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68)화 (268/393)

<던전리셋 268화>

류승우의 경고는 한발 늦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이템을 노리는 괴물이 있을 거라고.

게다가 놈들이 그걸 훔치자마자 바로 찢어 버릴 거라고는 어느 누구라도 예상하지 못했다.

“뿌우!”

“뿌!”

찌직!

쫙! 쫘작!

낙원 곳곳에서 돌돌 말려 있던 ‘주문서’가 괴물 문어들의 손에 의해 펼쳐지며 가차 없이 찢어졌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시작됐다.

번쩍!

주문서가 찢어지는 순간, 그 안에 적혀 있던 마법의 글귀가 빛을 뿜어내며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고스란히 주문서를 찢은 문어들의 민둥한 머리 위로 파고들어 새겨졌다.

마치 타투(Tattoo)처럼.

파아앗!

“뿌!”

“뿌우!”

그 순간 괴물 문어들은 각양각색의 변화를 경험했다.

화르륵!

전신에서 불길이 타오르거나.

스팟!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거나.

콰쾅!

엄청난 힘이 솟구쳐 주변을 파괴하거나.

“뿌우우!”

주문서를 찢은 문어들이 갑자기 전에 없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동민 : 으악? 문어가 갑자기 빨라졌어요!>

<윤진수 : 2배는 빨라진 것 같아요!>

<지서연 : 이쪽은 힘이 강해졌습니다!>

<구호열 : 이놈은 몸에 횃불처럼 불이 붙었어!>

단톡방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맙소사! 스킬을 쓰는 괴물이라니!

아니, 그 반대가 더 충격적이었다.

괴물에게 스킬을 쓰게 해 주는 아이템이라니!

<류승우 : 모두 진정해! 침착하게 상대하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니까!>

서로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류승우는 류승우였다.

그는 문어를 상대하는 동시에 동료들을 다독였다.

<류승우 : 지금 보니까 문어가 얻은 능력은 고작 하나뿐이야! 우리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분명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류승우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류승우 : 그리고 그 놈들을 무조건 지금 잡아야 돼! 괜히 놓쳤다간 또 다른 곳의 주문서들을 노릴지도 모르니까!>

그는 모든 동료들이 동시에 같은 상황에 처해진 이 사태가 결코 우연일 리 없다고 판단했다.

우연이 아니라면 뭘까?

이런 특이한 일이 ‘낙원’에선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지서연 : 어쩐지 스테이지-6치고는 너무 난이도가 평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방식이었군요!>

이윽고 단톡방이 조용해지며 낙원 곳곳에서 각자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다운의 앞에 있던 문어는 달랐다.

뾱.

“뿌으우……!”

바들바들.

낑낑.

녀석은 주문서를 찢기 위해 안면 근육을 푸들푸들 떨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망할 놈의 석화 화살들.

이미 머리통을 제외한 몸 전체가 고슴도치가 되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주둥이로라도 물어뜯기 위해 얼굴을 쭉 앞으로 내밀어 봤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주문서에 닿지 않았다.

그 앞으로 정다운의 손이 주문서를 쏙 빼 갔다.

“그래서 이 종이를 찢으면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거지?”

“뿌욱!”

당황한 문어 전사가 먹물을 뿜었지만, 그는 느긋하게 뒤로 물러나서 주문서를 펼치고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글씨야? 내용이 전혀 읽히지 않는데? 또 격이 문제야?”

<그렇습니다. 마법에 사용되는 룬 문자입니다. 그런데 놀랍군요. 이 종이는 마법 주문서(Magic scroll)입니다.>

알파는 주문서를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마법 주문서는 원래 마녀들의 전유물입니다. 이 종이를 찢으면 룬 문자에 담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뭐? 이걸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그 말에 정다운은 번뜩이는 눈으로 주문서를 다시 쳐다봤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마법! 마법이란다!

그동안 마법사가 아니라서 겪었던 온갖 서러움과 고통, 수치, 모멸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보 확인!”

[마법 주문서]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화염의 룬(1레벨)

“역시 아이템이라 이렇게는 볼 수 있구나. 화염의 룬?”

“뿌우!”

옆에서 세상 원통한 목소리가 들려서 그가 문어를 향해 주문서를 들이대며 물었다.

“야, 이걸 찢으면 불이 나와?”

“뿌뿌!”

절대 아니라며 단호한 눈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흔드는 문어였다.

정다운이 슬픈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 아니구나. 이걸 찢으면 불이 붙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구나?”

“뿌우뿌!”

끄덕 끄덕!

문어는 대번에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신나게 끄덕거렸다.

그래, 이런 부류가 있다.

머리는 좋은데 멍청이.

지능은 높은데 바보.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찢으면 되는 거였네.”

“……!”

‘그걸 어떻게 알았지?’ 라는 표정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문어였다.

알파가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십시오. 마법사가 아닌 자가 마법 주문서를 찢게 되면 그 대가로 생명력을 바쳐야 할 겁니다.>

“생명력을 바친다고?”

<던전 참가자들의 용어로는 체력 수치가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정다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하! 그런 식이었구나!”

낙원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지 깨달은 것이다.

체력을 소모하면 스킬이 아닌 특별한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문어들보다 먼저 이 주문서를 많이 챙겨야 공략이 편해진다는 말이네. 반대로 문어들이 더 강해지면 역공을 당할 테고.”

물론 기존의 스킬을 사용하는데도 체력이 소모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을 열심히 움직이니까 지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주문서는 체력 수치를 제물처럼 바쳐서, 전에 없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리였다.

“신기한 건 바로 써 봐야지!”

“뿌!?”

그 말에 옆에 있던 문어가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저 귀한 물건을 이렇게 의미 없이 써 버리겠다니! 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 인간이란 말인가!

하지만 던전의 부르주아에게 아이템을 아낀다는 개념은 없었다.

찌직!

바로 호쾌하게 주문서를 찢어 버리고 멋지게 소리치는 정다운!

“화염의 룬 발동!”

화아앗!

그 순간 주문서의 문장들이 빛을 뿜어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다운의 몸에 새겨지는 척하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응?”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어?”

그냥 찢어지고 땡이었다.

“뭐, 뭐야? 고장인가? 야, 찢으면 된다며?”

“뿌뿌?”

그는 깜짝 놀라 문어를 쳐다봤지만, 문어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목숨을 걸고 훔치려던 물건이 불량이라면, 자신은 그냥 개죽음당하는 것 아닌가.

알파도 의아해했다.

<뭔가 이상하군요. 마법 주문서는 찢으면 그 안에 봉인된 힘이 발동되는 게 맞습니다. 분명 마법의 타투가 당신의 몸에 새겨지는 걸 봤습니다.>

혹시나 하고 낙원 밖에 있는 토끼에게 사정 설명을 했더니 뻔한 대답만 돌아왔다.

[님이 오류종자라서 그런 거 아님? 아니지, 그냥 아이템이니까 님도 사용할 수 있을 텐데요? 제대로 잘 찢은 거 맞아요?]

“흠, 침착해지자. 이런 순간일수록 당황하지 않는 게 참된 어른이지. 좀 더 예쁘게 찢어 보면 될 거야.”

정다운에게 포기란 없었다.

그는 마법 주문서를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이쪽저쪽 돌려 가며 모서리를 찢고 또 찢어서, 활짝 펼쳤더니.

“짠, 모빌 완성!”

그의 손에 구멍이 숭숭 뚫린 예쁜 패턴의 종이 모빌이 탄생했다!

“훗. ……이 아니잖아! 왜 마법이 안 나오냐고! 설마 내가 이 정도까지 재능이 없다고?”

“뿌힉!”

옆에 있던 문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다운은 화가 났다.

“아니야! 이번에만 불량품이겠지! 다시 찾아서 찢어 보면 될 거야! 야, 너! 다른 보물 상자들 위치 알고 있지?”

“뿌뿌?”

“진짜 몰라?”

“뿌?”

아무리 다그치며 물어도 단추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갸웃하는 문어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지능이 있는 괴물이라면 협박이 통하지 않을까?

정다운은 아까 이 녀석이 스스로 잘라 내고 도망친 석화된 다리 3개를 다 주워 왔다.

“정화!”

파아앗.

순식간에 석화가 풀리고 말랑말랑해진 문어 다리 3가닥.

덕분에 불순물까지 사라지며 통통하고 맛좋은 식재료가 되었다.

정다운이 문어에게 물었다.

“내가 딱 세 번만 더 물어본다. 진짜 몰라? 보물 상자?”

“……뿌?”

문어는 여전히 모르쇠.

정다운은 말없이 문어 다리들을 물로 벅벅 씻어 내고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데쳤다.

그리고 큰 접시 위에 3가닥을 정갈하게 올리고, 다시 문어를 쳐다보며 물었다.

순식간에 만들어 낸 건강에도 좋고 맛 좋은 간식, 문어숙회!

정다운은 초고추장까지 만들어 작은 종지에 담아 옆에 쿵! 내려놓았다.

“모른다는 거지?”

“…….”

정다운의 거친 표정과 문어의 불안한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뽀뀨는 입맛을 다시며 문어숙회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문어는 무척추동물이라 뽀뀨가 좋아하는 뼈가 없었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문어다리 전체가 꼭 탱글탱글 잘 여문 뼈처럼 보였다.

츄릅.

무슨 맛일까 흥미진진했다.

정다운은 문어 다리 한 짝을 통째로 들어 초고추장에 푸욱 찍었다.

그리고 힘차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말해.”

“…….”

이것은 협박일까 식사일까.

초고추장의 매콤상큼한 맛과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문어 다리의 식감이 예술이었다.

“아니다. 맛있으니까 그냥 대답하지 마. 든든하게 먹고 찾다 보면 나오겠지.”

“뿌!”

문어숙회를 맛있게 먹는 모습에 문어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   *   * 

물론 문어라고 모든 길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근처 몇 군데 정도는 알고 있었다.

“뿌!”

“찾았다!”

5다리 문어 전사를 앞세우고 올록볼록한 땅굴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대왕문어를 발견했다.

이제 보니 저 대왕문어가 낙원에선 스테이지-1의 괴물 늑대처럼 흔한 종류였다.

작은 문어 전사는 다크모 정도가 아닐까.

“화살 발사!”

슈슈슉!

그는 대왕문어와 마주치자마자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석화화살부터 날렸다.

갑옷이나 비늘이 없는 문어들은 석화 화살을 상대로 맥을 못 췄다.

일반적인 화살이었다면 얼마든지 다리로 쳐 냈겠지만, 석화 화살은 일단 꽂히기만 하면 게임 끝이었다.

“뿌우우……!”

쿠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마는 대왕문어 석상.

그 뒤를 보니 어김없이 보물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좋았어! 주문서 하나 획득!”

처음 잡은 게 아니라서 업적까지는 뜨지 않았지만, 처음에 보상으로 받은 열쇠가 아무 보물 상자나 다 열 수 있는 마스터키였다.

이번엔 ‘힘의 룬’이었다.

하지만 그걸 찢어 보기도 전에 5다리 문어 전사가 그를 불렀다.

“뭐? 근처에 또 있다고?”

“뿌!”

<문어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눈치로 뽀뀨의 말도 알아듣는 판에 문어가 문제일까?

순식간에 대왕문어를 잡아 버리는 정다운의 모습을 본 5다리 문어 전사는 큰 결심을 했다.

살기 위해 동족을 배신하자고.

그 후로는 거침없는 행보가 시작됐다.

“저기다! 대왕문어다!”

“뿌!”

“오! 또 하나 있다! 잡아!”

슈슉! 슈슈슉!

정다운은 머리통만 남기고 돌이 되어 버린 5다리 문어 전사를 카메라 삼각대처럼 손으로 들고 다니며 땅굴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어차피 문어의 모든 내장은 머리통 안에 들어 있었기에, 다리가 없어도 죽지 않았다.

정화만 걸어 주면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한 목숨이 살기 위해, 보물 상자를 지키던 대왕문어들이 시시각각 죽어 나가고 있었다.

“아싸! 주문서다!”

“뿌!”

“또 찾았다!”

“뿌!”

“주문서 5개 째!”

“뿌뿌뿌- 뿌우!”

<…….>

정다운이 득템할 때마다 재깍재깍 팡파르처럼 추임새를 넣는 문어 전사의 사회성에 알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애도할 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