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79화>
슈우욱!
[앗! 위험해요! 나무가 덤빔!]
낙원의 하늘에서 두꺼운 나무뿌리들이 문어 골렘을 덮쳐 왔다.
[제가 운전하겠나이다! 블리자드!]
쿠오오!
바하무트가 얼른 문어 골렘의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문어 골렘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여유롭게 관람차처럼 타기엔 좋아도 공중전을 펼치기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우직! 와지끈!
순식간에 문어 골렘의 다리 3개가 파괴되었다.
나무뿌리들이 너무 두껍다 보니 휘감으려고만 해도 흙이 가차 없이 뭉그러졌다.
그리고 그 부서진 조각들이 밑에서 싸우고 있던 참가자들과 문어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으헉! 피해……!”
쿠구궁!
“어후, 괜히 미안해지네.”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정다운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꾸벅거렸다.
[음? 뭔가 잘나가 보이는데? 나도.]
유명 연예인 같은 자세에 괜히 솔깃해진 토끼가 자기도 따라서 합장해 봤으나, 그냥 정갈하게 두 손을 모은 토끼일 뿐이었다.
[주인님! 이대로는 위험하나이다! 명령을 내려주옵소서!]
바하무트가 다급하게 정다운을 부르자, 정다운이 류승우를 쳐다봤다.
“괜찮아! 무시하고 그대로 밀어붙여! 승우 형!”
“맡겨 둬!”
류승우가 앞으로 나서며 뇌전으로 나무뿌리들의 접근을 견제했다.
꽈릉!
효과가 상당했다!
[오! 번개맨 최고다! 나무는 역시 번개에 약하죠!]
상성으로 볼 때 류승우는 나무의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번개 맞은 나무뿌리들이 검게 그을려진 채 뒤로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상성이 좋아도 나무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틈에 문어 골렘이 나무뿌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대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얍! 내가 1등!]
쏜살같이 새치기를 해서 문 앞에 내려서는 토끼!
정다운도 바로 문 앞으로 뛰어내려 대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좋았어. 그럼 연다?”
“잠깐만! 다운아,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먼저 들어갈게!”
류승우가 급히 다가와 정다운 대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커다란 문짝이 안으로 밀려들어 가며 그 틈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화아악!
“……!”
그런데 그때.
“뽀뀨!”
정다운은 품속에 있던 뽀뀨가 갑자기 세계수 위로 폴짝 뛰어내리는 모습에 다급히 손을 뻗었다.
‘야! 위험하……!’
번쩍!
그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 * *
“……어?”
정신차려 보니 정다운은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하얀색 땅.
하얀색 하늘.
모든 색깔이 지우개로 지워진 백지 같은 세상이 온 사방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뭐야? 제대로 들어온 거 맞아? 이건 뭐 나무 속이 아니라 정신 병동이라도 들어온 기분인데?”
정다운은 황당했다.
“승우 형은 또 어디 갔어? 와, 이놈의 던전 진짜! 사람 가지가지로 왕따시키는데?”
뻔히 같이 들어온 류승우와 토끼가 곁에 없자 정다운은 억울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열고 들어온 ‘문’조차 사라져 있었다.
투덜거리는 정다운에게 알파가 말을 걸었다.
<이곳이 바로 세계수의 내부ㅇ 진입ㅎ같ㄴㅣㄷ.>
“뭐야? 알파, 왜 말을 그렇게 해?”
정다운은 깜짝 놀랐다.
말을 하던 알파의 문자들이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알파는 당황했다.
<큰일입ㄴㅣ다! 이 세상이 제가 ㅎㅏ는 말을 흐ㅂ수…….>
<흡수하고 있습니다! 생명 ㅇㅔ너ㅈ가!>
“대체 뭐라는 거야? 또박또박 말해 봐.”
<네. 그러니ㄲㅏ>
정다운은 알파가 말을 다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었다.
1) 여기는 세계수의 내부인 것 같다.
2) 세계수는 생명 에너지를 흡수해 양분으로 삼는다.
3) 알파가 말하는 방식인 황금빛 문자들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생명 에너지다.
4) 즉, 알파의 ‘말’은 세계수에게는 맛좋은 양분이다.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네가 말만 안 하면 생명 에너지를 뺏기진 않는 거야?”
<네.>
“스킬은 되려나?”
<네. 가공된 에너ㅈㅣ라>
“다행이네. 그럼 이 안에서는 귓말도 쓰기 힘들겠네?”
<네.>
“아하, 그래서 호열 형님과 지서연 씨가 여기 들어오자마자 귓말이 먹통이 된 거구나.”
<아마도.>
갑자기 강제로 과묵해진 알파였다.
덕분에 알파의 잔소리가 대폭 줄었다는 점에서는 대환영이었지만, 그 대신 진짜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시야가 탁 트여 있는데도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세상 속에 혼자 동떨어지게 된 정다운은.
“……좋은데!?”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을 느꼈다.
무릇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사람들과 놀고 떠들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형과 집에 와서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배터리가 충전되는 유형.
정다운은 당연히 후자였다.
“휴우, 한적하고 좋구나.”
터벅 터벅.
정다운은 정승집 양반처럼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하게 하얀 길을 거닐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야.
온 시야가 탁 트인 경치.
흡사 귀마개라도 꽂은 것처럼 진짜 완벽한 적막 속에서 정다운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힐링 그 자체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흠, 어차피 멀리 가 봤자 보이는 것도 없는데 일단 앉아서 고민해 볼까?”
<…….>
그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의자를 만들기 위해 습관적으로 땅에 손을 댔다.
그리고 멈칫했다.
하얀 땅에 흙 뭉치기가 적용이 되지 않았다.
“이거 흙이 아닌가?”
손등으로 노크를 해 보니 딱딱한 느낌이 익숙했다.
원목이었다.
“아하, 흙이 아니라 나무였구나. 내가 나무 속으로 들어온 건 확실한가 본데?”
<네. 세계수 내부에 아공간ㅇㅣ 확장되어, ㅇ아ㄴ젭라…….>
그의 말에 대답해 주려던 알파의 말이 또 허공에서 흩어졌다.
“응, 에너지 아까우니까 조용히 해. 너 왜 이렇게 에너지 낭비가 심해?”
<……!?>
알파는 몹시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생명 에너지를 고스란히 빼앗기기 때문에, 평소에 워낙 자린고비였던 알파는 자신의 소신을 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 아무튼. 흙이야 많으니까.”
정다운은 소지품에서 흙을 꺼내 의자를 대충 만들었다.
아니, 처음엔 분명 대충 만들려고 했었는데…….
치덕 치덕.
“헉? 무의식적으로 4인형 소파를 만들어 버렸다!”
<…….>
정다운은 자신의 솜씨에 깜짝 놀라 버렸다.
정신 차려 보니 35평 거실에나 있을 법한 ㄱ자 구조의 카우치형 고급 소파가 생겨나 있었다.
물론 가죽 재질이 아니라 흙 재질 소파였지만.
“대신 이건 구름 흙이라 몽실몽실하단 말이지!”
<…….>
낙원의 구름은 폭신폭신하다.
따라서 구름으로 만든 소파는 쿠션감이 장난 아니었다!
푸우욱!
“크으, 이거지! 허리가 살살 녹는구나!”
푹신한 소파에 늘어지게 누운 그가 머리를 뒤로 기대어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각도상 입이 저절로 벌어지자 날백수가 따로 없었다.
“으어어. 좋네, 좋아.”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또 한참이 흘렀다.
<…….>
아까부터 알파가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은 눈치였지만, 정다운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승우 형은 찾아야 할 텐데.”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 봐도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말이지. 들리는 소리도 없고.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지?”
<…….>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흠. 일단 여기에 터를 잡고 기다릴까? 정처 없이 떠돌아 봐야 다리만 아프니까. 전망대 설치!”
처처처척!
정다운은 소파 뒤로 전망대 하나를 설치했다.
높은 건물이 있어야 멀리서도 누가 이쪽을 찾기 쉬울 테고, 미니맵으로 주변을 확인하기도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높이 올라왔는데도 아무것도 안 보이네.’
전망대 꼭대기에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 봤지만 온통 하얀색 일변이었다.
심지어 미니맵을 열어 봐도 지도가 백지였다.
“와, 뭐 이러냐? 진짜 어쩌라는 거야? 아, 그래. 소파도 있는데 침대라도 만들까?”
<……?>
생각의 상태가?
알파가 의문을 품었다.
정다운은 아래로 내려가서 소파 근처에 침대를 하나 만들었다.
어차피 재료도 많으니까 사이즈는 퀸 사이즈로 하고.
매트리스는 구름 흙으로 푹신하게.
침대 받침과 헤드는 색깔도 다르게 할 겸 단단한 흙으로 만들어 구분 지었다.
거기에 추가로 침대 헤드의 머리맡에는 태양석 조각을 살짝 추가해서 은은한 조명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자화자찬이 빠질 수 없었다.
“와, 완벽해! 지금까지 만든 침대 중에 제일 최고로 완벽한 침대야!”
<…….>
혼자 감탄하고, 박수도 짝짝짝.
혼자서도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알파는 가슴이 답답했다. 물론 가슴은 없지만.
“아, 그래. 아까부터 뭐가 허전하다 했더니 벽이 없었구나. 완전 시야를 막으면 위험하니까 야트막한 파티션이라도 만들어 볼까?”
처처처척!
만드는 건 금방이었다.
<…….>
알파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슴은 없지만.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니까 점점 전망대를 중심으로 가정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침대에, 소파에…….
심지어 틀어 봤자 나오지도 않을 50인치 TV를 부유석으로 만들어 소파의 건너편에 떡하니 띄워 놓았다.
아주 그냥 여기서 내 집 마련을 할 기세였다.
그런데도 정다운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어차피 이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는 새하얀 백지 상태의 세상에서 뭘 하고 살 것인가.
뭐가 됐든 굳이 여기서 당분간 살아야 한다면 번듯하게 잘 살아 보고 싶었다.
“난 사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차곡차곡 마당을 만들어 내는 정다운.
푸른색은 아니지만 하얀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집을 중심으로 넓은 마당을 적당히 지정하고, 그 경계를 야트막한 담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마당 한구석에는 장독대 몇 개를 모아 놓고, 또 한 구석에는 식물을 기르기로 했다.
“누가 덤비면 방어해야 하니까 던전 콩이 좋겠지?”
그런데 바닥이 하필 흙이 아니라서 식물을 심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흙을 한층 쌓자니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땅을 아래로 파서 흙을 채워 넣어야겠다.”
땅이 나무로 되어 있으면 베면 그만이었다.
나무 베기 스킬이라면 능히 그것이 가능하리라.
그는 도끼 한 자루를 꺼내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무 베기! 나무 베기!”
쾅 쾅 쾅 쾅!
나무를 벤다기보단 사실상 파괴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흙처럼 네모반듯하게 파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당이 예쁘지 않은 건 의미가 없었다.
“에이, 이럴 거면 차라리 접붙이기를 해야겠다. 어차피 같은 식물들끼리니까 서로 합쳐지지 않을까?”
<…….>
정다운은 도끼질로 파헤쳐 놓은 틈사이로 던전 콩을 하나하나 쑤셔 넣었다.
그러자 마당에 네모난 콩밭이 생겨났다.
“오, 나름 그럴싸한데!”
그런데 마당을 너무 넓게 만든 게 탈이었다.
던전 콩을 심고도 공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았다.
그렇다고 같은 걸 계속 심는 건 지루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아, 그렇지! 역시 화분하면 선인장이지.”
<…….>
공기가 딱히 습하진 않지만 담장을 따라 흡혈 선인장이 주르륵 있으면 예쁠 것 같았다.
게다가 흡혈 선인장의 안은 수박 아닌가.
역시 마당에서 기르는 채소를 직접 따 먹어야 맛있는 법이었다.
“나무 베기!”
쾅 쾅!
그는 다시 도끼질로 바닥에 틈을 내고 그 안에 선인장의 뿌리를 쑤셔 넣었다.
그러자…….
흡혈 선인장이 주변의 수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뾰족한 가시를 통해.
그리고.
뿌리를 통해.
쩌적! 쩍쩍!
“……어?”
뜻밖의 상황에 정다운은 당황했다.
쩌저적! 쩍! 쫙!
“어어어?”
하얀 땅에 터를 잡게 된 흡혈 선인장들이 뿌리에 닿는 수분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야, 적당히들 빨아 먹어! 물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수박 맛이 맹맹해진다고!”
말려 봐야 선인장에게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선인장들을 중심으로 하얀 땅이 가뭄이 든 것처럼 바짝 말라 갔다.
그리고 결국엔.
[제발 그만 좀 해……!]
“어라?”
정다운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하얀 여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