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76화>
* * *
이 또한 운명일까.
“응?”
“엇?”
땅굴을 헤매던 지서연과 구호열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
“서, 서연 씨! 안녕하십니까!”
“……아, 예.”
일주일 만에 주인을 본 대형견이 이런 느낌일까?
거대한 덩치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구호열의 모습에 지서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한창 전투 중이었는지 그의 근육들이 평소보다 2배는 더 커져 있었다.
앞서 했던 표현을 정정해야겠다.
대형견이 아니라, 길에서 갑자기 동물원에서 탈출한 미친 반달곰과 마주친 기분이었다.
반달곰이 꿀 빠는 표정으로 호기롭게 외쳤다.
“서연 씨!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같이 다니시죠! 서연 씨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지서연은 조금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둘 다 류승우를 향해 가는 길이라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안 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서연 씨! 방어는 저에게 맡기시고 공격에만 집중하십시오!”
“네, 하앗!”
콰앙!
둘의 조합은 실로 완벽했다.
구호열이 앞에서 모든 공격을 몸으로 막아 내면, 그 틈에 지서연의 제국창술이 문어들을 줄줄이 꿰어서 문어꼬치로 만들어 버렸다.
구호열은 근거리에서 당해 낼 자가 없었고, 지서연의 오러를 두른 창술은 원거리에 적합했다.
“서연 씨, 하나 남은 보호의 룬입니다! 저보다는 서연 씨가 써 주세요!”
심지어 구호열은 보호의 룬조차 필요 없다며 지서연에게 양보했다.
“네? 이런 아이템은 저보다는 탱커가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서연 씨가 다치기라도 하면 공격력이 반감되니까 이게 맞습니다!”
어차피 이런 잔챙이들 상대로는 추가 방어막을 몸에 두르는 것보다는 맨몸으로 맞고 회복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저는 대신 이걸 쓰죠!”
구호열은 하나 남은 화염의 룬을 찢었다.
화르륵!
그러자 그의 전신에 뜨거운 화염이 둘러지며 문어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피해를 입혔다.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탱커였다.
지서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원래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과소평가였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류승우의 그늘에 가려서 진가가 잘 드러나진 않았을 뿐, 그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전사였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크하하! 이 멍청한 문어들아! 얼마든지 오거라! 나를 와서 눕혀 보라고! 크하하하하!”
“…….”
흥이 날수록 그의 근육이 울룩불룩 자꾸만 부풀고 있었다.
저러다 빵, 하고 터질 것만 같아서 진짜 너무너무 부담스러웠다.
“어? 서연 씨, 여기 뭐가 있는데요?”
“네?”
어느 순간 구호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앞을 가리키자, 지서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앞에 갈색의 거대한 기둥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들 아무래도…… 나무뿌리 같은데요?”
기둥의 표면을 만져ㅍ본 지서연이 하는 말에 구호열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 나무뿌리가 이렇게 크다고요? 전봇대보다 10배는 두꺼운 것 같은데요?”
“여긴 다들 크니까 나무뿌리도 큰가 보죠. 이 사실을 일단 단톡방에 올리는 게 좋겠어요.”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보라도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됐다.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다ㅍ보면 최종 유적지로 향하는 지름길이 나오는 법이었다.
지서연은 귓말을 보낸 후, 잠시 고민했다.
하필이면 류승우의 방향을 알려 주는 알파의 화살표가 이 나무뿌리들이 있는 방향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서연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구호열 씨, 여기서부턴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조금 우회해서 돌아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돌파할까요?”
“음……, 여기서 방향을 틀었다간 괜히 길을 더 헤매게 되지 않을까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서는 구호열이었지만, 정작 그의 속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무, 무서워! 괜히 호기 부렸나? 지금은 류승우도 없는데.’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지서연의 감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용감하시네요.”
“……!”
‘용감하다고. 했다.’
그 순간 구호열의 모든 걱정이 한 방에 날아갔다.
“크하하! 서연 씨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칭찬은 반달곰을 춤추게 하는 법!
화르륵!
미치광이 반달곰이 몸을 불태우며 화통하게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결국 발견하고 말았다.
이전까지 봤던 나무뿌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크기가 감히 짐작조차 안 되는 거대한 나무기둥을.
그리고 그 가운데 떡하니 달려 있는 ‘대문’을.
“이거 설마……?”
“최종 유적지?”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던전을 공략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망했다! 류승우도 없는데!’
구호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 *
낙원 곳곳에 있는 ‘대문’을 발견한 건 다른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땅속을 헤매는 것도 지쳐 있던 터라 그들은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나무기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정다운은 대문이 아니라 뒷문을 뚫어 버렸다.
[정말 해냈단 말인가.]
루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휘오옹-
낙원의 바닥에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서늘한 바깥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하니 진짜로 낙원에 구멍을 뚫는 게 가능할 줄이야.]
땅을 파고 또 파서, 정다운은 결국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던 낙원에 개구멍을 뚫어 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서 부유석을 밟고 근엄하게 선 정다운은 히말라야를 정복한 등산인 같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수신호를 하고 있었다.
“자, 천천히! 조심조심! 오라이! 오라이-!”
고오오.
뚫린 터널을 통해 하늘 신전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어허! 조심히 운전해야지! 자꾸 벽에 부딪치잖아!”
“뿌!”
화르륵!
불타는 문어 지팡이를 주차장 경광봉처럼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 마치 주차장 도우미 같았다.
토끼가 발끈하며 반발했다.
[아따, 잔소리 좀 그만하셈! 그럴 거면 처음부터 구멍을 더 넓게 뚫었어야죠! 이게 보통 쉬운 일인 줄 아셈?]
신전의 운전은 섬세한 작업이었다.
높이 조절은 토끼가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며 신전 곳곳에 생명력이 주입된 망령석을 일일이 추가해야 했고.
방향 전환은 바하무트가 이쪽저쪽 돌아다니면서 바람을 불어서 밀어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수작업이다 보니, 좁은 터널을 들어오는 동안 신전의 모서리들이 좌충우돌하며 모서리가 자꾸 까졌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하늘 신전은 무사히 땅굴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수 있었다.
[오류! 던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장했습니다!]
반가운 메시지와 함께 낙원의 뒷문에 뚜껑이 생겼다.
마치 와인병에 코르크 마개를 뾱, 하고 꽂은 모양새였다.
“들어왔다!”
[이야! 오랜만이셈!]
좀 전까지 투닥거리던 것도 잊고 정다운과 토끼가 서로를 얼싸안으며 반가워했다.
[낄낄. 못 보던 사이에 님 볼살이 더 포동포동해진 건 내 기분 탓임?]
“문어숙회 탓이지!”
“뿌!?”
정다운의 책임 회피에 문어 지팡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주인님!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헉?]
바하무트도 얼음눈물을 펑펑 흘리며 달려오다가, 그의 손에서 불타고 있는 문어 지팡이를 보고는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인님. 그 뜨거운 문어는 어디에 쓰는 물건이시나이까?]
“도시락이야.”
“뿌이!?”
또 소스라치게 놀라는 문어 지팡이였다.
참고로 문어 지팡이는 그가 경광봉을 만들겠다며 화염의 룬을 입으로 찢게 해 석화가 안 된 머리통만 불타오르게 만든 것이었다.
실제로는 경광봉보단 횃불에 가까운 물건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기분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런 장난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정다운은 토끼에게 가 있던 마법 창고 열쇠를 회수하고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누구 안 줘야지. 골렘들이 부족하니까 너무 답답했단 말이지.”
하지만 답답한 일은 이제 끝이었다.
“좋았어! 이제 올라가자!”
[예압!]
정다운의 신호에 하늘 신전이 엘리베이터처럼 수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알파가 주의를 줬다.
<신전을 끌고 너무 낙원 깊숙이 들어가시는 건 다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곳이 진정 세계수를 기르기 위한 화분이라면, 자칫하면 신전의 생명 에너지를 통째로 세계수의 양분으로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미 토끼가 자신이 본 세계수의 존재에 대해 모두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 뒤였다.
정다운도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딱 지상까지만 올라가자고!”
어차피 던전을 공략하는 데 신전의 존재는 필요 없었다.
중요한 건 골렘들이었으니까!
쭈우욱!
엘리베이터가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터널도 점점 넓어지더니, 그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얼굴이 보였다.
류승우뿐만 아니라 구멍을 뚫는 동안에 모여든 참가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오동민과 윤진수도 있었다.
“우와, 나 신전 처음 봐요!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생겼구나!”
“우주선 같아!”
애들만 신난 건 아니었다.
제일 신난 사람은 사실 정다운이었다.
그가 문어 지팡이를 치켜들며 외쳤다.
“이대로 최종 유적지까지 직행한다!”
최종 유적지의 위치는 대강 파악이 됐다.
낙원에는 지상과 천장을 잇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이 몇 개 있었다.
전에는 그냥 몽실몽실한 구름 기둥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안에 나무뿌리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부와악!
중간에 모두를 태운 신전이 그 기세로 지상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그동안 화살을 못 쏴서 멀리서 노려보고만 있던 수 천 마리의 문어 병사들과의 전면전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뿌우!”
“……와, 언제 이렇게들 모였데?”
온 사방에 드글드글 모인 문어 병사들의 숫자에 정다운이 혀를 내둘렀다.
“뿌우!”
슈슈슉!
역시 전쟁의 효시는 언제나 빗발치는 화살들부터 시작했다.
“승우 형!”
“뇌전!”
파지직!
정다운이 철근을 새로 꺼내 주자 류승우가 반사적으로 푸른 기운을 뽑아내 철근을 휘감았다.
몇 번이나 반복했더니 이제 전자석을 만드는 법도 완벽하게 몸에 익었다.
전자석의 기본은 솔레노이드(solenoid).
원래대로라면 철근 위에 코일을 둘둘 감아서 전기를 흘려 넣어야했지만, 류승우는 뇌전을 컨트롤해서 철근 위를 둘둘 휘감아서 해결했다.
컨트롤이 실패하면 자력이 바로 끊기기 때문에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 류승우는 스킬 레벨이 한 단계 상승하기까지 하고, 스킬의 컨트롤이 전보다 훨씬 세밀해진 것이다.
“화살이 막혔다! 모두 스킬과 근접 무기로 싸웁시다!”
전자석 철근으로 화살을 봉쇄하자, 문어들뿐만 아니라 참가자들 또한 활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라면 참가자들 쪽이 훨씬 유리했다.
숫자만 보면 거의 100:1의 비율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깽판’이었다.
“동민아!”
“네, 형!”
정다운의 부름에 오동민은 미리 건네받은 복제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힘의 룬(복제) ×2
속도의 룬(복제) ×2
화염의 룬(복제) ×2
보호의 룬(복제) ×2
평소에 항상 포만감을 1천 퍼센트 이상을 채우고 다니는 통통한 꼬마 전사 오동민!
그는 모든 종류의 복제 주문서를 한꺼번에 찢어도 꼬르륵 소리가 들리지 않는 유일한 참가자였다.
“으아! 이걸 언제다 찢냐!?”
오동민이 행복에 겨운 한탄을 하며 열심히 주문서들을 찢어발겼다.
그것도 2장씩.
화르륵!
파앗! 파아앗!
그러자 오동통한 그의 몸에 투명한 막이 둘러지고, 불길이 치솟고, 힘과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다이어트!”
번쩍!
토실토실하던 전신의 살들이 단단히 압축되는 순간, 극단적으로 파워 업한 미소년 전사가 그곳에 나타났다.
“다 덤벼!”
오동민이 자신만만하게 문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곳에서부터 진정한 깽판이 시작되었다.
뿌웃!
뿌우우!?
“으하하! 다운이 형! 이거 기분 짱이에요!”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활개치는 오동민의 웃음소리와 혼비백산한 문어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때.
뿌오오오!
오동민의 등 뒤로 함성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오동민이 문득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오랜만에 마법 창고의 문을 활짝 개방한 정다운이 껄껄 웃고 있었다.
“다 밟아!”
“크워어!”
“크와아아!”
쿵쾅쿵쾅!
와르르! 쾅쾅! 쿠콰쾅!
……뿌에엑!
“…….”
저쪽은 깽판의 스케일이 달랐다.
그리고 그러한 소란은…… 괴물 문어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어떤 존재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