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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258)화 (258/393)

<던전리셋 258화>

정다운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종말의 용을 따르는 도우미들이 던전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애초에 던전이 그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던전은 그저 존재할 뿐.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그리고 종말의 용이나 그의 도우미들은 고작해야 농부에 불과했다.

던전에서 꾸준히 발생하는 에너지를 수확하고, 그 수확물을 ‘제단’에 바쳐 부활을 위한 힘을 모으는 것이 바로 그들의 농사법.

리셋? 함정? 괴물?

그런 것들은 모두 던전에 이미 내제되어 있던 구성 요소들을 위치만 재배치하거나 시계를 되감는 수준의 자잘한 농사 요령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스케일만 다르지, 정다운도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죽음과 생명이라는 속성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생명의 용과 종말의 용은 목적과 능력들이 거의 똑같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결론은, 용 두 마리가 싸운 끝에 한쪽은 뼈만 남고 다른 한쪽은 책 속에 봉인당했다는 말이네요. 누가 먼저 부활하나 시합 중이었던 거네.]

명쾌한 정리.

명탐정 토끼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렸다.

물론 그냥 시늉일 뿐 막상 쓴 건 없었다.

종말의 용은 거만하게 책장을 구부려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하다. 이렇게 책 속에서 말도 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다 지금까지 제물을 열심히 모은 덕분이지.]

그 모습이 겉보기엔 만화 같고 귀여웠지만 동시에 가증스러웠다.

고작 저걸 위해서 지금까지 숱한 참가자들의 목숨이 바쳐졌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종말의 용은 뻔뻔했다.

[어차피 던전에 소환된 인간들은 결국 죽을 목숨이다. 그 죽음들이 헛되지 않게 내가 그 에너지만 재활용했을 뿐. 내가 없어도 던전은 스스로 돌아간다.]

정다운이 크게 뜬 눈으로 반문했다.

“그 말은 설마…… 우리 참가자들을 소환한 건?”

[내가 아니라는 말씀이지. 던전 스스로가 한 짓이다.]

[그 말을 우리더러 믿으라고요?]

정다운과 토끼가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지금 종말의 용은 입이 싸도 너무 쌌다.

물어보는 족족 너무 쉽게 모든 비밀을 술술 불고 있었다.

종말의 용이 책장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호언장담했다.

[믿어라. 참고로 던전 시스템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나는 종말의 용이다. 파괴는 모를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내 영역이 아니다.]

“그럼 시스템을 만든 건 누군데?”

[나도 모른다. 어쩌면 던전 스스로가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마녀인가?’

당장 의심되는 용의자는 역시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마녀는 이미 한참 전에 죽고 없었다.

‘나중에 메모리한테 한번 들러 봐야겠는데.’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진 정다운에게 알파가 말했다.

<그를 믿어도 좋을 겁니다. 아무리 종말의 용이라도, 용처럼 격이 높은 존재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한낱 인간 따위를 속이기 위해 내 격을 스스로 떨어뜨릴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어차피 네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해서 내가 손해 보는 일도 없다.]

종말의 용이 자신 있게 자신이 아는 모든 진실을 실토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도 던전 곳곳에서는 꾸준히 종말의 용에게로 죽음 에너지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 에너지의 흐름은 아무리 종말의 서가 정다운의 손에 붙잡혀 있다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네놈들이 제단 몇 개를 훔쳐갔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당장 등천로만 해도 제단이 있는 부유섬들이 곳곳에 떠 있으니까.]

속도가 조금 줄었을지는 몰라도 그는 여전히 열심히 부활하는 중이라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다운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그럼 너는 우리들을……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줄 수는 없어?”

[도우미들에게 듣지 못했나? 너희들이 던전을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최종 던전을 공략하는 것뿐이다.]

“…….”

정다운은 자신이 던전의 오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통감했다.

결국 종말의 용을 만났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종말의 용이니 생명의 용이니 하는 건 자신만 아는 내막일 뿐.

다른 참가자들은 처음부터 용에 대해 관심도 없고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착실히 던전을 탈출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정해진 룰대로.

*   *   *

[생존자 전체 회복]

파아앗!

갑자기 나타난 던전이 공략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광산 길을 달리던 류승우 일행에게 생존자 전체 회복이 뿌려졌다.

“이야! 다운이가 해냈나 본데?”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며 구호열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류승우는 여전히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쌩쌩해진 체력으로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승우야, 뭐가 그렇게 급해? 메이플들도 다 사라졌으니 이제 급할 것도 없잖아?”

“아뇨. 더 급해졌어요.”

구호열의 만류에도 류승우의 태도에는 변함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정다운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땅을 파서 길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정다운과 자신들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자신들이 있는 무간도의 중앙섬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방향만 믿고 광산을 이동하기엔 갈림길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갈림길 중에는 일직선이 아니라 멀리 돌아가는 길도 존재했다.

게다가 그 곳엔 언제나 귀찮은 메이플들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런데 던전이 공략되는 순간 메이플들이 동시에 죽어 버렸다.

광란의 축제가 끝나는 순간 수명도 끝나 버린 것이다.

덕분에 귀찮게 앞을 막아서는 놈들도 이제 없어졌으니 지금까지보다 2배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류승우는 새로운 갈림길에서 광산 수레의 방향을 다시 고쳐 잡으며 동료들에게 물었다.

“누구 아직 다운이한테 귓말 받은 거 없죠?”

“네, 무사하냐고 귓말을 벌써 몇 번이나 보냈지만 답장이 없어요.”

지서연의 대답에 류승우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어쩌면 벌써 그 녀석 혼자 ‘낙원’으로 넘어가 버린 걸지도…….”

공략 보상으로 받은 낙원으로의 초대장은 새하얀 깃털이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소지품 안에 들어와 있던 이 아이템은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게 해 주는 물건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경험상 이런 물건은 동료들끼리 서로 떨어져서 사용하게 되면, 도착하는 장소 또한 서로 멀어지게 된다.

“승우 씨는 정다운 씨가 초대장을 먼저 사용할까 봐 걱정이신가요?”

“에이, 다운이 형이 바보도 아니고 설마 그러겠어요?”

어깨를 으쓱이는 윤진수.

말은 그렇게 해도 괜히 불안해져서 바람의 힘으로 광산 수레에 추진력을 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메이플들이 사라진 덕분에 류승우에게도 이제야 드디어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사실…… 꿈을 꿨습니다. 자는 동안에.”

“응? 꿈이요?”

“꿈?”

“무슨 꿈?”

뜬금없는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류승우는 푸른빛으로 수레 앞의 어둠을 밝히며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녀의 꿈.”

*   *   *

붉은 뇌전에 맞고 기절한 휴이 번스타인도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각몽이라니 신기하네.’

자각몽이라 해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움직임이 둔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꿈처럼 몽롱한 시야.

그 너머에 보랏빛 어둠이 가득했다.

그는 팔다리를 느릿느릿 움직여 그 어둠을 향해 헤엄치는 중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물살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랏빛 어둠이 자신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작은 소녀가 보였다.

‘마녀?’

휴이는 한눈에 그 정체를 알아봤다.

던전을 도는 참가자들 중에 마녀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더욱이 등천로를 돌다가 안개섬을 지나쳐 왔다면, 누구나 한 번씩은 아라크네의 탑에 갇힌 소녀를 구해 준 경험이 있을 테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마녀’라고 박해받던 불쌍한 소녀.

지금 그 아이가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부디 우리를 보호하소서. 설령 깊은 절망과 어둠이 우리에게 닥쳐올지라도.”

‘기도문인가?’

휴이는 곧 소녀가 아무렇게나 기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릎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그 안의 내용을 읽고 있었다.

기도는 길었으나 그 전체적인 내용은 결국 온 나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휴이는 곧이어 들을 수 있었다.

그 기도하는 소녀를 칭송하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감사합니다, 성녀님!”

“성녀님, 감사합니다!”

“성녀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이 모든 게 그분의 기도 덕분이지!”

“성녀님, 이번 농사도 잘 부탁드립니다!”

휴이는 어리둥절했다.

‘안개섬 때와는 평판이 전혀 다른데?’

신기하게도 이곳에서 소녀는 마녀가 아니라 성녀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이 작은 아이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겐 짐이 너무 무겁군.’

휴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눈앞의 소녀에게 그만 감정 이입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의 모든 불행은 ‘증폭’과 ‘도살자의 칼’이 자신에게 생긴 순간부터였다.

자신이 본격적으로 강해진 순간부터 곁에 있던 동료들은 모두 자신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무조건 자신부터 쳐다봤다.

휴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휴이 덕분에 살았어.

휴이가 앞장서 줘.

휴이, 휴이, 휴이…….

‘나도 부담스러웠는데, 이 아이는 오죽할까.’

소녀의 기도가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워낙 마법 같은 곳이다 보니, 생존자 전체 회복 같은 직접적인 축복 효과가 있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이 작은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기복 신앙이 얼마나 당사자에겐 무거운 짐이었을지, 휴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휴이였기에.

그는 소녀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부디 우리를 보호하소서. 설령 깊은 절망과 어둠이 우리에게 닥쳐올지라도.”

소녀의 기도는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끝없는 기원과 염원 속에서 기도를 한시라도 쉴 수 없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 기도가 사람들을 웃게 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휴이는 계속 옆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쿠르릉! 콰쾅!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갑자기 세기말이 시작된 꿈 속 세상을 보며 휴이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축복과 저주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다는 것을.

휴이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선 그 전에 먼저 그에 상응하는 위험이 필요했다.

위기가 찾아와야 그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부디 우리를 보호하소서. 설령 깊은 절망과 어둠이 우리에게 닥쳐올지라도.”

소녀의 기도는 결국 그대로 이루어졌다.

쿠르르! 쿠콰쾅!

사람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깊은 절망과 어둠’이 그들에게 닥쳐온 것이다.

그리고 소녀의 진정한 불행 또한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마녀가 우리를 저주했다!”

“마녀를 죽여라!”

“마녀를 죽여!”

휴이는 작은 다락방에 갇혀 혼자 서럽게 울고 있는 소녀의 등을 조용히 토닥여 주었다.

여리고 좁은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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