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60화>
번쩍!
제단에서 시작된 황금빛 기운이 무간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신전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앞으로는 통칭 ‘무간도 신전’으로 명명됩니다.>
<던전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통칭 ‘무간도’로 명명됩니다.>
[크윽!]
창고 안에 감금된 종말의 용이 안타까운 심정을 토해 냈다.
지금 이 순간 무간도가 온전히 자신의 손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무간도에서 자신이 사용할 육체를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알파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던전의 함정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던전의 괴물들이 관리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먼저 공격하면 적의를 갖게 됩니다.>
<던전에서 발생하는 모든 에너지가 제단으로 모여듭니다.>
정다운이 무간도의 모든 공세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턴 먼저 공격하지만 않으면 무간도의 메이플들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할 것이었다.
또한 무간도에 있는 모든 함정들도 지금부터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무간도에 함정이 있던가?”
[글쎄요?]
정다운이 어리둥절해하며 묻는 말에 토끼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뜩이나 폐허로 가득한 무간도였다.
보통 함정이라는 건 유적지 안으로 진입해야 마주치는 법인데, 그동안 정상적으로 유적지를 탐험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먼저 함정이 뭐가 있는지부터 알고 있어야 뜯어서 사용할 것 아니겠는가.
그 걱정에 저번처럼 제단에 워프 게이트 좌표를 설정해 준 루갈이 헛기침을 섞어 가며 조언했다.
[크흠흠! 그거야 종말의 흠흠, 에게 한번 흠흠, 물어보면 어떤가? 크르륵!]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아, 그런가? 말룡아!”
물론 정다운한테는 아무래도 좋을 이름이었다.
그가 창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돌아오는 대답이 결코 예쁘지 않았다.
[이 뻔뻔한! 내가 그걸 말해 줄 것 같은가?]
“역시 쫌 그렇지? 우리 사이에?”
[당연하다! 그리고 그딴 이상한 이름으로 나를 지칭하지 마라!]
말룡이, 아니, 종말의 용은 책장을 꾹 닫고 대답을 일절 거부했다.
토끼가 옆에서 곰곰이 생각하다 넌지시 그를 회유했다.
[흐음, 혹시 협박이나 고문 같은 건 안 통하겠죠?]
[안 통한다! 네놈들이 종말의 서를 훼손시켜도 나는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물에 빠뜨려도? 불에 태워도?]
[이딴 걸로 흥정하지 마라!]
그의 단호함에 토끼가 혀를 찼다.
[쳇. 되게 야박하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좀 아픈 척이라도 해 주면 덧나나?]
[네놈들은 정녕 미친 게냐?]
종말의 용이 이를 갈며 그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나를 잡았다 해서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무간도가 너희에게 넘어갔다 해도 어차피 네놈들의 마법 수준으로는 무간도를 절대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놈의 마법 타령이야?”
정다운은 이젠 징글징글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상 메이플들을 통제할 수 없으면, 아무리 주인이 바뀌었어도 이 지독한 환경은 영원히 그대로일 터.
메이플들은 앞으로도 계속 참가자들을 공격할 것이고, 그 안에서 태어난 도플갱어들도 꾸준히 인간들을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었다.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휴, 또 일일이 뜯어 고쳐야 하나.”
[……뭘 뜯어?]
정다운은 쿨하게 종말의 용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법 실력이 없으면 수동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이참에 레벨 업한 스킬 확인 좀 해 볼까?”
* * *
우뚝.
류승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뭐지? 네비게이션 방향이 달라졌는데?”
계속 정다운의 방향을 가리켜 주던 알파의 화살표가 대각선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때마침 귓말도 도착했다.
<정다운 : 다들 대체 언제 올 거야? 위에 이제 괴물들 없으니까 위로 올라와요!>
<토끼 : 하여튼 이 지각쟁이들! 류승우 님이 뿌린 종말의 똥, 결국 우리가 다 잡았잖아요!>
“위로 올라오라고?”
“갑자기 여기서?”
류승우 일행은 황당한 얼굴로 꽉 막힌 천장을 쳐다봤다.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나?
광산 한복판에서 갑자기 위로 올라갈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더러 자기처럼 땅굴이라도 뚫고 올라오라는 건 아니겠지?”
구호열의 황당해하는 말에 지서연이 냉철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방향을 잡았다.
광산이라도 다 같은 광산이 아니었다.
“주변에 흔적들을 보니 다행히 이 근처쯤에 유적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천장을 몇 번 뚫다 보면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와, 역시 서연 이모! 엄청난 관찰력이시네요.”
“봤어? 우리 이모야! 싸움도 짱 잘하는 이모라고!”
“이모…….”
동시에 엄지를 치켜드는 오동민과 윤진수의 말에 지서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기분이 그냥 그랬다.
띠동갑이었다.
콰쾅!
얼마 후, 지서연의 말대로 천장에 구멍을 몇 번 뚫자 유적지와 연결된 곳이 금방 드러났다.
<알파 : 공략된 던전이라 함정도 다 멈췄을 겁니다. 곧장 올라오시면 우리가 보일 겁니다.>
“올라가면 보인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알파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행들.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 보자며, 유적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운 좋게 보물 상자도 두 개나 발견할 수 있었다.
들어 있는 아이템도 여러 개였다.
강화된 대검과 전투해머, 거기에 방패까지.
“우와! 대박 득템!”
엄청난 횡재였다.
그들은 아이템을 적당히 나눠서 챙기고 계속 유적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1층에 도착해 다시 햇빛을 마주한 순간.
“와…….”
그곳은 더 이상 그들이 익히 알고 있던 무간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메이플들이 다 사라진 거야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무간도가 리셋되어 산산조각 나기 전까진 이렇게 평화롭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숨통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알파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위로 올라오자마자 정다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정다운의 흔적을 말이다.
“전망대 설치!”
처처처처척!
저 멀리 정다운의 3레벨의 전망대가 4배로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탑처럼 쌓기만 했던 전망대가 이제는 하늘 위에 높이 떠 있었다.
부유석으로 만든 전망대였다.
물론 이렇게 만들면 무간도가 옆으로 이동하면 전망대만 그 자리에 남아서 멀리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럴 걱정이 없었다.
정다운은 개미침으로 길게 연결시킨 철근 기둥을 추파춥X처럼 전망대 아래에 꽂고, 반대쪽 끝도 땅에 푹 꽂아 고정시켰다.
무간도가 이동해도 계속 따라다닐 수 있게.
그리고 그런 거대한 추파춥X들이 무간도 곳곳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며 류승우 일행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저거 분명…… 다운이의 전망대지?”
“저쯤 되면 그냥 인공위성 아냐?”
상당히 조악한 방식이긴 했지만, 하늘에 떠 있는 전망대라는 점에 있어서 인공위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능 또한.
[어차피 이렇게 꽂아 놔도 섬이 조각나면 전망대 기둥이 뽑힐 거라니까요?]
옆에서 혀를 차는 토끼에게 정다운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많이 만들고 있잖아. 이 중에 몇 개만 남아도 이득이지 뭐. 미니맵!”
펄럭.
그의 앞에 언제나처럼 지도가 나타났다.
그 안에 지상으로 올라온 류승우 일행이 점으로 표시되었다.
그걸 보며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도 확대!”
이번에 전망대가 레벨 업하면서 새로 생긴 기능.
그의 말에 지도가 점점 커지더니 콩알만 한 점들이 점점 류승우 일행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들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보며 정다운이 낄낄댔다.
“화질이 제법인데? 인터넷 지도에서 거리뷰 보는 것 같다.”
진짜 인공위성이 따로 없었다.
여기가 무간도라서 철근으로 기둥을 꽂았지만, 그냥 땅이었으면 부유석만 이용해서 전망대를 띄울 수도 있었다.
정다운은 저 멀리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달려오고 있는 류승우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새로운 전망대를 또 심기 시작했다.
“먼저 철근.”
푸욱!
그는 새로운 철근을 두 손으로 들고 땅에 박아 넣었다.
너무도 쉽게.
이쑤시개로 흙을 찌르듯이.
그 모습은 멀리서 달려오던 류승우 일행도 잠깐 걸음을 멈출 정도로 이상한 광경이었다.
“흙 뭉치기!”
푸욱!
맨땅에 철근을 꽂는 게 원래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건축업자들이 억울할 것이다.
정다운은 중급 1레벨이 된 흙 뭉치기 스킬의 효과에 계속 감탄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아? 흙이 엄청 부드러워졌어.”
야들야들.
말랑말랑.
광산 바닥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흙이 그의 손에 닿는 순간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거렸다.
신기하게도 그런 특징은 그의 손에서만 유지되었다.
토끼라든가 다른 사람이 만지면 여전히 딱딱하기만 했다.
명탐정 토끼가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상황을 분석했다.
[그러게요. 흙 뭉치기가 메인 스킬이 되더니, 이젠 그냥 흙만 잘 뭉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흙을 잘 뭉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음.]
“둘이 뭔 차인데?”
[한 끗 차이죠 뭐.]
그런데 그 한 끗 차이가 엄청나게 대단했다!
정다운은 이제 흙을 손바닥으로 만지지 않아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주먹으로 때려도, 딱딱한 흙이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변해 그의 손이 푹푹 뚫고 들어갔다.
그가 손으로 들고 있는 철근이 닿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물러 터진 정도를 정다운 스스로 조절할 수도 있었다.
“이거 이대로 계속 레벨 업하다간 설마!?”
불현듯 자신의 미래를 깨달은 정다운!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언젠가는 흙 속에서 수영할 수도 있겠는데?”
[네, 그러다 부유섬 밑으로 추락하면 되게 웃기겠네요.]
“후우, 내 힘을 온전히 감당하기엔 이 세상이 너무 좁구나.”
토끼의 비아냥에 정다운은 고독한 1인자의 얼굴을 하고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흙 뭉치기가 달라진 점은 또 있었다.
“흙 뭉치기!”
쭈우아악!
그가 손바닥을 바닥에 딱 붙이고 위로 쭈욱 들어 올리자, 그 손바닥을 따라서 기다란 흙기둥이 쫀득하게 딸려 올라왔다.
“이것도 대박이지 않아?”
정다운은 신이 나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흙기둥도 따라서 휘적휘적 휘어지며 길어졌다.
손을 빙글빙글 돌렸더니 흙기둥도 꽈배기처럼 빙빙 돌아가며 스프링 모양이 되었다.
그러다 똑!
흙기둥이 바닥에서 떨어져 나오자, 그의 손에 기다란 흙 몽둥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걸 다른 손으로 척척 쓰다듬자 순식간에 그럴싸한 칼 한 자루가 탄생했다.
“크으! 보여? 땅에서 검을 뽑아내다니! 전설의 용사가 따로 없지?”
[…….]
전설의 흙칼을 높이 치켜들고 토끼를 쳐다보는 그의 콧대가 세상 도도했다.
저 표정, 저거 진심이었다.
진짜 하나도 안 부러운데 모두가 자길 부러워할 거라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토끼는 진심을 다해 그를 한심하게 쳐다봐 주었다.
[네, 축하해요. 두 번째 메인 스킬로 소꿉장난을 얻으셨네요. 그딴 칼에 맞아 죽는 놈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응. 처음 맞아 죽는 놈은 분명 너일 거야. 잠깐만 이리 와 봐.”
[메롱. 흙이나 먹어라.]
후다닥.
정다운이 다가오자, 토끼는 도도한 표정으로 도망쳤다.
“거기 서, 이 자식아!”
그 뒤를 쫓아가는 정다운.
그가 갑자기 손을 땅바닥에 푸욱 쑤셔 넣더니 물장구치듯 앞으로 힘차게 뿌렸다.
푸화악!
[……!?]
무심코 뒤를 돌아본 토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경우엔 물장구가 아니라 ‘흙장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다운의 손을 따라 올라온 흙의 파도가 토끼의 작은 몸을 뒤덮어버렸다.
[이건 뭣, 꾸익!?]
찍.
[…….]
별안간 그곳에 토끼의 무덤이 생겼다.
동그랗고 예쁜 무덤이었다.
정다운은 그 앞에 묘비도 하나 뭉쳐서 손가락으로 좋은 글귀도 적어 주었다.
[토끼, 까불다 여기 잠들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게.”
[…….]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흡족하게 등을 돌리는 정다운.
잠시 후 그 무덤 속에서 작고 새하얀 앞발이 좀비처럼 쑥 튀어나왔다.
토끼 이즈 커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