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72화>
학교에 보면 각 반마다 꼭 한두 명씩은 특별한 방향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친구들이 있다.
정다운 어린이(10살)도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모 초등학교 3학년 3반.
정다운의 담임 선생님은 한창 학생들에게 반성문을 써 오게 시키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이유도 참 다채로웠다.
숙제를 안 해 와도 반성문.
복도에서 뛰어도 반성문.
머리가 길면 단정치 못하다고 반성문.
그래서 삭발을 했더니 반항하냐며 반성문.
수업 중에 떠들어도 반성문.
짝꿍이 떠들어도 옆에서 안 말렸다며 반성문.
교실이 너무 시끄러우면 조용하던 학생들까지 합쳐서 전체 반성문.
심지어 반성문의 내용이 부실하면 전체 반성문 2장 추가…….
세상을 살다 보니 반성할 일들은 너무나 많았고, 반성할 일이 없는데도 반성하기 위해 학생들은 점점 창의력 대장이 되어 갔다.
그 결과, 나중에 계산해 보니 학생들은 한 사람당 1년에 200장 이상씩은 꾸준히 반성문을 써야 했다.
하지만 반성문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선생님께 반성문을 검사 맡으러 가는 일이었다.
그냥 검사 도장만 쾅 찍어 주면 되는 일인데, 선생님이 그때마다 꼭 호된 훈계를 해 주고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두 번 혼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렇게 반성문의 홍수 속에서 모두가 지쳐 가던 어느 날.
명탐정 정다운 어린이(10세)는 소름끼치는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헉! 이럴 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힘든 건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선생님 쪽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학생 수 총 40명!
한 명당 반성문 총 200장 이상!
이 말은 즉, 선생님이 검사해야할 반성문은 무려 8000장이나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 많은 걸 일일이 읽고 혼내야 하는 선생님 입장에선 정말 어마어마한 물량이었고, 검사 도장을 찍는 팔에도 근육통이 올 정도였다.
이쯤 되면 누가 어떤 반성을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몇 장을 검사해야 하는지조차 가늠이 안 됐다.
수업 준비도 바쁜 판국에 말이다.
‘아하! 어쩐지 반성문 검사할 때마다 화가 나 계시더라니! 서로 힘들었구나! 안 되겠어. 내가 도와 드려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착한 어린이 정다운은 선생님의 고통을 덜어 드리기로 결심했다.
친구들의 반성문에 자신이 선생님 대신 검사 도장을 찍어 준다면 어떨까?
선생님과 ‘똑같은’ 도장으로 말이다.
‘지우개를 깎아서 검사 도장을 똑같이 만들면 될 것 같은데?’
그는 정말 착한 어린이였다.
자신의 계획대로만 되면 선생님은 검사하는 수고가 줄어드니까 좋고.
친구들은 선생님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어서 좋고.
모두가 윈윈 아닌가!
순서는 간단했다.
<지우개 도장 만들기>
1) 검사 도장이 찍혀 있는 반성문 종이를 예쁘게 오려 낸다.
2) 종이를 뒤집어 판판한 지우개 위에 꼼꼼히 풀로 붙인다.
(도장의 형태를 거꾸로 뒤집어 놔야, 나중에 도장을 찍었을 때 방향이 원래대로 나온다.)
3) 종이가 풀에 젖어서 반투명해지면, 뒤집어도 도장의 형태가 반대쪽에서 잘 비친다.
(부족하면 물을 더 적신다. 이 과정에서 종이가 너무 얇아 물에 불거나 찢어지면 다른 방법도 있음.)
4) 도장 모양을 뺀 나머지 부분을 커터칼로 살살 깎아 낸다.
4) 다 깎으면 지우개 도장 완성!
요약하자면, 지우개로 만드는 판화 작업이었다.
하지만 정다운 어린이는 ‘판화’가 뭔지도 모르고, ‘음각’에 대한 개념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잔머리를 굴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잔머리는 딱 여기까지였고, 그 후부턴 숱한 실패와 노가다를 통해 보다 완벽한 완성을 위해 고독한 싸움을 거듭해야 했다.
정다운은 결국 5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포장도 안 깐 새 지우개를 5개나 버리고 나서야 마침내 완벽하게 선생님의 도장을 위조할 수 있었다.
‘우와! 됐다!’
그는 크게 기뻐했다.
종이에 찍어 보니 정말 감쪽같았다!
하지만 금단의 비술에 도전한 대가는 가혹했다.
정다운 어린이는 결국 그 후유증으로 이틀을 꼬박 손과 어깨의 근육통으로 끙끙 앓아야 했다.
부모님은 성장통이구나 좋아했지만 오해였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정다운은 반 친구들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우와아아!’
‘다운이 만세!’
그는 셀럽이 되었고, 만인에게 지우개 장인의 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매일같이 고기반찬과 햄을 바쳤으며, 그가 등장하면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매일매일 그를 향한 찬양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만든 지우개 도장은 선생님께 혼나지 않는 프리패스 카드였으며.
아무렇게나 반성문을 써도 통과되는 백지 수표나 다름없었다.
‘이야! 내 덕분에 모두가 행복해졌어! 선생님도 편해지셨고!’
정다운 어린이는 행복한 미소로 씨이익 웃었다.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착한 일은 언제나 뒤에서 해야 멋진 법.
선생님은 자신의 선행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의미 없는 반성문들을 수도 없이 남발했던 터라, 몇 장쯤은 검사를 덜 해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나중에 문득 생각나서 왜 검사받으러 안 오냐고 애들을 다그쳐 봤자, 당당하게 검사 도장을 보여 주기만 하면 끝!
그러면 선생님도 ‘내가 깜빡했나?’ 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며 넘어갔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정다운은.
걸려서 겁나 혼났다.
‘흐어엉! 잘못해쩌여……!’
아주 많이 혼났다.
‘내일 당장 부모님 모시고 와! 경찰 아저씨도 부를 거야!’
‘히이익! 경찰 아저씨는 안 돼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참교육의 현장이었다.
정다운 어린이는 악마가 된 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결국 눈물 콧물을 펑펑 쏟으며 반성문을 30장이나 써야 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경찰 아저씨는 결국 오지 않았으니, 훗날 생각해 보면 그 선생님은 참으로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참된 교육자가 아니었을까.
그저…… 반성문을 몹시 사랑하던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였을 뿐.
* * *
그리고 다시 오늘이 되어.
그 착한 어린이는 커서도 착하고 순수한 어른이 되었고, 오랜만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결국 제가 금기를 어겨야 할 것 같습니다!’
경찰 아저씨가 무서워서 오랫동안 봉인해 두었던 금단의 비술을 그가 결국 깨우고 말았다.
그날의 반성문 종이는 마법 주문서로 대체하고.
지우개는 목판이 되어 세밀하게 깎여 나갔다.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검’이라는 글자 하나만 조각할 때와는 수준이 달랐다.
꼬부랑거리는 룬 문자들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조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난이도였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입이 바짝 바짝 말랐고, 목판을 깎는 정다운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이게 아니야!”
뽀각!
나무 깎는 노인이 된 정다운이 갑자기 버럭 소리치며 일어나 깎고 있던 목판을 무릎치기로 쪼개 버렸다.
“정다운 씨, 이거 정말 가능하긴 한 겁니까?”
휴이는 정다운의 행동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5개를 망쳤다.
세 번은 실수였고, 두 번은 사고였다.
조각칼이 목판 속에 숨어 있던 옹이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룬 문자가 파손되고 만 것이다.
마법 주문서의 효과를 톡톡히 누려 본 휴이의 입장에선 너무나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정다운의 눈빛에서 마법에 대한 한과 집착이 독기가 되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아아!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여분은 아직 많으니까 휴이는 앞이나 잘 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현재 정다운을 태우고 다니는 구름 골렘은 최대한 흔들림 없이 스르륵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휴이의 역할은 그 앞에 나타나는 괴물 문어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었다.
정다운의 목판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뽀뀨?”
“뿌?”
뽀뀨는 골렘 위에 꽂혀 있는 문어 지팡이의 머리 위에 낑낑 올라가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생체(?) 쿠션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루갈은…… 시골집 개처럼 커다란 족발 뼈를 입에 물고, 근엄한 표정으로 열심히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크릉 크릉!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어떻게 음식에 버프 마법이 걸려 있지? 족발을 먹으니 호랑이 힘이 샘솟는군. 물론 나는 늑대지만.]
“루갈, 너는 왜 놀고 있어? 먹었으면 밥값 좀 하라고.”
[크르렁! 잊지 마라. 나 루갈은 네놈들 편이 아니다.]
정다운의 말에 루갈이 이를 드러냈다.
족발 뼈를 입에 가로로 길게 물고 있는 채로.
그 모양새가 영락없는 집 지키는 개 같아서, 정다운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아, 맞다! 루갈, 너 냄새 잘 맡지? 네 개코로 내 동료들 냄새 좀 찾아주면 안 될까?”
[크릉. 뭐…… 그 정도라면 족발값으로 충분하겠군.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내 코는 개코가 아니라 늑대코다.]
루갈은 단호하게 말하며,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물론 입에는 여전히 족발 뼈를 문 채로.
족발 양념이 잘 배어서 빨아 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맛 좋은 뼈였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갑자기 알파가 의문을 제기했다.
<목판화를 찍어서 마법서를 복제하겠다는 계획까지는 이해했지만, 잉크는 어쩌실 계획입니까?>
알파는 처음부터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 주문서에 룬 문자를 적을 때는 특별한 잉크가 필요했다.
마녀들은 여러 가지 시약을 조합해서 마력이 깃든 잉크를 제조하곤 했다.
“아, 그거? 이거면 되지 않겠어?”
<……?>
정다운이 꺼내든 건 바로 그동안 열심히 뭉쳐 놓은 ‘구름구슬’이었다.
‘마력’이 깃들어 실체화된 구름 말이다.
“구름이라는 게 원래 수증기와 먼지로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구름은 마력도 이미 들어 있다니까 딱이잖아?”
<……!>
엄청난 깨달음!
정다운은 알파가 보는 앞에서 보라색의 구름구슬을 여러 개 합쳐서 네모반듯한 먹과 벼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벼루 안에 물을 조금 담고, 그 앞에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지체 높은 선비 같은 표정으로 그윽하게 먹을 갈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알파도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다운 선비가 끈기 있게 먹을 계속 갈자, 벼루 위에 곱디고운 보라색의 ‘잉크’가 점점 스며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색이 점점 진해질수록 잉크에 담긴 마력의 농도도 점차 진해져 갔다.
심지어 그 마력의 농도는 원본 마법 주문서에 깃들어 있는 마력보다도 훨씬 진해지고 있었다.
이로써 목판 작업을 위한 재료가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이제 목판만 다 깎으면 끝이었다.
그리고…….
* * *
[크릉. 이쪽이다.]
“오, 역시!”
루갈이 방향을 잡아 주자, 그들은 거침없이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시체가 한 구 쓰러져 있었다.
“어? 저 사람은?”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헉! 정다운 씨! 접니다!”
“……촌장님?”
정다운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시체의 정체는 바로 오창석 촌장이었다.
도플갱어의 왕에게 수명을 일부 빼앗기면서 반백의 노인이 되었던 그는, 그때 얻은 ‘죽은 척하기’ 스킬로 잠시 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죽은 척 스킬을 쓰게 되면 시체를 뜯어 먹는 괴물을 제외하면 어느 괴물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까.
“허허허! 여기서 정다운 씨를 만나서 너무 다행입니다! 마침 주문서도 다 떨어졌었는데!”
헐레벌떡 달려오는 오창석의 몰골은 흙투성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신기한 우연이군요.>
참으로 운이 좋은 양반이라고, 알파는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운도 우연도 아니었다.
그의 ‘눈치’ 스킬이 알려주는 본능을 따라 걷다 보니 그 길 끝에 정다운과 마주치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를 발견한 순간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정다운.
“진짜 절묘한 우연인데?”
휴이 번스타인과 오창석 촌장.
하필이면 마주쳐도 도살자의 칼을 지니고 있는 두 명과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된 정다운이었다.
이들은 흡혈 무기 덕분에 마법 주문서를 원 없이 써 볼 수 있는 참가자들이었다.
물론 도살자의 칼이야 정다운도 많이 들고 있어서 누굴 만나도 똑같았지만.
무엇보다 오창석 촌장의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과 운만큼은 류승우조차 인정하는 수준 아니던가.
게다가 적당히 나쁘고 적당히 얄미운 사람이라서 양심의 가책도 덜했다.
‘짝퉁 주문서’를 가장 먼저 실험해 보기에는 말이다.
정다운은 싹싹하게 웃으며 오창석 촌장에게로 달려 나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이고, 촌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앞으로 같이 다니시죠! 족발 드실래요?”
“헛?”
주춤.
오창석 촌장은 그의 갑작스런 환대에 순간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그거……. 손에 들고 계신 게 뭡니까요?”
정다운의 두 손에는 마침 ‘완성된 목판’과 ‘빈 마법서’가 들려 있었다.
마녀의 서재에서 잔뜩 챙겨 둔 이 마법서들은 애초부터 마법의 룬 문자를 쓰기 위해 제작된 특별한 종이로 되어 있었다.
이로써 진짜 모든 재료가 다 모였다.
인체 실험을 할 재료까지.
“뭐긴요. 촌장님을 위한 선물이죠.”
“…….”
8개의 다리를 꿈틀거리는 문어 골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다운의 모습은 마치 미치광이 문어 박사 같았다.
연구를 위해서 자신의 인성과 양심을 악마에게 다 팔아 버린.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오창석 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