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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275)화 (275/393)

<던전리셋 275화>

목숨 걸고 괴물들과 싸우는 것과 땅 파기 중에서 무엇이 더 힘들고 어려울까?

참가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전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1초도 고민할 것 없이 바로 후자라고 대답할 존재가 바로 여기 있었다.

“뀨앙…….”

뽀뀨는.

그만 감동해 버렸다.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진 채.

하늘조차 뚫어 버린 궁극의 땅다람쥐가 된 자신의 주인님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다운은 진정한 의미에서 땅다람쥐들의 신이자 최고 레벨의 롤 모델이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콰르르르!

지금 이 순간 전투보다 더욱 끔찍한 궁극의 파괴 활동이 단 한 명의 사내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진정한 파괴였다.

평화롭고 아름답던 낙원의 땅에 인간 굴삭기가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쫘악!

쭈아악!

정다운은 손에 닿는 모든 구름을 솜사탕처럼 찢고 뜯어 동그랗게 뭉쳤다.

손이 닿지 않으면 공중 계단을 밟고 오르락내리락하며 부지런히 땅을 팠다.

구덩이가 끝도 없이 커져 갔다.

옆으로, 아래로, 온 사방으로 범위를 넓혀 갔다.

[크르릉! 이러다 낙원 전체를 소지품에 넣어 버릴 기세로구나!]

루갈은 어쩌면 오늘 소지품의 수납공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몰랑몰랑한 구름의 특성상 뭉치는 족족 부피가 상당히 줄어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분간 소지품의 여유 공간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뿌우!”

슈슈슈슉!

“……!”

갑자기 하늘에서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으헉! 위험합니다! 구덩이 위에서 누가 우리들에게 석궁을 쏘고 있습니다!”

오창석 촌장이 기겁하며 화살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머리 위에서 구덩이를 둘러싸고 수많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문어들인가?”

류승우가 앞으로 나섰다.

“뿌우!”

범인은 지상을 순찰하고 있던 무장한 문어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사이에 껴서 병사들을 통솔하는 대왕 문어들까지!

놈들의 모습을 확인한 정다운이 무릎을 탁 쳤다.

“아하! 이거였구나! 낙원에 오자마자 우리를 공격한 화살들은 바로 저 녀석들이 쏜 거였어!”

<한가하게 감탄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석궁을 든 문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알파의 지적은 타당했다.

놈들의 숫자가 어느덧 몇백 마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수적 열세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아래쪽에서 위를 바라보며 싸우는 방식이 가장 큰 문제였다.

“먀옹?”

퍼펑! 펑펑!

한창 열심히 주문서 복사에 심취해 있던 그림자 하인들이 빗발치는 화살에 맞고 펑펑 터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아름다웠다.

정다운은 일행 모두에게 갓 찍어 낸 따끈따끈한 ‘보호의 룬(복제)’를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어서 찢어요!”

여부가 있을까!

“넵!”

“뽀뀨!”

찌직! 쫙!

파아앗!

그 순간 투명한 보호막이 그들의 몸을 감싸며 화살들을 튕겨 냈다.

정다운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어차피 남아도는 주문서라서 뽀뀨의 입에까지 덥석 물려 주었다.

뽀뀨는 용케도 그의 말을 알아듣고 주문서를 이빨로 물어뜯었고, 그 순간 투명한 보호막이 뽀뀨의 몸을 감쌌다.

파아앗!

“뽀뀨웃!?”

보호막 뽀뀨 탄생!

정다운의 손바닥 위에서 뽀뀨가 에헴, 하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두 발로 일어섰다!

정다운이 감탄했다.

“와! 혹시나 했는데 진짜 뽀뀨도 되는구나!”

워낙 약해 빠진 녀석이라 체력이 축나는 원본 주문서는 감히 실험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포만감이 빠져나가는 복제 주문서라면 뽀뀨라도 문제없었다.

“자, 이거 하나 더 써 봐!”

“뽀뀨?”

뜬금없는 타이밍에 갑자기 신이 나 버린 정다운이 뽀뀨에게 기세를 몰아서 주문서 한 장을 더 물려 줬다.

이번엔 ‘속도의 룬(복제)’!

그러자!

번쩍!

“뽀뀨우!”

스피드 뽀뀨가 탄생했다!

스팟! 스팟! 팟!

“우와아! 효과가 대박이네!”

크게 감탄하는 정다운!

뽀뀨는 엄청난 속도로 정다운의 몸 위를 내달렸다.

그러다 깜짝!

배가 몹시 고파졌다는 것을 깨닫고 볼따구에 숨겨 둔 뼛조각을 바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속도로 뼈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오도도도도독!

와드드드드드득!

“오오오!”

뽀뀨의 급격한 변화에 정다운이 크게 감격하며 눈가를 훔쳤다.

“훗, 녀석. 손가락만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물론 손가락만 한 적은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보호막을 둘렀다 해서 방심하기엔 일렀다.

슈슈슈슉!

쩌적! 쩍!

“이런, 보호막이!”

날아오는 화살들이 점점 많아지자, 보호막에 빠른 속도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휴이는 보호막에만 의지하지 않고 무기와 방패로 화살들을 직접 튕겨 내기 시작했고, 류승우는 뇌전을 뿜어내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요격했다.

그 모습은 확실히 멋있고 대단했지만, 효율이 너무 안 좋았다.

그야말로 소 잡는 칼로 닭이나 잡는 격.

겨우 화살이나 막기 위해 뇌전을 펑펑 써 댔다간 체력이 금방 동날 것이었다.

류승우가 정다운을 쳐다봤다.

“다운아! 올라가서 다 죽이고 올 테니까 계단 좀 만들어 줘!”

단번에 뛰어오르기엔 구덩이가 너무 깊어서 벽이 높았다.

휴이도 류승우의 말에 동의하며 앞으로 나섰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도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정다운 씨는 엄폐물을 만들어 오창석 씨와 함께 피신해 계십시오!”

“그건 안 돼요! 그럼 내가 땅을 파기 불편하잖아요!”

“……아, 예.”

잘 나가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 마당에도 끝까지 땅 파기에 집착하는 정다운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사방에 퍼져 있는 동료들을 이곳으로 찾아오게 하려면 구덩이를 최대한 넓게 파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문어들은 구덩이 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래쪽에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 전력의 중심인 저 두 명이 위로 올라가 버리면 아래쪽은 누가 상대하겠냐는 말이다.

자신은 땅을 파느라 바쁜데!

정다운이 모두를 불러들이며 외쳤다.

“원거리 공격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모두 가까이 덤비는 놈들에만 집중하세요!”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설마 다운이 네가 직접 싸우게?”

“아니!”

정다운은 당당하게 대답하며, 소지품에서 철근을 꺼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

구덩이 바닥에 수직으로 푹푹 꽂히는 3미터짜리 철근 기둥들!

“아, 이건?”

그의 계획을 퍼뜩 눈치챈 류승우의 눈이 커졌다.

정다운이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승우 형, 충전해!”

“오, 오케이! 주문 접수했다! 뇌전 방출!”

파지지직!

그 순간 류승우의 푸른 뇌전이 뻗어 나가 철근들을 휘감았다.

그 순간 철근들이 모두 전자석으로 변했고,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는 쇠붙이들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휘아악!

처처처척!

허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거대한 자석에 철썩, 철썩 달라붙는 화살들!

“뿌웃!?”

문어 병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한순간에 석궁이 쓸모없게 된 것이다!

“그러게 누가 화살촉을 철로 만들래?”

정다운은 이미 놈들의 석궁을 만져 본 적이 있어서 재질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분해졌다.

“…….”

“허허, 평화로다.”

“……뿌.”

모두의 마음이 경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정다운 선비가 있지도 않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다.

구덩이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던 문어 병사들은 닭 쫓던 개처럼 벙 찐 표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행들의 표정도 놈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맙소사. 이제는 좀 일일이 놀라지 않고 싶었는데…….’

헛된 노력이었다.

정다운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자신들의 상식이 무너지곤 했다.

‘아니, 상식…… 인가?’

철이 자석에 붙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

다만 이렇게 스케일 크게 자석을 가지고 놀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 이제 됐죠? 이제 위에 있는 놈들은 신경 끄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오는 놈들만 정리해 주세요. 난 계속 땅이나 팔 테니까요.”

“……넵.”

여부가 있을까.

이후로도 구덩이는 계속해서 넓어졌고, 정다운은 좀 더 욕심을 냈다.

이 기세로 아예 바닥 끝까지 뚫어서 하늘 신전을 낙원 안으로 들여 와도 좋을 것 같았다.

*   *   *

한편, 토끼는 하늘 신전에서 심심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어찌나 할 게 없는지 워프 게이트를 타고 나들이도 다녀왔다.

스테이지-1에 가서 우왕좌왕하는 신입 참가자들도 안내해 주고 왔고.

무간도는 아직 복구가 안 된 것 같아서 들르지 못했지만, 그 대신 안개섬에 들러 메모리와 노닥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하늘 신전으로 돌아와도, 역시나 할 일이 없었다.

[으아아! 심심하다! 심심해서 죽어 버릴 것 같다고요!]

[토끼 선배여, 정 심심하면 이리 와서 나와 같이 고양이나 길들이시게나.]

[흥. 싫은뎅.]

토끼는 낼름 혀를 빼물고는 하늘 위로 도망쳤다.

마침 어두운 밤이라서 범독수리들도 없는 평화로운 하늘이었다.

문득 토끼에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하, 그래! 이참에 이 낙원의 끝까지 한번 올라가 볼까낭!]

슝!

힘차게 날아오르는 토끼!

밖에서 본 낙원은 너무 거대해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전체적인 형태가 동그란지, 네모난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낙원에서 멀리 떨어져서 모습을 보려고 해도 밤하늘이 너무 어두워서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결국엔 직접 날아서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것이 낙원의 대략적인 스케일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엇?]

그런데 한참을 날아오르던 토끼의 몸이 갑자기 덜컥 멈췄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으어어? 이건 또 뭐야!?]

토끼는 결국 보고야 말았다.

이 거대한 낙원 위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나무.

그것은 나무였다.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낙원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었다.

[누가 여기에 나무를 심어놨대? ……음?]

흠칫?

토끼는 그 순간 이 낙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 나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추측이 아니라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토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요즘 낙원 곳곳에서 떠도는 소문들에 대해서.

단톡방의 사도들은 낙원에 초대된 참가자들이 어쩌면 낙원을 위한 ‘비료’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비료는 대체 무엇을 위한 비료일까?

단순히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

그럴 리가.

땅이 비옥해야 하는 이유는 언제나 그 땅 위에서 무언가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이 나무는…… 대체 뭐지?]

토끼는 의아한 표정으로 마법 창고의 문을 열었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의 의문을 풀어 줄 위대한 존재가 갇혀 있었다.

그가 대답했다.

파라락!

[세계수를 보았느냐?^_^]

[큽. 해맑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하지 말아 주셈.]

토끼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그에 종말의 용은 과격하게 책장을 펄럭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이 변절자! 나는 종말의 용이다! 네놈들의 장난질 따위에 일일이 장단 맞춰 줄 생각은 절대 없다!^_^]

[아니, 지금도 잘 맞춰 주고 있……. 아무튼 세계수가 뭔데 그래요?]

토끼의 질문에 종말의 용은 황당할 뿐이었다.

[뭐? 세계수를 모른다고? 네 녀석은 도우미였던 주제에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구나. 우둔한 토끼여.^_^]

[뭐지……? 틀린 말은 아닌데, 괜히 기분이 나쁘네?]

처음부터 계속 같은 표정인데 묘하게 진심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쯧. 하찮은 녀석.^_^]

울컥?

[에잇! 찢어 버렷!]

토끼는 결국 못 참고 웃는 표정이 그려진 책장을 사정없이 찢어 버렸다.

그리고 상쾌한 표정으로 다시 그에게 질문했다.

[휴, 됐다. 계속 말해 보셈. 그래서 세계수라는 게 뭔데요?]

종말의 용이 다시 혀를 차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너무 상식이라 숨기고 말 것도 없었다.

[쯧. 세계수는 세계를 받치는 기둥이다. 그리고 이 낙원은 세계수를 키우기 위해 존재하는 화분과 같다고 비유한다면, 네 우둔한 머리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ㅠ_ㅠ]

또 토끼가 울컥!

[야잇! 울지 마! 지금 표정을 너무 잘 써먹고 있잖음! 일일이 장단 맞춰 주고 있네!]

[네 착각이다.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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