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69화>
심호흡 한 번.
두 번.
그리고.
“흐읍! 다시 도전!”
쫙쫙! 쫙!
정다운이 두 번째로 마법 주문서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화아앗!
빛을 뿜어내며 튀어나오는 룬 문자들!
그리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
“아, 왜 또 먹통이냐고! 대체 뭐가 문제야? 이거 설마 문어 전용인가?”
“뿌우?”
쓸데없는 낭비 말고 그냥 자기나 달라는 듯한 문어 전사의 건방진 표정에 꿀밤을 때려 주었다.
꽁!
“뿍!?”
사실은 그냥 쳐다본 거였다.
세상 억울한 기분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문어 전사였다.
<일단은 더 낭비하지 말고 모아 놓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동료들을 만나면 한번 사용해 보라 하는 게 좋겠어. 나만 안 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톡방에 귓말이 올라왔다.
<윤진수 : 형님들! 우리가 주문서를 새로 찾아냈어요! 그런데 직접 찢어 봤더니 이거 효과가 죽이는데요? 움직이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어요!>
“야이! 더럽게 치사한 던전 놈들아! 진짜 나만 안 되는 거냐!”
정다운은 단단히 심술이 났다.
그의 기분은 짐작도 못 하고 동료들은 계속 그를 약 올렸다.
<류승우 : 맞아! 그런데 나도 써 보니까 아무래도 마법마다 지속 시간이 있는 것 같아. 아껴서 써야 돼.>
<윤진수 : 넵! 그런데 이거 부작용이 있는데요? 속도가 늘어나면서 체력 수치의 3분의 1이 팍 줄어들었어요!>
“뭐? 3분의 1이면 33퍼센트나?”
정다운은 깜짝 놀랐다.
저 말은 주문서 3장만 찢으면 목숨이 1퍼센트만 남는다는 것 아닌가.
“뿌힛.”
옆에서 문어 전사가 비웃음을 터뜨리다가 애써 표정을 숨겼다.
어째 그 표정이 ‘쯧쯧, 미천한 인간이란.’ 같은 느낌이라 또 꿀밤을 때려 주었다.
꿍!
“뿍!?”
물론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물렁한 머리를 때리는 손맛이 중독적이었다.
<그럼 최대 2개까지만 동시에 쓸 수 있다는 말이군요. 주문서의 효과가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양날의 검인 것 같습니다.>
“제길, 부럽다. 하나라도 써 보고 싶다.”
정다운은 원통했다.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보물 상자만 해도 벌써 10개가 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보물 상자가 많은 던전은 처음이었다.
던전인지 보물섬인지 헷갈릴 지경.
물론 그 안에 매번 마법 주문서가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확률적으로 별 쓸모가 없는 장비 아이템도 많이 들어 있어서, 이거저거 빼고 나면 현재 그의 손에 남은 마법 주문서는 총 4개였다.
[마법 주문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힘의 룬(1레벨)
[마법 주문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속도의 룬(1레벨)
[마법 주문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화염의 룬(1레벨)
[마법 주문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보호의 룬(1레벨)
“기껏 종류별로 남겨 놨더니, 이거 언제 쓸 일이나 있을까? 알파, 이거 제물로 바치면 좀 쓸 만해?”
<큰 소득은 없을 겁니다. 주문서에 생명 에너지가 많이 깃들어 있었다면, 사용할 때마다 체력을 빼앗길 리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화장실 휴지로 써 버릴까.”
질감이 부들부들해질 때까지 잘게 구기고 비벼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아, 그렇지! 이럴 땐 역시 척척박사님을 불러야지!”
그는 목에 걸고 있던 늑대인간의 수호부를 무전기처럼 입에 댔다.
“루갈! 잠깐 와 봐!”
루가르르르-!
와보아르르-!
파아앗!
수호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은빛 갈기의 늑대인간이 이를 드러내며 나타났다.
[크르렁! 바쁘다니까 왜 자꾸 부르는 거냐!]
척.
[크릉?]
순간 루갈의 동작이 멈췄다.
다짜고짜 정다운이 내민 족발 한 덩이에.
“저번에 너 없어서 따로 챙겨 둔건데, 먹으라고 불렀지.”
[……요망한 돼지고기군. 나를 침이 고이게 하다니.]
애써 침착하게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족발을 받아 드는 루갈이었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소지품에서 비빔 막국수도 한 접시 꺼내 주며 말했다.
“자자, 공사가 다망하신 분인데 식사나 하면서 계속 얘기하자고.”
어느새 루갈 앞에는 좌식 탁자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결국 그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은 루갈은 족발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와구와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크릅! 캬륵! 캬웁!]
정신없이 먹는 와중에 그의 뒤꽁무니에 달린 풍성한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크릉. 그나저나 여긴 설마 낙원인가?]
“다 먹었다고 갑자기 차분한 척하지 마.”
[꺼억.]
루갈은 뻔뻔한 표정으로 이를 쑤시며 사방에 가득한 연보라색 구름을 구경했다.
[흠. 낙원 안으로 들어온 건 또 처음이군. 항상 밖에서만 봤는데.]
수호부가 아니었다면 루갈은 이곳에 들어올 방법도 명분도 없었다.
정다운은 그에게 지난 사정을 전부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가 마법 주문서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 그걸 왜 모르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당연하다고? 왜?”
[네놈 같은 정화 능력자에겐 어지간한 저주나 독이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대로 체력을 갈취해 가는 주문서가 통할 리 있을까?]
“……뭐?”
전혀 생각도 못 한 대답에 정다운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화 (상급 1레벨)
- 대상을 정화한다.
- 원거리 가능 (방출형)
- 범위 공격 가능
- 모든 독에 면역이 된다.
정다운은 할 말을 잃었다.
모든 독에 면역이 된다?
이 말이 설마 그렇게까지 확대해석이 된다고?
“그게 무슨 억지야? 주문서가 무슨 독도 아니고.”
[독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마법사가 아닌 인간에겐. 독에 걸리면 참가자들은 체력 수치가 떨어지지. 주문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체력을 소모해야 마법이 발현되는데, 정화 스킬이 그런 상황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는 말이었다.
루갈의 담담한 설명에 정다운은 있는 힘껏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이 정화 스킬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만났던 던전 도우미들이 왜 항상 자신의 정화 스킬을 비웃었는지를.
당연했다.
이 빌어먹을 스킬은 힘이 없는 극초반에도 살아남기 힘들었지만, 뒤에 와서는 더더욱 버티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방에 넘쳐나는 마법 주문서들을 습득하더라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할 테니까.
“아, 몰라! 젠장!”
[크릉?]
“뿌?”
“어차피 내가 사용 못 할 바에는 아무도 사용 못 하게 하겠어!”
마법 주문서와 정화 스킬에 단단히 배신을 당한 정다운은 결국 크게 삐뚤어지고 말았다.
탐욕스러운 도굴꾼으로 돌변한 것이다.
“내놔! 다 내놔! 주문서를 돌돌 말아서 전부 똥 닦는 휴지로 써 줄 테다!”
“뿌뿌뿌- 뿌우우!”
그는 마법 주문서고 뭐고 간에,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싹싹 핥아 먹고 쪽쪽 빨아 먹을 기세로 땅굴을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각대처럼 굳어 있는 5다리 문어 전사의 다리가 거추장스럽다며, 하나만 남기고 4개를 뚝뚝 부러뜨리고 셀카봉처럼 들고 다녔다.
멀리서 보면 동그란 문어 머리가 달린 커다란 막대 사탕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걸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생겼다고 우겼다.
“앞으로 네 이름은 문어 지팡이다!”
“뿌…….”
반쯤 미쳐서 폭주하는 그의 모습에 문어 전사, 아니, 문어 지팡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미친놈이었던 인간이 정신줄을 아예 놔 버린 것이다.
[크릉, 미치광이가 따로 없군.]
<마법 주문서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충격이 컸나 봅니다.>
어차피 낙원에 들어온 김에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며 구경하던 루갈은 알파와 대화하며 혀를 찼다.
“다 잡아! 더 잡아! 아하, 그래! 문어들을 항아리에 넣어서 소지품에 보관하면 딱이겠네? 아싸, 신난다!”
그는 수산물 시장에 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문어들을 잡고 돌아다녔다.
그럴수록 쓸모라고는 화장실에서밖에 쓸데가 없는 주문서가 차곡차곡 모여 갔다.
일반 아이템들도 야금야금 모여 갔다.
문어 전사, 아니, 문어 지팡이가 길을 안내하는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그 속도는 어마무시했다.
반면에 현재 낙원에 있는 다른 참가자들은 구불구불한 땅굴 속을 헤매는 일이 너무 낯설어서 애를 먹고 있었다.
그중에는 보물 상자를 많아 봐야 2개 이상 발견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체력 소모로 인해 마법 주문서를 최대 2개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그 속도가 지극히 정상적이긴 했다.
참가자들은 괴물 문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든 상황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마법 주문서를 찢어서 난관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바로 지극히 정상적인 패턴의 낙원 공략일 터였다.
하지만 정다운은 달랐다.
“뿌웃!”
“뿌우!”
정다운의 소란을 듣고 수십 마리의 문어 전사들이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대왕문어보다는 작지만 두 발로 일어서면 사람 정도의 키를 가진 문어 전사들.
놀랍게도 녀석들의 머리에는 눈구멍만 뚫은 항아리가 투구처럼 쓰여 있었다.
“와, 저러면 머리가 완벽하게 보호되겠는데? 항아리 유용하네! 나도 써 볼까?”
그들의 등장에 정다운이 기발하다며 박수를 쳤다.
“역시 똑똑한 녀석들이네!”
그는 이미 마녀의 일기장에서 ‘문어’에 대해 나온 내용을 본 후였다.
[문어]
머리가 크면 그만큼 머리도 똑똑하겠지?
그럼 문어는 얼마나 똑똑한 걸까?
짧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
낙원의 문어들은 정말 머리가 좋았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모든 내장기관이 몰려 있는 머리를 항아리나 투구로 완벽하게 보호했다.
머리만 지키면 다리는 얼마든지 재생이 되니까 실로 완벽한 무장이었다.
그러고는 여러 개의 다리로 석궁과 칼, 방패를 동시에 들고 다녔다.
그렇게 근접과 원거리, 방어구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상황에 맞춰 다채롭게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녀석들의 손에 ‘석궁’이 들어가게 되면 정다운 입장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나왔다.
“뿌!”
앞장선 문어 대장(?)의 수신호에 문어 병사들이 전략적인 움직임을 펼쳤다.
어디서 무슨 전쟁 영화라도 보고 왔는지 움직임들이 빠릿빠릿했다.
퓨퓨퓨퓩!
“먀옹!”
퍼펑! 펑펑!
엄청나게 멀리서 날아오는 기관총 수준의 속사력에 그림자 하인들이 속절없이 터져 나갔다.
“이런!”
석궁의 위력 앞에서 정다운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지금처럼 천장이 낮고 좁은 땅굴 속에서는 활보단 석궁의 사거리가 몇 배 이상이나 길었다.
활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밑으로 떨어지지만, 석궁은 직선으로 나가기 때문에 걸릴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어 놈들이 다리가 워낙 많아서, 화살을 장전해서 발사하는 속도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그야말로 기관총 수준인 것이다.
몹시…… 탐이 나는 무기였다.
“옳거니! 저것도 빼앗자! 석궁도 다 내 꺼야! 모두 공격!”
“니야……!”
퓨퓨퓩!
퍼퍼펑!
“…….”
개뿔, 다 터졌다.
“응, 그럼 안 싸워.”
정다운은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크릉. 미치광이가 됐어도 후퇴는 즉각적이군.]
루갈이 황당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정다운은 놈들이 몰려오는 땅굴을 흙으로 막아 버렸다.
“아무래도 탱커가 하나 있어야겠어.”
[크릉. 설마 나더러 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잊지 마라. 나는 도우미다.]
“아니, 만들어야지.”
정다운은 소지품을 열었다.
마침 그 안에는 무간도에서의 전투 때 파괴된 골렘에게 회수해둔 ‘흙 골렘의 핵’이 있었다.
“설마 흙 뭉치기도 되는 구름인데, 골렘도 만들 수 있겠지?”
어차피 주변 상황도 다 파악했겠다, 적들이 들어올 만한 구멍을 다 막아 놔서 골렘을 만들 여유가 충분했다.
“흐흐, 이 몽실거리는 구름 흙으로 골렘을 만들면 어떤 느낌일까?”
정다운은 흥미로운 발명품을 연구하는 미치광이 과학자 같은 표정으로 구름 골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형태라면 이미 정했다.
“저쪽이 문어라면 이쪽도 문어로 상대해 주마!”
마침 색깔도 연보랏빛이라 문어가 딱 어울렸다.
그는 기존에 있던 문어 골렘보다는 훨씬 작게 구름 문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그란 머리 위로 구멍을 크게 뚫어 탑승석을 만들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가서 외쳤다.
“일어나라! 나의 문어야!”
번쩍!
그 순간 정다운을 중심으로 8개의 문어 다리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치광이 문어 박사가 되어 문어 지팡이를 흔들며 광오하게 소리쳤다.
“크하하! 나는 문어들의 왕이 되겠다!”
“뿌뿌뿌 뿌우…….”
그의 손에서 나팔처럼 추임새를 넣는 문어 전사, 아니, 문어 지팡이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