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81화>
[네가 그걸 만들었다고?]
정원사는 묘한 표정으로 정다운의 손에 들린 복제 주문서를 쳐다봤다.
주문서에 쓰여 있는 필체가 눈에 많이 익었다.
[그거 내 필체인데? 설마 내 글씨를 베껴 쓴 거야? 보고 베꼈다고 하기엔 너무 똑같은데?]
“응. 내가 쫌 잘 베껴.”
<자랑ㅇㅣ 아닙ㄴㅣ…….>
괜히 거들먹거리는 정다운의 말에 알파가 기어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정원사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잘 베끼긴 했지만, 역시 자격이 없는 자가 만들어서 그런지 정령력이 느껴지지 않네. 이런 이상한 걸 썼으니 너에게서 정령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거구나.]
“자격이라니? 무슨 자격?”
[나 같은 ‘정원사’의 자격 말이야.]
“아까부터 대체 그 정원사라는 게 대체 뭐 하는 직업이길래 자격까지 운운하는 거야?”
정다운은 살짝 심통이 났다.
그의 물음에 정원사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 나를 소개할게. 이름은 솔리아. 직업은 정원사. 취미는 명상, 독서, 주문서 만들기. 망해 버린 세상을 위해 정령들을 깨우는 중이야.]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정원사 솔리아가 소파에 앉은 채로 양팔을 벌렸다.
[그런데 보다시피 세계수는 지금 텅 비어 있고, 부활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 빈 세상.
이 모습이 바로 종말을 겪은 세계를 지탱하는 세계수의 현 주소였다.
[그리고 이럴 때는 특히 정령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뾰로롱 포로롱.
정원사 솔리아의 손 안에서 형형색색의 빛의 구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정령?”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복제 주문서를 쓴 덕분에 그는 정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솔리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빛의 구슬들을 보며 대꾸했다.
[응, 정령. 자연에서 태어난 귀엽고 사랑스러운 요정들 말이야.]
그 말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하는 정다운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키야악! 캬악! 화르륵!
“…….”
어느새 빛의 구슬들이 흉포한 짐승과 익룡 같은 것들로 변해 입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물론 3미터 신장의 거인의 눈으로는 포X몬스터처럼 귀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눈에는 그냥 괴물일 뿐이었다.
<위험ㅎㅏㅂ……!>
알파의 다급한 경고가 이어졌다.
괴물처럼 변한 정령들이 정다운의 앞에 내려선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딱히 정다운을 해칠 생각이 없는지 하품이나 하며 주변을 어슬렁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원사 솔리아가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이 아이들은 너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만든 주문서는 일종의 저주거든.]
“저주라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툭 튀어나오는 저주라는 단어에 정다운이 솔깃했다.
[응, 저주. 내가 만든 주문서는 시술자의 마력이나 생명력을 바쳐서 자연에 깃들어 있는 정령들을 억지로 깨우게 하거든. 그 덕분에 주문서를 사용하는 이들은 정령들에게서 여러 가지 능력을 잠시 빌려 올 수 있긴 하지만……,]
크르륵!
키야악!
때마침 정령들이 험악한 기세로 포효했다.
그 녀석들을 거대한 손으로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솔리아.
[그와 동시에 그들은 정령들의 분노를 사게 돼. 정령들은 엄청 자유로운 영혼이라, 자격이 없는 자가 마음대로 불러냈다간 그 시술자를 죽여 버려.]
“아하…….”
정다운은 어째서 정화 스킬이 마법 주문서를 사용하는 것을 막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진짜로 저주였구나.’
한때 학교에서 한창 괴담을 좋아했을 때 친구들끼리 모여서 귀신을 불러내는 분신사바 따위의 이상한 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 하나가 음산한 목소리로 겁을 줬었다.
괜히 귀신을 불러냈다가 귀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저주를 받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실제로는…… 그러다 선생님한테 걸려서 선생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지만.’
저주보다도 끔찍했던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치를 떠는 정다운이었다.
그 모습에 괜히 우쭐해진 솔리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으름장을 놨다.
[그러니까 결국 너희들의 역할은 밖에서 정령들을 깨워서 세계수 안으로 모아 오는 전달자인 거야. 텅 빈 세계수의 안을 다시 예전처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너희들을 이용하는 거지.]
“……아, 지금 뭐라고?”
[…….]
“미안.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 야, 진짜 미안하다니까? 거, 너무 째려보네.”
[…….]
솔리아가 약간 삐친 표정을 짓자 정다운은 괜히 민망해졌다.
하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들어 봐야 재미도 없고, 어차피 자신은 원본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으니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궁금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비밀을 나한테 막 알려 줘도 돼?”
그 말에 솔리아가 비웃듯이 말했다.
[이게 무슨 비밀이야? 너희가 내막을 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걸?]
“아. 그런가?”
[그래. 어차피 이 안에 들어온 이상 너희는 그동안 주문서를 사용한 만큼 정령들에게 시달리게 될 거야. 주문서의 숫자에 비례해서.]
“아.”
[후후. 힘을 탐하는 자, 그 힘에 눌려 죽을지어다!]
“…….”
거대한 두 팔을 벌리고 웅장하게 선포하는 솔리아.
그런데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정다운의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복잡했다.
누구보다도 힘을 탐했던 자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이었다.
주문서를 쓰고 싶어서 안달 난 자는 또 누구인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그 힘이 자신을 눌러 죽이기는커녕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뭐랄까…….
선생님이 반 학생들을 전부 모아 놓고 혼내고 있는데, 자신만 쏙 빼놓은 느낌이었다.
물론 의리 있게 다 같이 혼나고 싶은 건 또 아니었지만, 그래도 묘하게 소외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한데?]
갑자기 정다운이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쳐다보자 솔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때문에 지금 내 계획이 꼬였다고.”
[……나 때문에? 무슨 계획?]
정다운은 아까부터 내내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솔리아가 앉아 있는 거대한 소파를 가리켰다.
“네 소파가 너무 커서 내 거실이 확 좁아졌잖아. 괜히 여기다 만들었어. 차라리 응접실을 따로 만들어 줄 걸, 완전 실수했네.”
[……뭐?]
솔리아는 그가 투덜거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는 너무 크기가 커서 정다운이 처음 계획했던 집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이건 옳지 않았다.
아까 전만 해도 평온하고 안락하던 정다운의 집이 엉망이 된 것이다.
게다가…….
크르륵! 캬오오!
이름 모를 정령들까지 나타나서 온 집 안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정다운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야, 너네들! 내 소파를 밟고 다니면 어떡해!”
“캬오?”
“크륵?”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안 되겠다. 너네 좀 따라 나와 봐.”
“키이?”
정다운은 뽀뀨만큼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정령들의 몸을 억지로 밀어서 집 밖으로 몰아냈다.
뭔 일인지도 모르고 그의 손에 떠밀려 나온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되겠다. 목장을 따로 만들어서 가둬 놔야겠어.”
정다운은 녀석들이 또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놈들 주변에 넓게 흙 울타리를 쳤다.
그 과정에서 정령 몇 마리가 멋대로 탈주를 시도했으나, 그걸 놓칠 정다운이 아니었다.
“야! 거기!”
“끼룩?”
“그래, 너 인마.”
“끼루룩?”
“딴청 피우지 마. 익룡 너한테 하는 소리야.”
“끼루…….”
“안으로 들어와. 맛있는 거 줄게.”
“……!”
순간 익룡이 솔깃한 게 느껴졌다.
그런데 불타는 익룡은 뭘 먹으면 좋아할까?
정다운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왜 날 봐?]
솔리아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얘네 뭐 먹고 살아? 생명 에너지?”
<안 됩ㄴㅣㄷ……!>
알파가 기겁하며 울부짖다가 흩어졌다.
솔리아가 대답했다.
[이 세상에 소환된 정령들은 입맛이 저마다 다양해. 어떤 애는 풀을 뜯기도 하고, 어떤 애는 동물을 먹어. 또 어떤 애는 공기만 있어도 살기도 해.]
“오, 의외로 얌전한 녀석들이네. 그럼 이 익룡은?”
[인간의 영혼을 먹어.]
“…….”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끼루룩!”
“…….”
정다운은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눈초리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익룡이 슬슬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아, 혹시 이거라면 먹으려나?”
그가 소지품에서 ‘망령석’을 꺼냈다.
그러자 익룡이 눈을 번뜩이며 입맛을 다셨다.
온전한 인간의 영혼은 아니었지만, 망령석에도 영혼의 냄새가 미약하게 묻어 있었다.
밥은 아니라도 입가심 정도로는 충분했다.
정다운이 망령석을 큼직하게 뭉쳐서 익룡에게 건네주었다.
“캬웁!”
“으악? 내 손까지 물 뻔했잖아!”
캬웁 캬웁! 캬웁!
“…….”
옆에서 뭐라 하든 게걸스럽게 인간의 영혼(망령석)을 씹어 먹는 익룡의 모습은 솔직히 좀 무서웠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령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해 본 정다운은 그 모습에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익룡이 뭔가를 먹는 모습에 다른 정령들도 관심을 보였다.
크르륵?
키야아!
저마다 입맛을 다시며 정다운의 곁으로 모여드는 정령들.
그 모습에 솔리아까지도 망령석에 관심을 보였다.
[어? 지금 그거 뭐야? 너 설마 인간 주제에 영혼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거야? 그 정도의 격은 느껴지지 않는데?]
울컥?
솔리아는 딱히 놀릴 의도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정다운을 울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인류의 대표자 정다운이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솔리아, 넌 인간의 힘을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이 정도쯤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물론 흙을 뭉치는 걸 말하는 것이었다.
솔리아는 경악했다.
[뭐? 진짜? 인간들이 그렇게나 격이 올라갔을 리가 없는데?]
“이걸 보고도 모르겠어?”
정다운은 망령석을 큼지막하게 뭉쳐서 멋지게 들어 올렸다.
마치 인류를 대표해 두 손으로 지구라도 떠받치는 듯한 포즈였다.
“이게 바로 영혼의 흙이라는 물건이지!”
물론 그래 봐야 그냥 흙덩이일 뿐이었다.
솔리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본 다른 인간들은 너만큼의 격이 안 느껴졌다고. 솔직히 말해. 사실은 너만 특별한 거지? 영혼을 다루는 건 나라도 감히 못하는 일이라고.]
“물론 내가 특별히 더 훌륭한 사람이긴 하지.”
<…….>
옆에서 말도 못하고 있는 알파는 문득 토끼가 그리워졌다.
토끼가 있었더라면 이런 이상한 대화를 그냥 두고 봤을 리가 없었다.
사실 참가자들 누구에게나 정원사 솔리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정다운의 앞에만 나타난 이유는 바로 그가 다량의 제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남다른 ‘격’ 때문이었다.
벌떡!
[안 되겠어. 너는 역시 뭔가 이상해.]
잠시 고민하던 솔리아가 갑자기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분간 너를 옆에서 지켜봐야겠어.]
“응? 나를?”
[응. 영혼의 힘을 다루는 인간이라니! 어떻게 그 정도의 격을 쌓았는지, 그 진리를 탐구한다면 앞으로 내가 세계수를 가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
‘아닐 것 같은데.’
갑자기 혼자 심각해져서 의지를 불태우는 솔리아가 정다운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냥 흙을 뭉친 거였다고 말하면 저 큰 발로 자신을 밟고 지나갈 것 같았다.
정다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봐, 봐도 모를 텐데? 이건 나만의 특별한 흙이라고.”
[아냐. 지켜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벌써 잊었어? 내 취미는 명상과 독서야. 진리를 탐구하고 사색하는 것은 익숙해.]
“…….”
그러다 진짜 진리를 들키면 많이 혼날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앉아. 목 아프니까.”
[싫어. 푹신해서 좋긴 한데,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 아파. 난 항상 딱딱한 세계수 안에서 지내온 존재라고.]
“그럼 침대는 어때?”
[응?]
정다운은 솔리아에게 최대한 잘 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저 푸른(하얀)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