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85)화 (285/393)

<던전리셋 285화>

*   *   *

그동안 도민준은 불운과 행운을 번갈아 가며 경험하고 있었다.

그의 첫 불운은 그가 낙원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그 앞에 떡하니 문어 병사들이 서 있었다.

뿌?

‘……!’

최악의 상황!

생산직인 그가 혈혈단신으로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곁에 있던 동료들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에겐 무조건 도망만이 살길이었다.

‘으아악!’

뿌우!

그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문어들에게 허겁지겁 쫓기던 그의 앞에 ‘대문’이 나타난 것이다.

그게 함정인지 아닌지를 고민할 정신은 없었다.

그는 지척까지 쫓아온 문어들을 피해 무작정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화아악!

그 순간 새하얀 빛이 온 시야를 가렸고.

‘……?’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긴?’

하얀 세상 한가운데 홀로 떨어지게 된 도민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

사실 그는 정다운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밖에서 주문서 한 장 사용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게도 그의 몸에서는 정령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는 그를 위협할 존재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요-?’

도민준은 영문도 모른 채 그때부터 계속 세계수 안을 떠돌아다녔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그의 안색은 빠르게 초췌해져 갔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식량을 최대한 아껴 먹으며, 정처 없이 길을 헤매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두렵고 고독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음?’

갑자기 그의 약초 채집 스킬이 ‘약초’의 기척을 포착해 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어서 호기심에 무작정 그곳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약초나 찾기로 했다.

이런 신기한 세상에서 자라는 약초는 또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약초가 아니라 처음 보는 참가자의 시체였다.

‘주, 죽었어!?’

[<약초 탐색>스킬이 9레벨로 발전합니다.]

‘레벨 업!?’

그는 경악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킬이 레벨 업까지 했다는 말은 새로운 약초를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약초가 아니라 시체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더 고민할 정신도 없이 곧바로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했다.

시체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괴물들은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만 보고 계속 따라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종종 도민준에게는 ‘약초’의 기척이 계속 포착되었다.

‘뭐야? 또네? 한번만 더 가볼까? 이번엔 진짜 약초일지도 모르잖아.’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아무 목표도 없이 돌아다니는 건 너무 막연한 일이었다.

그는 결국 용기를 내서 두 번째 약초를 찾아 이동했다.

물론 예외는 없었다.

이번에도 또 시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체의 정체였다.

‘지서연 씨!?’

그는 지서연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서연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죽었지만 과거 화염충을 다루던 석정호와 항상 앙숙이었던 전투직.

비록 자신의 무리와는 앙숙 관계였지만, 그녀는 석정호 따위와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강하고 공명정대한 리더의 표본이었다.

도민준은 주저 없이 지서연의 시체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맨손으로 시체를 안아 드는 것이 꺼림칙할 법도 했지만, 그는 서슴없이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는 괴물의 시체를 도축하는 일이 일상인 생산직.

시체에서 전해지는 차가움보다 오히려 그 안에서 허무하게 식어 버린 생명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지서연 씨,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어떻게든 땅을 팔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아무런 목표도, 기준도 없이 그저 멍하니 텅 빈 세상을 떠돌던 자신에게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사람은 목표가 있으면 살 수 있다.

메말라 있던 도민준의 눈에 활기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

물론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대답을 하는 게 더 문제였다.

시체는 전혀 무섭지 않지만, 말하는 시체는 생산직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양지바른 곳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요? 약초 탐색 스킬로요?”

지난 이야기를 다 들은 정다운이 묻는 말에 도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약초가 자라는 곳에는 무덤을 만들 흙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말을 잇지 못하고 도민준이 5미터나 되는 거대한 약초 ‘솔리아’를 힐끔거렸다.

그녀에게서는 지금까지 본 어떤 약초보다도 가장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난 이야기를 다 듣게 된 지서연이 도민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민준 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도민준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감사라니요? 제가 뭘 했다고요. 어차피 저와 상관없이 지서연 씨는 다시 살아나셨을 텐데요.”

“아니에요. 도민준 씨는 제 시체를 그냥 지나치셨어도 됐어요. 그런데도 굳이 저를 여기까지 책임지고 옮겨 주신 덕분에, 이렇게 정다운 씨와도 합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는 제가 평생을 거쳐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헉! 아, 아닙니다. 평생이라니요? 과년한 처자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못 씁니다.”

도민준은 크게 무안해하며 그녀에게서 황급히 도망쳤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정다운이 솔리아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렇게 숲의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면 인간이었을 때보다 훨씬 세져?”

[당연하지. 앞으로는 기존의 스킬들에 정령의 가호가 깃들게 될 거야.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오호? 그럼 참가자들이 모두 여기서 죽어 버리는 게 이득이겠네요?]

그 말에 솔깃한 토끼가 옆에서 정다운을 자꾸 부추겼다.

[님은 뭐하는 거임? 님도 얼른 정령한테 죽으셈.]

*   *   *

그리고 그 시각, 세계수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었다.

“웃기지마! 내가 정령 따위한테 잡아먹히기 위해서 여기까지 버텨 온 줄 알아?”

콰르릉!

류승우.

그는 이를 악물고 정령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꿈에서 깨어난 순간 그 안에서 보고 겪었던 기억들이 저절로 사각사각 사라져 가는 법이다.

마치 어떤 중요한 진실을 숨기려는 듯이.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문득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류승우와 휴이 번스타인이 꾸었던 ‘마녀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세계수의 진실’을 정확히 기억해 낸 시기는 얼마 전 토끼와 루갈이 그를 방문하고 떠난 직후였다.

여전히 세세한 부분까지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류승우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계수의 안에서 죽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그랬다. 

그는 이곳에서 죽어도 숲의 종족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더 이상 이렇게 고생스럽게 버틸 필요가 없다는 것도 뻔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살기 위해 정령들을 죽이고 있었다.

당연했다.

“나는! 인간이다! 반드시 인간인 상태로 집에 돌아갈 거야!”

류승우는 인간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결단코 숲의 종족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정령들을 죽이며 코웃음을 쳤다.

“인간보다 고귀한 숲의 종족? 웃기지 마! 숲이 없는 곳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자신이 돌아갈 곳은 한국의 서울이었다.

숲 따위는 전혀 없는.

숲의 종족이 되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다간, 그야말로 식물인간 신세가 되는 것이다.

숲의 종족의 발걸음마다 꽃과 풀이 피어오르는 이유.

그것은 바로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류승우는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이런 젠장! 이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기억해 냈다면! 토끼에게 다운이를 찾아서 이 사실을 전해 달라 했을 텐데!”

그는 빌고 또 빌었다.

정다운이 정령에게 죽지 않기를.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기를.

*   *   *

정다운은 억울했다.

“죽긴 뭘 죽어? 난 어차피 불가능해. 자기 몸에서 태어난 정령에게 죽어야 숲의 종족이 된다잖아.”

[아이고, 불쌍해라. 강해질 기회를 또 놓치셨네. 쯧쯧. 강해질 수만 있다면 인간이 아니면 또 어때요?]

“으윽.”

토끼가 놀리는 말에도 반박을 못할 정도로 정다운은 세상 억울한 기분이었다.

토끼 말이 다 맞았다.

인간이 아니면 어떤가!

예뻐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좋은 점만 가득한데!

정령의 가호라니! 

말만 들어도 멋지지 않은가!

꽃향기가 나는 남자라니!

얼마나 근사하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 루갈이 무심하게 지나가듯 말했다.

[크릉. 어쩌면 인간으로 남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숲의 종족이 되면 고기를 먹지 못하니까.]

“역시 나는 인간으로 남겠어.”

그 말에 정다운이 갑자기 결연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간은 역시 멋져.”

[…….]

정다운은 측은한 눈길로 지서연을 쳐다봤다.

“어떡해요? 강제로 채식주의자가 되시다니.”

“아, 저 샐러드 좋아해서 괜찮아요. 이제 와선 별수 없는 일이죠.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지서연은 담담하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다운은 그 모습이 너무나 슬프게만 보였다.

그가 갑자기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안 되겠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강제로 채식주의자가 되어 간다는 말이잖아! 어떻게든 막아야 돼!”

토끼가 발끈하며 화를 냈다.

[채식주의가 뭐 어때서요! 너무하시네! 전 차원의 채식주의자들에게 사과하셈!]

“그러면서 너는 정작 토끼인데도 고기 먹잖아!”

[그럼 고기가 맛있는 걸 어떡함? 흥. 고기 최고.]

할 말 없는 토끼였다.

“아무튼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 찾아봐야겠어. 적어도 고기를 먹을지 말지는 본인 스스로가 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어떻게 찾게요?]

“루갈 코가 개코라며? 냄새로 찾으면 되지!”

[크릉?]

루갈을 쳐다보자, 루갈은 괜히 솔리아의 눈치를 봤다.

솔리아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단다. 어차피 숲의 종족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세계수의 의지니까. 너 하고 싶은대로 하렴, 하룻강아지야.]

[크릉. 알겠습니다.]

루갈의 허락까지 떨어졌겠다, 정다운은 그 즉시 문어 열차 위에 올라탔다.

[으잉? 이거 타고 가게요?]

“응, 이게 지금까지 골렘들 중에서 제일 빠르거든. 공중곡예만 안 돌면 별로 위험하지도 않고. 공중 계단! 공중 계단!”

처처척!

그가 손짓하자 열차의 앞으로 공중 계단이 긴 다리를 만들어 냈다. 

롤러코스터를 만들기 위해 미리 세팅해 둔 부유석들이라 그 위에 철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림벨 1호기, 2호기!”

“먀옹?”

“냐앙.”

“너희들은 문어 열차의 그림자 위에 서서 열차가 지나가면 철도 딸린 부유석들을 재빨리 소지품 안으로 회수해!”

[오호?]

정다운의 명령에 그 즉시 문어 열차의 다리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그림벨들을 보며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이런 방식이라면 문어 열차가 달리는 내내 철도를 재활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다운이 솔리아를 쳐다보며 선심 쓰듯이 말했다.

“솔리아, 이 집은 그냥 너 줄게. 이 허허벌판에서 살기도 힘들 텐데 침대도 소파도 앞으로 다 네 거 해.”

[……고마워.]

솔리아는 조금 당황했지만 얼굴에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자, 그럼 출발해 보실까? 모두 타세요!”

“네? 여, 여기에요?”

“진짜 괜찮은 건가요, 이거?”

정다운의 손에 이끌려 지서연과 도민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문어 열차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꽃향기가 가득한 문어 열차가 되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경적을 울려라!”

“뿜뿌뿌 뿌우-!”

드르르르르……!

문어 지팡이가 잽싸게 경적을 울리자, 문어 골렘의 다리가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다운이 솜씨 좋게 그 앞길에 새로운 공중 계단을 설치하자, 무한대로 철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이미 지나친 철도와 부유석들을 그림벨들이 잽싸게 회수했다.

“루갈! 방향은!?”

[크르릉. 말해 두지만, 나는 안 탈 거다…….]

[히히! 나는 탈 거임!]

드르르르르……!

그렇게 무한대의 철도가 하얀 세상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위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악! 공중곡예는 안 하신다면서요-!”

[끼얏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