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62)화 (262/393)

<던전리셋 262화>

<절대 안 됩니다!>

의외로 알파가 강하게 반대했다.

“안 된다고? 왜?”

<종말의 용과 에르테아 님은 동격의 존재입니다. 그를 제물로 바쳤다간, 분명 그는 에르테아 님의 육체를 역으로 빼앗으려 들 겁니다.>

“아?”

알파는 종말의 용이 이번에 다른 이의 육체로 부활을 꾀했다는 사실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그런 방식을 시도했던 존재가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심지어 에르테아가 완벽하게 부활하기 위해선 괴물의 피조차 불경스럽고 부정이 타는 시점이었다.

하물며 종말의 용을 제물로 바친다?

그건 그야말로 요양 중인 환자의 몸에 암세포를 직접적으로 주사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 암세포는 분명 에르테아의 내부를 점점 갉아먹고 성장해서, 이번엔 마침내 한낱 도플갱어의 몸이 아니라 진짜 용의 육체를 가지고 부활할지도 몰랐다.

<저는 솔직히 지금처럼 그를 마법 창고 안에 가둬 둔 것조차도 불안합니다. 마음 같아선 최대한 멀리 내다 버리고 싶습니다만…….>

만일 그랬다간 그가 안 보이는 곳에서 또 어떤 계략을 꾸밀지 모르니, 현재로선 지금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는 말이었다.

[흠. 그러네요. 적어도 마법 창고 안에는 제단도 없고 종말의 사도도 없으니까 아무 짓도 못 할 거임. 죽은 바분이 이제 와서 열일 하네요. 낄낄.]

바분을 떠올리자 토끼는 웃음이 나왔다.

그는 아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자신의 보물 창고가 설마 종말의 용을 위한 감옥으로 쓰이게 될 줄은 말이다.

아니, 엄청난 보물인 종말의 서를 창고에 보관하게 됐으니 오히려 황송해할지도?

알파의 반대에 정다운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농담으로 해 본 말이었어. 당연히 안 될 거라 생각했지. 암, 그렇고말고.”

[웃기고 자빠졌네요. 진담이었으면서. 퉤.]

정다운의 뻔뻔한 얼굴에 냅다 침을 뱉는 토끼였다.

그리고…… 그것이 녀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흙의 파도가 토끼를 뒤덮었다.

푸확!

[토끼, 침 뱉다 여기 잠들다.]

[제작 지원 b. Cafe beno]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

작고 동그란 무덤 앞에서 경건히 합장하며 등을 돌리는 정다운이었다.

*   *   *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메이플이 끝없이 덤벼들 때만 해도 하루가 백 일 같고, 1분이 백 분 같았다.

하지만 놈들이 다 사라진 무간도는 너무나 한가롭고 날씨가 좋은 섬이 되어 있었다.

물론 사냥할 식량이 없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었지만, 찾아보면 길가에 핀 풀을 뜯어 먹는 방법도 있었으니 문제는 없었다.

잡초 중에는 데쳐 먹으면 먹을 만한 풀도 많았으니까.

참가자들은 풀을 뜯기 위해 땅거지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확실히 오래 머물 곳은 아니야. 먹을 게 너무 없어.”

“그러게. 밥을 안 먹는 도플갱어나 살 수 있는 곳이야.”

그 말에 옆에서 그들을 도와주던 도플갱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도 힘든 건 마찬가지예요. 얼른 공세가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우리도 수명만 점점 깎여 나갈 테니까요.”

“하긴 그러네.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서로 이래저래 살기 힘들긴 마찬가지네요.”

“뭐 괜찮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죠, 뭐.”

묘한 곳에서 공감대를 나누는 참가자들과 도플갱어들이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에 반가운 얼굴이 끼어 있었다.

[어? 저기 봐요! 도민준 아재임! 생산직이 아직까지 잘도 살아 있었네요!]

“어? 진짜네?”

“안녕하세요. 진짜 죽기 직전에 던전이 공략되면서 간신히 살았습니다.”

지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중년의 생산직이자 용의 사도인 도민준.

정다운과 토끼가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도민준은 원래 화염충을 다루던 석정호의 패거리에 소속된 생산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리더였던 석정호가 도플갱어에 살해당한 후, 생산직인 도민준이 대신 리더가 되어 있었다.

“다 정다운 님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고요?”

의아해하는 정다운에게 도민준은 자신의 손등 위에서 빛나는 황금빛 화살표를 보여 주며 씨익 웃었다.

석정호가 죽은 후로 그들은 정말 온갖 고생을 다 했다.

그러는 중에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알파의 내비게이션뿐이었다.

“이 화살표만 따라가면 정다운 씨나 류승우 씨와 합류할 수 있으니, 어쩌다보니 부족하지만 제가 리더가 되었습니다. 하하.”

리더라는 건 결국 방향을 정하는 자였다.

소탈하게 웃는 그를 보며 토끼가 혀를 찼다.

[은근 보면 님 인생도 참 버라이어티하네요. 나중에 자서전이라도 내셈. 제목은 ‘생산직 노예였던 내가 리더라니?’ 같은 걸로요.]

“하하, 좋은 제목 감사합니다. 참, 그보다 제가 오면서 발견한 게 있는데, 정다운 님께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솔깃?

“저한테요?”

도민준이 내미는 ‘아이템’을 보며 정다운과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이건 아이템이라기보단 그냥 풀떼기 아님?]

“맞습니다. 제가 ‘약초 채집’ 스킬이 있는 건 아시지요? 유적지 기둥에 붙어 자라던 덩굴 식물을 뜯은 겁니다.”

도민준이 내민 건 축 늘어진 녹색의 풀이었다.

넓은 달걀 모양의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그 옆에는 쥐똥만 한 열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뭐긴요. 약초 스킬로 찾았으니까 약초겠죠. 뭐에 쓰는 약초임?]

“제 스킬로 확인해 보니, 약간의 해독 효과와 소화흡수를 도와줘서 배탈을 낫게 해 주는 약초더군요.”

대단한 약초는 아니었지만, 상비약이 없는 던전에서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효과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화 스킬도 있는 양반한테 이런 약초가 뭔 쓸모임?]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음?]

혀를 차는 토끼 옆에서 정다운이 약초를 받아 들고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약초에 달려 있는 쥐똥만 한 열매 하나를 뜯어서 코로 킁킁 맡아 보기도 하고, 입에 넣고 질끈 씹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경악했다.

“맙소사! 이거 후추잖아요!?”

“역시 정다운 씨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씨익 웃는 도민준이었다.

정다운은 종말의 용을 발견했을 때보다 백배는 더 흥분해서 날뛰었다.

“와! 미친! 후추라니! 후추라니! 진짜 후추라니!”

[후추가 뭔데 그래요?]

정다운이 극도로 흥분해서 날뛰는 모습이 토끼는 의아할 뿐이었다.

도민준은 그가 기뻐하자 주섬주섬 그동안 발견한 풀을 더 꺼냈다.

“그리고 이건 참깨입니다. 저번부터 계속 들깨는 있는데 참깨가 없다고 속상해하셨죠?”

“우와아! 역시 아저씨가 최고예요!”

용의 사도 중에 이렇게까지 그를 격하게 감동시킨 사람이 또 있을까?

정다운이 던전이었으면 도민준에게 업적이라도 안겨 줄 기세였다.

“다운아, 뭔데 그래?”

“무슨 좋은 일 있어?”

그가 기뻐하는 모습에 류승우를 포함한 다른 용의 사도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에 알파는 크게 기뻐했다.

<실로 역사적인 날입니다! 드디어 생명의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군요! 에르테아시여! 이들이 바로 당신의 사도들입니다!>

석정호가 죽었으니 남은 사도의 숫자는 총 5명이었다.

번개맨 류승우.

바람돌이 윤진수.

제국창술의 지서연.

식신 오동민.

여기에 약초꾼 도민준까지.

“아, 이참에 호열이 형님도 사도로 만들어 줄게요.”

정다운의 말에 구호열이 반색하며 좋아했다.

“이야! 드디어 나도 단톡방을 쓸 수 있는 건가? 그런데 용의 사도가 되려면 먼저 너를 감동시켜야 한다며?”

“괜찮아요. 이미 충분히 감동했으니까요.”

“응? 나한테? 내가 뭘 했다고?”

“차였다면서요, 형님.”

“……응?”

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구호열이었다.

흐뭇.

“……어?”

그의 앞에서 정다운이 자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토끼 또한.

그리고 마침 그 뒤에 무심하게 서있는 지서연의 얼굴을 보자 구호열의 안색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

“다 그런 거죠. 일어나라, 솔로부대!”

[낄낄. 인생은 원래 혼자인 거임!]

“…….”

정다운은 그를 향해 선포했다.

“자! 구호열 형님을 용의 솔로로! 아, 실례. 용의 사도로 임명한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파아앗!

“…….”

결국 구호열은 순조롭게 생명의 솔로, 아니, 생명의 솔로, 아니, 생명의 사도가 될 수 있었다.

그토록 생명의 사도가 되고 싶어 했던 도플갱어의 왕이 알았으면 몹시 원통했을 만큼 너무나 부질없고 허무한 감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이런 감동은 줄 수 없었다.

그는 왕이었으니까.

무수한 백발의 여인들을 거느릴 수 있는 하렘왕 백승우였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저한텐 따로 귓말 보내지 마세요.”

“…….”

드디어 단톡방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정작 지서연에겐 귓말을 차단당한 구호열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엔 역시 회식이 빠질 수 없지!”

알파와 마찬가지로 정다운은 엄청나게 신이 났다.

오랜만에 친한 사람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니, 이런 경사스런 날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마침 후추도 생겼겠다, 엄청나게 맛있는 걸 만들어 보고 싶었다.

쿵 쿵 쿵!

[에이, 또 외뿔멧돼지임? 님이 그러면 그렇지.]

그가 소지품에서 외뿔멧돼지의 고기를 한가득 꺼내자 토끼가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정다운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했다.

그는 돼지의 거대한 앞다리와 뒷다리만 썩둑 썩둑 잘라 내고, 몸뚱이는 다시 소지품으로 돌려보냈다.

[다리만 먹게요?]

“이런 날엔 역시 족발이지!”

“뭐? 족발을 만들겠다고?”

“네? 족발을 만들겠다고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용의 사도들이었다.

“그, 그게 가능해? 던전에서?”

“재료가 엄청 많이 필요할 텐데요?”

“재료야 다 있죠!”

정다운은 자신만만하게 지금까지 모은 식재료들을 한 방에 개방했다.

와르르!

“……!”

“……!?”

그 충격적인 모습에 근처에 모여 있던 모든 참가자들과 도플갱어들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족발이라고 뭐 별거 있어? 삶아서 양념 바르면 되는 거지!”

정다운은 오랜만에 끓는 기름 함정 솥들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기름 대신 물을 가득 채우고, 잘 씻어 낸 외뿔멧돼지의 거대한 다리들을 팔팔 삶았다.

오늘은 특별히 같이 먹을 입들이 많으니 식량을 아낌없이 풀 생각이었다.

지서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잡내 제거는 어떻게 하시게요? 월계수 잎 같은 게 없으실 텐데…….”

“뭐 대충 비명초의 이파리면 되지 않겠어요?”

정다운은 쿨하게 비명초의 이파리를 잘게 잘라서 끓는 물에 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윽한 한방의 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맡기만 해도 몸이 좋아질 것 같았다.

“음, 좋은데? 그럼 맛을 내 볼까?”

딱 적당하게 삶아진 돼지 다리 하나를 꺼내 든 정다운.

족발의 맛을 내는 소스라고 해 봐야 대단할 게 없었다.

재료는 단 두 개.

간장과 설탕.(feat.사이다)

“네? 그게 진짜 끝이라고요? 진짜요?”

“응? 족발 먹어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달고 짜면 그거죠 뭐.”

정다운은 놀라는 지서연을 옆에 두고 간장과 설탕으로 만든 족발 양념을 돼지 다리에 꼼꼼히 적셨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팔팔 끓고 있는 기름 솥으로 옮겨 튀기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뭐!?”

“족발을 튀긴다고!?”

요리를 하다 보면 옆에서 깜짝 깜짝 놀라는 구경꾼들의 반응이 은근히 기분을 우쭐하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었다.

“튀기면 다 맛있으니까요. 외뿔멧돼지 많이 안 먹어 봤죠? 기름으로 튀겨 내면 더 맛있어지더라고요.”

정다운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레시피는 마치 필리핀식 족발 튀김과 흡사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요리한 결과였다.

촤르르르!

“미쳤다. 이건 진짜 미쳤어.”

후르릅.

소리만 들어도 침이 고였다.

원시인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큼직한 돼지 뒷다리가 기름에 튀겨지는 광경에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리고 밥을 못 먹는 도플갱어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 모든 장면을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그들에게 이런 먹방은 지독한 고문이자 유일한 대리 만족의 수단이었다.

“아, 기름에 매운맛을 더하면 더 맛있어지겠지?”

그는 끓는 기름 위에 고추씨와 도민준에게 받은 후추 열매를 잘 갈아서 뿌렸다.

“와, 미치겠다. 이렇게 되면…… 진짜 안 맛있을 수가 없잖아…….”

여태껏 바닥을 기어 다니며 풀이나 뜯고 있던 참가자들은 그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와 버렸다.

“자, 이렇게 하나 완성!”

촤아악!

정다운이 기름에 튀겨진 큼지막한 족발 튀김을 솥에서 푸욱 건져 올리는 순간!

번쩍!

파아앗!

‘아아……!’

아아아아!

구경꾼들은 그만 눈이 멀 것 같았다.

족발 위로 반질반질하게 코팅된 기름 막에 반사된 찬란한 태양빛에!

아아, 그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정다운이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찍어 먹을 새우젓을 만들 방법이 없겠는데?”

“헉!?”

“흐억!”

동시에 구경꾼들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토해져 나왔다.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족발에 새우젓이 빠지다니!

감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순간 아닌가!

그런데 정다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림자 하인들에게 지금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떠맡기고, 자신은 다른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별수 없지. 비빔 막국수나 만들어서 곁들어 먹어야겠다.”

‘뭣!?’

‘던전에서!?’

그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생존자 전체 회복?

그게 뭣이 중한가.

지금 그들 앞에 ‘생존자 전체 회식’의 광채가 뿌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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