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77화>
* * *
쿠궁……!
순간 낙원 전체에서 어떤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라기보단 육중한 무언가가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진동은 유감스럽게도 현재 낙원 안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소란에 묻혀 어느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쿵쾅쿵쾅!
크워어어!
뿌우……!
오순도순 평화롭고 아름답던 문어 마을에 흙으로 만든 조폭들이 우르르 들이닥친 상황이 바로 이런 걸까.
“크워어어!”
골렘들은 양민들을 괴롭히는 깡패들처럼 무자비하게 문어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발로 밟고.
사정없이 걷어차고.
“뿌익!”
두 손으로 찢어발기고.
잡아서 패대기치고.
“뿌엑!”
심지어 두 주먹으로 땅을 쾅쾅 두드려 지반을 통째로 무너뜨릴 정도였다.
쿠쾅! 쾅! 쿠와앙!
“뿌이이……!”
압도적인 난장판!
엉망진창 대환장 파티!
골렘들의 거침없는 무력시위에 폭신폭신한 구름이 폭발하듯 움푹 내려앉으며, 그 위로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성되었다.
“크워어!”
쾅쾅 쾅쾅!
무너진 구덩이 위에 서서 진짜 고릴라처럼 가슴을 치며 포효하는 철갑 고릴라 골렘을 보며 참가자들은 식겁한 표정으로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오래전 스테이지-1에서 겪었던 최종 보스전이 눈앞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가, 같은 편 맞지?”
“그럴걸……?”
“진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참가자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자신들도 골렘 한 마리쯤은 얼마든지 혼자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는 언제나 상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골렘들에겐 문어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많을수록 좋았다.
특출나게 강력한 최종 보스는 없으면서, 자잘한 괴물 문어들만 잔뜩 모여 있는 지금 같은 상황은 골렘들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으니까.
“크워어어!”
‘진짜…… 같은 편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괴물 문어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놈들은 용감했고, 똑똑했다.
골렘들을 보자마자 기동력을 빼앗기 위해 다리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특히 힘의 룬과 속도의 룬을 동시에 사용한 마법 문어는 역전의 용사 같았다.
빠른 속도로 골렘들 사이를 쏘다니며 증폭된 힘으로 골렘의 다리를 휘감아 우그러뜨렸다.
그 힘에는 골렘 위에 코팅된 철갑조차 찌그러졌다.
“크워어!”
쿠웅-!
거대한 덩치가 쓰러지며 분홍색 먼지가 올라왔다.
이때를 노리고 대왕문어가 득달같이 다가와 덮쳐서 나머지 팔과 다리를 힘으로 뽑아 버렸다.
“뿌우우!”
완벽한 대승!
2룬 마법 문어가 처참하게 망가진 골렘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 용맹하게 승리의 나팔을 불어 부하들을 독려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것이야말로 전략과 전술, 마법의 승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퍽!
“뿌익!”
재생된 골렘의 주먹에 맞고 튕겨 나갔다.
그 모습에 다른 문어들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다른 명령을 내렸다.
“뿌우!”
핵을 찾아라!
희생을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는 괴물들은 또 처음이었다.
상대가 재생하는 타입이라는 걸 배운 순간 ‘핵’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바로 도출해 낸 것이다.
문어들은 이제 골렘들의 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수작업으로 만든 거라 핵이 숨겨진 위치가 제각각 달랐고, 규칙도 없었다.
이게 다 만든 사람이 대충 만든 탓이었다.
“나도 다 까먹어서 핵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고생하는 괴물 문어들을 보며 겸연쩍게 중얼거리는 정다운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핵이 사타구니 쪽에 숨겨져 있었지만, 몇 개는 또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와중에 정다운도 제법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현재 구름 골렘을 타고 전장 위를 성큼성큼 돌아다니며 골렘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지시하고 있었다.
가끔 눈먼 공격들이 날아올 때도 있었지만, 보호의 룬(복제)를 한 장 사용한터라 사소한 공격쯤은 무시해도 좋았다.
물론 복제품이라 방어력이 절반인 게 흠이었다.
[님! 보호막에 또 금 갔음!]
“하나 더 찢지 뭐.”
토끼의 말에 새롭게 주문서를 찢는 정다운에게 엄청난 공복이 닥쳐왔다.
큰일이었다.
“와, 진짜 큰일이네. 먹는 것도 큰일이야.”
와구와구!
덕분에 정다운은 치열한 전투 한복판에서 틈만 나면 족발을 뜯어먹고 있었다.
천방지축 날뛰는 오동민이 부러운 마음에 얼른 포만감을 올려서 비슷한 흉내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먹방에도 저마다 스타일과 속도가 다양한 법.
음식을 전투적으로 흡입하면서 싸우는 오동민과 그는 먹방의 장르가 달랐다.
정다운은 같은 걸 먹어도 어떻게 먹으면 맛있게 먹을까 고민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한입 먹을 때마다 반드시 비빔 막국수를 족발 위에 돌돌 말아서 같이 입에 넣거나, 하다못해 쌈장이라도 찍어 먹고 있었다.
“오, 쌈장도 별미네?”
매콤짭짤한 쌈장에 코팅된 야들야들하고 쫄깃한 콜라겐의 조화가 아주…….
[에라이! 지금 맛을 따질 때가 아님! 그만 좀 처먹고 저쪽을 보라고요! 뭔가 이상함!]
“후르릅, 응?”
토끼의 성화에 정다운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쿠르르……!
“구름이 움직이네?”
올록볼록 엠보싱으로 가득한 낙원의 풍경이 묘한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구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구름을 뚫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굵은 나무뿌리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히익? 미친! 세계수가 움직이고 있어요! 설마 여기 최종보스가 세계수라는 걸까요?]
“뭐? 저런 말도 안 되게 큰 걸 인간이 어떻게 잡으라고?”
[부, 불태웁시다!]
토끼가 독한 표정으로 아이디어를 짜냈지만, 정다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저렇게 거대한 거에 불이 붙었다간 낙원 전체가 불바다가 될 거라고.”
낙원이 불바다가 되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난 집에 갇힌 꼴이 되어 죽을 것이었다.
“우리끼리라면 하늘 신전을 타고 도망칠 수 있겠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시스템적으로 던전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럼 어떡하라고요? 저 나무뿌리들이 우리를 공격하면요? 혹시 나무 베기로 저거 벨 수 있겠음?]
“끄응. 가능하기야 한데, 저걸 어느 세월에?”
정다운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려 봤지만, 도저히 견적이 안 나왔다.
커도 너무 컸다.
자잘한 나무뿌리가 최소 전봇대 10개 두께였고, 그보다 두꺼운 뿌리는 얼마든지 많았다.
세계수의 뿌리들이 스멀스멀 움직여서 다가오자 참가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헉! 뭐야, 이건!”
“설마 이것도 괴물인가?”
태산과 싸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나무뿌리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지만, 스케일이 터무니없이 커서 감히 공격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나무뿌리의 표면에 버섯처럼 생긴 동그란 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버섯?”
“알?”
문어였다.
“삐이-!”
“뿌!”
갑자기 나무뿌리에 붙어 있던 알들이 일제히 팡팡 터지며, 그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끼 문어들이 전장에 대거 투입되었다.
“이런 미친!”
보자마자 참가자들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골렘들이 대폭 줄여 놓은 문어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3배로 늘어난 것이다!
어리다 해서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놈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른 못지않게 어엿한 전사였고, 본능적으로 선배 문어들이 죽으면서 바닥에 떨군 무기들을 주워 들고 참가자들을 공격했다.
게다가 낙원에 가득한 올록볼록한 동산들은 막상 가까이 가보면 전부 안이 숭숭 뚫린 동굴들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확률적으로 아이템이 들어 있는 보물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진 새끼 문어들이 그 안에서 아이템들을 찾아들고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안 돼! 문어들이 아이템을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우리도 흩어져야겠어!”
참가자들의 말에 오동민과 윤진수가 깜짝 놀라 그들을 말렸다.
“흩어지면 안돼요! 우리가 흩어졌다간 각개격파당할 뿐이라고요!”
“아줌마 아저씨들, 게임도 안 해 봤어요? 우리는 무조건 같이 다녀야 산다고요!”
그 말에 움찔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참가자들.
물론 오동민과 윤진수가 하는 말은 그들도 경험상 뻔히 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곳에 모인 참가자들은 서로 같은 일행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문서나 아이템이 당장 손에 없으면 혼자만 죽을까봐 불안한 심리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정다운의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온 것은.
“여러분, 주문서가 필요하십니까? 얘들아, 나눠 드리거라.”
“먀아옹.”
“……!”
참가자들은 경악했다.
[자, 천천히 줄 서서 받으셈!]
“……!”
정다운의 그림자 하인들이 번화가에서 전단지를 나눠 주는 알바생들처럼 복제 주문서를 아낌없이 나눠 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것만 받으면 배고파서 못 쓸까 봐 간단히 허기를 채울 간식까지 곁들여 주었다.
“지치고 배고픈 자들이여, 다 나에게 오라.”
“아아……!”
아낌없이 퍼 주는 나무 정다운!
그의 감당 못 할 아가페 사랑에 모두가 감동하며 전단지를 찢, 아니, 주문서를 찢고 간식을 먹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식사라도 하시면서들 싸우셈.]
물론 생색은 토끼가 다 냈다.
그리고 정작 뒤에서는 정다운에게 투덜댔다.
[그런데 이렇게 공짜로 베풀면 너무 아깝지 않음? 주문서 값으로 한 사람당 아이템이라도 하나씩 뜯어내든가 하자고요.]
“걱정 마. 이미 충분히 보상받고 있으니까.”
[……?]
어리둥절한 토끼의 앞에서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뒤에는 그림벨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죽은 문어들의 시체를 열심히 소지품에 챙기고 있었다.
저 아까운 것들이 구름에게 잡아먹혀 녹아버리기 전에 그때그때 재빨리 수거해야 했다.
대왕문어 같은 경우엔 사이즈가 너무 커서 즉석에서 토막내야 했는데, 그 일은 일반 그림자 하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제물이군요.>
알파는 흐뭇했다.
문어의 시체도 좋았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아이템이었다.
역시 낙원이라 그런지 최소 1레벨 이상의 강화 아이템들이 많았다.
다만 골렘들에게 처참하게 밟혀 죽은 문어들의 아이템은 솔직히 제물이라기보단 고물에 가까웠다.
그만큼 생명 에너지도 많이 소실된 상태였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손에 곱게(?) 죽은 문어의 아이템들은 상태도 좋고 생명 에너지도 풍부했다.
이 말은 즉 참가자들이 열심히 힘을 낼수록 제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반면에 그들에게 베푸는 복제 주문서에는 생명 에너지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간식거리가 소모되긴 했지만, 정다운은 알파와 의논해서 가장 생명 에너지가 적으면서도 포만감만 빠르게 차는 다이어트 식품을 나눠준 것이었다.
바로 곤약!
바로 ‘슬러그’를 반죽해 만든 비빔 막국수였다.
결론적으로 이쪽은 별로 투자한 것도 없는데, 벌어들이는 수입은 쭉쭉 오르는 상황이라 알파는 더없이 행복했다.
“으음, 배가 부르긴 한데 이걸로는 뭔가 허전한데…….”
참가자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막국수를 후르릅 먹었다.
후르릅!
비빔 막국수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 갑자기 면을 후르릅거리는 건 어울리지 않았지만, 뭔들 어울릴까.
아니, 전투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막국수를 먹는 순간 그들의 움직임이 10퍼센트나 빨라진 것이다!
“오오오!”
참가자들이나 정다운이나 서로 윈윈 상황!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다운은 류승우를 불렀다.
“승우 형! 지금 안 바쁘면 나랑 저기나 들어가 볼까?”
“뭐? 어디?”
마치 한가하면 카페나 가자는 듯한 말투였지만, 정다운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세계수의 뿌리였다.
그리고 그것들 중 가장 두꺼운 뿌리 위에 떡하니 대문이 붙어 있었다.
마치 이곳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저 안으로 들어간 호열 형님과 지서연 씨에게서 아까부터 귓말이 안 돌아오더라고.”
그 말에 류승우는 뒤늦게 단톡방의 상태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전투 중에 나눈 대화들 중에 그 두 명의 귓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처음부터 실종된 상태였던 도민준까지 총 3명이었다.
“설마 저 대문 자체가 함정이었던 건 아니겠지?”
[히익? 그런가 봐요! 세계수가 사람들을 산채로 잡아먹은 게 분명함! 아이고! 호열 아재요, 평생을 노총각으로 살다가 죽을 땐 그래도 서연 아씨랑 오붓하게 같이 죽었……!]
꽁!
[아얏!]
“멋대로 죽이지 마!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고!”
정다운은 토끼의 호들갑을 꿀밤으로 강력하게 응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