 준비! 솔리아가 나를 방해하지 못하게 해!”
[솔리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바하무트는 귀를 의심했다.
놀랍게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서, 설마?]
절대 우연일 리는 없었다.
낙원과 세계수.
그리고 솔리아라는 이름.
그 모든 퍼즐이 조합되는 순간 바하무트는 비명을 질렀다.
[설마 숲의 마녀 솔리아 님!?]
과거 마녀의 하인이었던 바하무트!
그는 한 명의 마녀만 모시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스테이지-4에 있던 마녀의 집은 혼자 살기엔 너무 크지 않은가!
한때 그곳엔 많은 마녀들이……!
[크르릉. 맞다. 지금 너희가 상대해야 할 존재는 정원사 솔리아 님이시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마침 루갈이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옆을 지나치며 바하무트의 말에 대답했다.
그는 진노한 솔리아를 피해 잽싸게 도망치는 중이었다.
루갈의 판단은 정확했다.
낙원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던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고요해서 음산한 기분이 들었다.
그르르르……!
이윽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착각이었다.
낙원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헉! 저, 저런!]
바하무트는 경악했다.
아름다운 낙원의 땅 위로 연보라색 구름들이 서로 뭉쳐지며 거대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구, 구름 골렘?]
아니었다!
바로 솔리아였다!
진노한 솔리아가 정다운을 막기 위해 세계수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너무 커지고 있었다!
10미터! 12미터! 15미터! 20미터!
퍼엉!
[그만 두라고!]
그녀의 팔이 문어 열차를 후려쳤다!
[아이고! 진짜 솔리아 님이시구나!]
크기가 많이 커지긴 했지만 솔리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바하무트가 그녀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재빨리 문어 골렘을 운전해 추락하는 문어 열차를 다리로 휘감아 올렸다.
“나이스 캐치!”
[주,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대답 대신 정다운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리고 눈을 돌려 구름 인간으로 변한 솔리아를 쳐다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커도 너무 큰데? 저 정도면 솔직히 울트라맨이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이번엔 분홍색이야?”
루갈이 나타났다.
[크르릉. 솔리아 님은 현재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세계수 안에서는 세계수의 영향으로 새하얀 색이었지만, 지금은 또 낙원에 동화된 몸으로 현신하신 것이다!]
[님, 설마 이거 설명해 주러 돌아온 거임?]
[크르렁! 경고하러 온 거다!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아느냐!]
토끼가 깐족대자 루갈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세계수는 너희 인간들이 격을 올릴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란 말이다! 세계수가 없으면 앞으로 다른 참가자들은 영원히 종말의 용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단 말이다!]
[앗? 그러고 보니!]
루갈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토끼!
[그, 그래도 리셋하면 되는 거 아님?]
[리셋? 리셋이라고? 너희는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루갈은 코웃음을 치며 토끼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가 세계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크릉! 너희가 주기적으로 받고 있는 생존자 전체 회복이라는 힘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바로 생명의 나무! 세계수에 의해 존재하는 기적이란 말이다!]
[으익? 가, 갑자기 이런 데서 그런 중요한 비밀이 훅 들어오면 어떡함?]
토끼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젠장! 나도 몰랐단 말이다! 지금껏 이 던전을 지탱하던 힘이 어디에서 발생되었는지! 여태까지는 그냥 종말의 용에 의한 것이라 생각했단 말이다!]
루갈조차 당황하고 있었다.
그 또한 낙원에서의 일들을 모두 경험하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낸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봤다’!
생존자 전체 회복의 은빛 가루가 세계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것을!
그 은빛 가루들이야말로 세계수의 꽃가루였던 것이다!
그걸 본 순간 루갈은 확신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던전이 리셋된다 하더라도 세계수는 리셋이 안 될 수도 있단 말이다! 세계수야말로 던전 시스템을 주관하는 기둥일 수도 있으니까!]
[헉!?]
충격적인 루갈의 말에 토끼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의 말이 진실인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솔리아의 입에서 직접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튼! 세계수가 이런 식으로 사라지게 되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단 말이다!]
<상관없습니다.>
[크륵?]
서로 놀라고 경악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알파는 침착했다.
정다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뭐, 괜찮지 않을까?”
[크륵?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정다운의 무책임함에 당황을 넘어서 분노하는 루갈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의 눈에 정다운의 손에 들린 세계수에서 뜯어낸 나무 조각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린 ‘마녀의 일기장’도.
<화분>
오늘은 화분에 나무를 심었어.
지금은 비록 내 키보다도 작지만 언젠간 엄청나게 커지겠지?
나무들아,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나중에 세계수처럼 훌륭한 나무가 되렴.
정다운은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이거 보여? 나무들이래. 이런 거 몇 개 더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