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70화>
골렘이란 무엇인가.
골렘의 장점은 당연히 압도적인 무게에서 오는 강력한 ‘파괴력’과 핵만 무사하다면 끝없이 재생되는 ‘무한 체력’이다.
그렇다면 골렘의 단점은 무엇일까?
그 또한 골렘의 무게다.
골렘은 무거워질수록 움직임이 둔해지고 반응 속도도 느려진다.
멀리서 달려오더라도 샥 피해 버리면 그만이고, 메이플처럼 덩치가 작고 민첩한 놈들을 상대로는 도리어 농락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정다운은 자주 애용하는 코끼리 골렘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다리를 6개로 늘리고 속을 텅 비워서 최대한 무게를 줄여야 했다.
항상 타고 날아다니던 거대 문어 골렘 또한 부유석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엄청나게 느림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 구름을 뭉쳐 탄생한 문어 골렘 버전2는 달랐다.
기존의 골렘들과는 차원이 다른 혁신적인 골렘이었다.
이른바 골렘 2세대!
일단 구름은 가볍다.
따라서 구름으로 뭉친 골렘의 무게도 가벼웠고, 그만큼 민첩한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골렘이 태생적으로 지닌 약점이 원천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 대신 기존의 장점이 약점으로 변했다.
가벼워진 만큼 무게에서 오는 골렘의 파괴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것.
하지만 정다운은 메이플의 꼬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볍고 긴 문어 골렘의 다리를 채찍처럼 후려친다면 어떨까?
게다가 그 채찍이 메이플의 꼬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두껍다면?
지금 그 결과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전부 쓸어버려!”
쐐애액! 퍽!
“뿌엑!”
쐐액! 퍼벅!
“뿌익!”
덤벼드는 괴물 문어들이 안타당한 야구공처럼 호쾌하게 뒤로 뻥뻥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아자! 또 홈런이다!”
정다운을 태운 문어 골렘2는 8개의 다리를 사정없이 난도질하며 괴물 문어들의 뒤통수를 짝짝 후려치며 쫓아다녔다.
“뿌……!”
괴물 문어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바빴다.
반격? 그게 뭘까? 먹는 걸까?
정통으로 맞았다간 기절할 정도로 아프고, 빗맞아도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따가웠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다리에 휘감겨 자비심 없는 패대기로 이어졌다.
무조건 후퇴만이 살 길이었다.
게다가 골렘 앞에선 자신들이 들고 온 석궁도 방패도 맥을 못 췄다.
유일한 약점은 위에 타고 있는 정다운밖에 없었는데, 석궁을 쏘면 골렘 다리를 나란히 모아 가드를 올려 막아 버리고.
이쪽도 방패 뒤로 숨으면 꿀밤을 꽝 때리고는 손에 든 장비만 쏙쏙 빼앗아 갔다.
게다가 그 무기들은 고스란히 골렘의 그림자 밑에 숨어서 따라오는 그림자 하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음하하! 이제 우리도 석궁이 있다! 도망치는 놈들 전부 잡아!”
“먀옹!”
슈슈슈슉!
정다운은 몸소 그림자 궁수들에게 석궁을 쏘는 법을 시범 보여 줬다.
석궁은 활보다 훨씬 다루기가 쉬웠다.
화살을 장전하고 총처럼 발사하면 끝.
무엇보다 화살이 일직선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과녁’을 보는 눈과도 궁합이 찰떡이었다.
지난날 지서연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우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석궁은 곧바로 실전에 써먹을 수가 있을 정도로 최첨단 무기였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석궁에 들어가는 전용 화살(볼트)의 숫자였는데, 문어들에게 일일이 빼앗아도 숫자가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다운이었다.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지!”
전투 중에 딱히 할 일이 없는 정다운은 석궁 화살을 본떠서 기존의 석화 화살들을 열심히 개조해 나갔다.
“아하, 석궁 화살은 활보다 길이를 좀 더 짧게 깎아야 되는구나. 그리고 이 끝에 돌뱀의 독니만 새로 꽂으면? 짠, 완성!”
[…….]
화살 깎는 노인이 된 정다운의 모습을 루갈은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마법 주문서와의 이별을 이겨 내 보려는 몸부림이 너무나 애잔했다.
하지만 속마음이야 어쨌든 간에, 지금의 정다운은 천하무적이었다.
대왕문어들이 단체로 덤비지 않는 이상에는 이 땅굴 속에서 그를 위협할 존재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땅굴을 돌다가 처음으로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촤촤촥!
“하압! ……어? 정다운 씨?”
“휴이?”
나오라는 용의 사도는 안 나오고 한창 열심히 대왕문어를 잡고 있던 휴이 번스타인과 길에서 마주쳤다.
그런데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려던 정다운의 표정이 다시 슬픔에 잠겼다.
화르륵!
휴이의 검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염의 룬.’
게다가 ‘증폭’을 하지 않았는데도 대왕문어의 공격들을 빠른 속도로 전부 피하고 있었다.
‘속도의 룬.’
심지어 그는 대왕문어의 다리 끝을 손으로 덥석 잡아서 엄청난 힘으로 집어 던졌다.
“흐랴압!”
콰쾅! 뿌우!
‘힘의 룬…….’
휴이는 무려 3가지 마법 주문서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세상 부러웠다.
주문서 한 장을 찢을 때마다 33퍼센트의 체력이 소모되었지만, 그에겐 마침 소모된 체력을 빠르게 충전할 수 있는 무기가 있어서 아주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크릉. 도살자의 칼을 유용하게 써먹고 있군. 저런 흡혈 무기가 있다면, 주문서를 시간 차를 두고 사용한다 했을 때 최대 4개까지는 가능하겠어.]
제법이라며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루갈.
그 말에 정다운의 표정은 더더욱 슬픔에 잠겼다.
‘낄낄. 도살자의 칼이 많으면 뭐 해요. 고기나 썰겠지.’
문득 환청이 들렸다.
이제는 곁에 없는 토끼의 비아냥이 저 하늘 멀리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토끼야……. 그곳에선 편안하니?
[멋대로 죽이지 마셈!]
굳이 토끼에게로 귓말을 보냈더니, 토끼가 발끈하며 대꾸를 해 왔다.
[아, 그리고! 나 방금 신전 적당한 구석에 주차했어요! 알파 님한테 물어보면 이쪽 방향을 화살표로 알려 줄 거임. 나도 들어가게 구멍 좀 뚫어 봐요. 그리고……!]
쫑알쫑알.
이하 생략.
한번 말문이 트이자, 토끼가 그동안 쌓아 둔 수다를 엄청나게 보내오기 시작했다.
정다운은 적당히 대꾸해 주며 휴이와 합류했다.
용의 사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친분이 있는 참가자를 만나서 반가웠다.
휴이는 자신이 꿨던 ‘마녀의 꿈’에 대해 정다운에게 얘기하며 ‘낙원’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었다.
“정다운 씨, 꿈속에서 이 낙원은 ‘마녀들의 낙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겨우 문어 따위가 아닙니다.”
“꿈속에서 뭘 봤는데요? 뭐 기억나는 것 좀 있어요?”
그들은 이미 이와 똑같은 대화를 낙원에 오기 전에 한 번 했었다.
도플갱어의 왕에게 선별되었던 류승우와 휴이 번스타인 두 사람은 참가자들 중 유이(有二)하게 ‘마녀의 꿈’을 꾼 선별자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꿈이라는 게 그렇듯이 아무리 생생했던 꿈이라도 잠에서 깨어나면 점점 그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마치 어떤 벌레가 사각사각 꿈을 갉아먹듯이.
마치 꿈을 통해 알게 된 세계의 비밀을 누군가가 다시 억지로 숨기려는 듯이.
그들이 꾼 ‘마녀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마녀라 박해받던 가엾은 소녀가 그들에게 보여 주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은 어느새 다시 보랏빛 안개에 가려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낙원에 도착하니까 꿈에서 본 기억들이 불쑥불쑥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휴이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리고 동시에 저와 류승우 씨가 그런 꿈을 꾸게 된 이유도 깨달았습니다.”
“이유가 뭔데요?”
“바로…… 사명입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겁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먹을 불끈 쥐는 휴이의 모습은 첫인상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간 힘든 일들을 겪고 많이 어두웠던 성격이 마녀의 꿈 이후로 숭고한 사명을 이어받은 용사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당찬 표정을 보며 루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앞으로는 참가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거지. 나처럼 종말의 용에게 코 꿰인 도우미들이 넘쳐 나는 건 아니니까.]
“아, 요약하면 도우미 대신이라는 거네. 유령 회사인 줄 알았더니 일손도 부족했구나, 너네.”
[뭐, 그런 거다. 크릉.]
“……?”
시무룩.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자 휴이 머쓱타인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받았다며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숭고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회사(?)의 속사정을 괜히 들어 버렸다.
“흠흠.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낙원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꿈을 더듬어 보면 최종 유적지는 그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하, 높은 곳이요? 난 지금 내려가는 중인데. 그럼 계속 수고해요. 이만 바이, 짜이찌엔.”
“네? 자, 잠깐만요! 정다운 씨?”
척, 하고 쿨하게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가려는 정다운이었다.
휴이가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다.
“아니, 왜 내려가십니까? 밑으로 내려가 봐야 괴물들만 가득할 뿐인데요!”
“동료들 찾으려고요. 와, 진짜 이번엔 절대로 혼자 안 싸울 거야. 오죽하면 내가 종말의 용하고도 혼자 싸웠다니까요?”
결연한 눈빛으로 의지를 불태우는 그의 모습에 휴이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일반적인 참가자인 휴이는 종말의 용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관련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정다운과 헤어지는 건 아주 큰 손실인 건 확실했다.
거대한 문어 골렘2를 타고 땅굴을 종횡무진하는 정다운과 함께라면, 둘이서도 거뜬히 낙원을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정다운이라면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
휴이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그가 묘안을 짜냈다.
“그럼 차라리 이러시면 어떻습니까? 더 내려가지 마시고 이 부근에서 저와 같이 사냥을 하면서 동료분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시는 겁니다. 무턱대고 내려갔다간 길이 더 꼬일 수도 있습니다.”
“흠. 하긴…….”
길이 꼬인다는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어 골렘2에서 내려왔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척.
“뿌?”
정다운은 계속 들고 다니던 문어 지팡이를 바닥에 푹 꽂으며 말했다.
“여기가 기준.”
“기준…… 입니까?”
“네, 기준. 지금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최대한 땅굴을 넓게 키우겠어요.”
“……!”
“뿌웃!?”
정다운의 입에서 땅굴을 사방으로 무한하게 확장하겠다는 선언이 튀어나왔다.
이곳을 기점으로 자신만의 문어 왕국을 세우겠다는 위풍당당한 선포에 문어 지팡이는 당연히 자신이 2인자일 거라는 망상에 부풀었다.
정다운은 분명 이러는 편이 동료들이 이곳으로 찾아오기가 훨씬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를 휴이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문어들도 더 많이 몰려오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지금은 휴이가 있으니까.”
휴이의 염려에 정다운이 환하게 웃으며 지금까지 모아 둔 주문서를 전부 꺼냈다.
그걸 전부 휴이에게 넘겨주자 휴이는 당황했다.
“주, 주문서?”
“어차피 도살자의 칼도 있겠다, 이참에 한번 원 없이 주문서나 써 보세요. 대리 만족이라도 해 보게.”
“……!”
역할 분담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그림벨!”
“먀옹?”
“냐앙.”
“1호기는 왼쪽, 2호기는 오른쪽. 나는 중앙을 맡는다! 자, 파자.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니야아!
그들이 셋으로 나뉘어 땅을 파기 시작하자 땅굴이 엄청난 속도로 무럭무럭 넓어져 갔다.
그 광경에 휴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정다운 씨! 너무 넓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에이, 알아서 할게요. 원투 데이 땅 파는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기둥 남겨 놓고 있어요. 휴이는 문어나 잡아요.”
뿌우!
뿌우우!
이미 사방에서 완벽하게 무장한 문어들이 바글바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다운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휴이라면 문제없으리라.
휴이는 사명을 받았으니까.
마법 주문서도 쓸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멋지게 살아남아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마법 주문서도 엄청 많이 쓸 수 있으니까.
흥.
* * *
“크하아압! 하아앗!”
낙원의 땅속에서 비명에 가까운 휴이의 기합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던전을 관통하는 한 줄기 메시지가 있었다.
[낙원의 영역이 제한됩니다.]
“영역이 제한된다? 무슨 말이지?”
[크릉. 날 쳐다보지 마라. 나도 낙원은 처음이니까.]
정다운이 의아해하자 루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다 어떤 장면을 보고 흠칫 표정이 굳었다.
[허, 설마 이런 뜻이었나!]
쿠르르르……!
“어!?”
“헉! 저게 무슨!?”
그 순간 정다운도 휴이의 표정도 루갈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쿠르르르……!
저 앞에 길게 이어진 땅굴 속에서 연보라색 흙먼지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으아아악……!”
그리고 그 흙먼지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참가자들의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런 젠장! 땅굴이 막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