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74화>
낙원에 온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정처 없이 땅굴을 걷던 참가자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일단 첫 번째.
낙원에 초대된 참가자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땅굴을 돌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기도 했지만, 모르는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간도에서의 마지막 날에 정다운과 류승우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하루라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고, 무간도가 너무 넓어서 끝내 모이지 못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도플갱어의 왕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운이 좋은 케이스였지만, 그것이 반드시 약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들 또한 무간도의 총공세를 견뎌 낸 이들이었으니, 병력 단위로 움직이는 마법 문어들을 상대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땅굴과 싸울 수는 없잖아! 으아아!”
[낙원의 영역이 제한됩니다.]
“제길! 또 굴이 폐쇄된다!”
“일단 달려!”
쿠르르르!
전투력과 상관없는 천재지변이 주기적으로 그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알게 된 사실 두 번째.
‘영역의 제한’은 주기적으로 계속 일어났다.
그 주기와 시간은 항상 불규칙했으며 제한되는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규칙이 하나 있었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었다간 그곳부터 폐쇄되는구나!”
“이거 그럼 계속 돌아다니라는 말 아냐!?”
물론 졸리면 구석에 숨어 한숨 눈을 붙이는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곳에 아예 터를 잡고 살면서 백년해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낙원은 어쩌면…… 참가자들이 끊임없이 땅속 곳곳을 떠돌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땅속에서 사람이 죽거나 문어가 죽으면, 그 시체들은 바로바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부패의 흙’처럼 시체가 썩는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차라리 소금 덩어리가 물에 녹는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죽은 시체들이 점점 몽실몽실하게 변하면서, 주변과 완전히 동화되어 연보라색 구름에 합쳐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치 깊은 바다에 빠진 시체처럼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정보들을 전부 종합했더니…….
“설마?”
참가자들은 최종적으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낙원은 우리를 땅 속에 골고루 섞어서 비료로 삼으려는 거 아닐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이런 물리적인 성질을 가진 구름이 대체 무슨 힘으로 하늘에 떠 있겠어? 다 우리들의 목숨을 녹여서 연료로 삼는 것 아니겠어?”
“헉! 잠깐, 그러고 보니……?”
“……!”
갑자기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듣고 보니 제법 그럴듯한 논리 아닌가!
구름은 흙이고.
인간과 문어들이 비료라면.
그 비료들이 한곳에 고여 있지 않게 잘 섞어 줘야 땅이 비옥해지지 않겠는가!
모든 농사가 그렇듯이!
“그, 그러게.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부유섬은 차라리 흙이기라도 했지, 여긴 아예 흙도 아니고 구름인데도 이렇게 흙처럼 만져지잖아?”
“그럼 우리가 비행기 연료 같은 건가?”
“잠깐, 그럼 설마! 이 구름들이 전부 우리 같은 사람을 녹여서 만든 건 아니겠지?”
“헉!?”
대번에 경악하는 참가자들.
소름이 돋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그렇게 생각하자, 온 사방에 가득한 몽실몽실한 구름들이 갑자기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들이 연보라색의 시체 더미 안에 파묻힌 것 같았다.
* * *
그리고 마침내 정다운은 류승우와 만나고 말았다.
“앗, 찾았다! 승우 형이다!”
“어? 다운아!”
“승우 형!”
홍대 거리 한복판에서 10년 지기 친구를 만난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한창 마법 문어들과 싸우고 있던 류승우는 전투 중인 것도 잊고 달려가 정다운을 얼싸 안을 뻔했다.
물론 그랬다간 감전사였다.
“다운아, 여긴 위험해!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 금방 끝낼게!”
류승우는 손을 들어 정다운이 다가오는 것을 재빨리 막았다.
그리고 몸에 두르고 있던 푸른 뇌전을 그대로 휘감아 올려 한 점에 폭발시켰다.
콰르릉!
“뿌우웃!?”
콰쾅! 콰르릉! 쾅!
그를 중심으로 천둥 번개가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그 놀라운 힘에 여태까지 그를 고전시키고 있던 마법 문어들이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다운이가 있다면! 힘을 아낄 필요가 없지!’
류승우는 거칠 게 없었다.
하루만 살고 죽을 게 아니기에 그는 지금껏 힘을 최대한 비축해 가며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다운과 만난 이상, 쌓여 있던 모든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방출해 버리고 바로 뻗어도 되는 것이다.
콰르릉! 쾅!
“뿌에엑!”
“뿌익……!”
문어 굽는 냄새가 땅속에 가득 퍼졌다.
그 처참한 광경에 정다운이 들고 있던 문어 지팡이는 눈을 질끈 감고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 모든 동족들이 전멸하고 말았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자, 류승우는 곧바로 정다운의 앞에서 기절해 버렸다.
그가 겪은 고생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뒷일을 부탁한다. 꼴깍.”
“밥 먹고 자.”
“어, 그럴까?”
류승우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정다운이 차려 준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 호화로운 밥상 앞에 앉았다.
“밥 먹기 전에 손 씻고.”
“어, 그럴까?”
손을 씻고 다시 앉았다.
그러자 슬그머니 정다운과 같이 있던 루갈과 휴이, 오창석 촌장도 손을 씻고 그의 앞에 착석했다.
그리고 서로를 뻘쭘하게 쳐다보며 눈인사를 했다.
“흠흠, 또 뵙네요.”
“아, 예…….”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는 건 조금 어색했다.
그런데 식사 중에 문득 류승우의 눈에 정다운과 함께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그림자 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운아, 그거 뭐 만드는 거야?”
“아, 이거?”
내심 언제 이걸 물어봐 주려나 기다리고 있던 정다운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의 일들을 전해 주었다.
“뭐? 주문서를 복사했다고! 그게 가능해?”
듣자마자 경악하는 류승우의 심정은 밥을 먹고 있던 다른 이들도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불가능이란 없었다.
노가다, 아니 혁신만 있을 뿐.
“그럼 설마…… 그게 전부?”
류승우는 정다운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두꺼운 종이 뭉치를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맞아.”
씨익 웃는 정다운.
지금 이 순간에도 구름 골렘의 위에서는 가내수공업으로 이루어진 노가다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먀앙.”
“니야앙.”
쓱쓱, 싹싹.
서걱서걱.
<사업자 등록증>
상호 명 : 정다운 제본소
대표 : 정다운
상임 이사 : 정다운
공장장 : 정다운
노조 대표 : 정다운
직원 수 : 7명
사업 종류 : 서비스업/제조업
하필이면 노조 대표도 정다운이라서 파업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행복한(?) 공장이었다.
모두가 바빴다.
하인 몇 명은 판화를 찍고.
하인 몇 명은 새로운 목판을 깎고.
그런데 진짜 사악한 건 회사 대표인 정다운 본인도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쉬는 시간조차 없었다.
정다운은 현재 ‘힘의 룬’ 목판을 깎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림자 하인들은 그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만 가능했다.
그래서 녀석들에게 새로운 목판을 깎게 시키려면, 먼저 정다운이 그 목판 하나를 시범적으로 손수 완성해야 했다.
그래서 요 며칠간 다른 사람들이 곳곳에서 열심히 싸우는 동안, 정다운은 엄청 열심히 목판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법 주문서(복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화염의 룬(1레벨)
[마법 주문서(복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속도의 룬(1레벨)
[마법 주문서(복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보호의 룬(1레벨)
“어때? 이제 힘의 룬만 깎으면 돼.”
“이게 진짜 된다고?”
백날 의심하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빨랐다.
정다운은 그 즉시 ‘속도의 룬’을 사용했다.
그러자 꼬르륵 소리와 함께 그가 목판을 깎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자, 어때? 앞으로 이걸 사용하면 뭘 만들더라도 훨씬 빨리 만들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
“말도 안 돼…….”
의기양양한 정다운의 모습에 류승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 어마어마한 양의 복제 주문서를 들고 있으면서도, 생각의 흐름이 전투가 아니라 뭘 만드는 쪽이라는 것이 너무나 정다운스러웠다.
* * *
류승우는 밥을 배불리 먹자마자 복제 주문서의 효과를 몸소 체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아까부터 휴이와 오창석 촌장이 계속 밥을 먹고 있는지.
정다운이 목판을 깎는 동안 이 두 명이 잡다한 전투를 모두 도맡아 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이제 그들과 함께였다.
“그런데 이 복제 주문서, 원본 주문서보다 효과가 좀 약한 것 같은데?”
“응. 효과는 절반 정도야. 그런데 이게 중첩이 되더라고? 똑같은 주문서를 2장 찢으면 원본이랑 똑같은 성능이야.”
“뭐? 진짜?”
류승우는 깜짝 놀랐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알기로는 마법 주문서는 같은 효과가 절대 중첩되지 않았다.
하지만 복제 주문서는 가능하다니?
정다운이 배를 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2장을 다 찢으면 포만감이 완전히 0퍼센트가 돼서 겁나 배고파지는 게 문제야. 체력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계속 먹으면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지.”
“계속 먹으면서 싸운다?”
류승우는 그 말에 불현듯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식신 오동민!
그 중학생 꼬마라면 100퍼센트가 넘어도 계속 밥을 먹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그 녀석이라면 주문서를 2장이 아니라 3장, 4장이라도 얼마든지 계속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것을 상상하자 류승우가 설레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만약에 동민이가 힘의 룬 10장을 한꺼번에 찢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 일도 안 생길 겁니다.>
“왜!?”
한창 흥미진진한 순간에 알파가 갑자기 초를 쳤다.
<이미 주문서의 특수 옵션에 마법의 위력이 ‘1레벨’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몇 장을 쓰더라도 마법의 한계가 딱 거기까지라는 말입니다.>
애초에 주문서에 있는 룬 문자가 그런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그래서 복제 주문서는 2장을 사용해야 간신히 1레벨의 위력이 되기 때문에 2장까지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었다.
“흠, 좋다 말았네.”
류승우는 김이 샌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활용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한 가지 능력을 중첩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여러 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가능할 테니 말이다.
“일단 동민이를 찾자. 전력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형이 지금은 이쪽에 있으니까, 우리가 찾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쉬울 거야.”
류승우가 항상 소지품에 보관하고 있는 미니 제단만이 고정 좌표를 지니고 있었다.
그 고정 좌표 덕분에 알파가 다른 사도들에게 이쪽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이었다.
류승우가 물었다.
“그럼 여기 계속 있자고? 그랬다간 여기에 영역 제한이 걸릴 텐데?”
“다 방법이 있지.”
“……?”
자신만만한 정다운의 모습에 류승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엔 좀 더 머리 좋게 땅을 팔 거야.”
“머리 좋게?”
아니, 아주 틀린 표현이었다.
‘머리 좋게’라고 쓰고, ‘무식하게’라고 읽어야 맞는 말이었다.
정다운이 의기양양하게 들고 있던 ‘속도의 룬(복제)’ 한 장을 더 찢었다.
쫘좍!
파아앗!
그 순간 그의 몸 위로 2장의 ‘속도의 룬(복제)’가 중첩되면서 완벽한 1레벨의 속도를 얻었다. 배는 좀 고팠지만.
정다운은 재빨리 족발을 뜯어 허기를 대충 채우고는 두 손을 번쩍 들며 광소를 터뜨렸다.
“자, 이렇게 하면 나는 전보다 더 빨리 땅을 팔 수 있게 되지! 음하하!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푹팍! 푹팍!
그 순간 그의 손에 엄청난 속도로 뜯겨 나오기 시작하는 구름들!
그 속도가 진짜 엄청났다!
정다운은 저번에 영역 제한에 걸려서 한 번 실패했던 계획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최대한 땅굴을 넓게 키워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기 쉽게 하려는 것!
물론 사람들보다 먼저 온갖 문어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류승우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자 얼마 후, 싫은 소식이 들려왔다.
[낙원의 영역이 제한됩니다.]
“결국 시작된 건가!”
같은 장소에 오래 머물러 있었더니, 그들을 쫓아내기 위한 미세먼지들이 득실득실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다 방법이 있다니까!’
정다운이 머리 위로 두 손을 뻗으며 눈을 번뜩였다.
그 손끝에 천장이 닿은 순간, 전투 중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카리스마가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아무리 미세먼지가 내 앞을 가로막아도! 하늘을 뚫어 버려 환기하면 된다! 그것이 나의 흙 뭉치기다! 흙 뭉치기!”
쿠콰콰콰!
그 순간 머리 위를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던 모든 천장의 구름이 그의 두 손에 뜯겨져 나왔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그러자.
화아악!
“아아아……!”
눈부시게 밝은 빛이 정다운과 함께 있던 일행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천장 너머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환한 하늘이 한 방에 뻥 뚫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상으로 향하는 구멍이 뚫린 순간.
후와악!
사방에서 몰려오던 연보라색의 먼지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위로 빨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미세먼지, 아니 먼지 구름이 환기되고 있어!”
“역시 정다운이다…….”
류승우는 진심으로 감격했다.
천장이 사라졌다.
어두운 땅굴 속을 헤매던 지난 며칠.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도 절대 도달할 수 없었던 환한 하늘을 정다운이 멱살을 잡고 강제로 끌고 와 버렸다.
그리고 환한 빛의 조명 한가운데 선 정다운이 상쾌하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자, 이러면 문제없지? 그럼 여길 중심으로 땅속을 다 파 버릴 테니 괴물이나 잡고 있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