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56화>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렇지! 정화!”
파아앗!
도망치던 정다운이 몸을 홱 돌리며 순백의 정화구체를 날렸다.
빨갛게 혹이 난 이마를 만지며 뒤쫓아 오는 종말의 용의 표정은 단단히 뿔이 난 악귀 같았다.
딱 봐도 불길하게 생겼으니 정화가 통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까짓 스킬 따위! 나에겐 소용없다!]
퍼펑!
종말의 용은 시야를 어지럽히는 정화 스킬을 날파리 쫓듯 손으로 물리쳤다.
토끼가 외쳤다.
[정화 스킬은 불결한 것에만 반응해요! 도플갱어의 왕의 육체는 언데드가 아니라서 안 먹힌다고요!]
‘그래? 그럼 차라리 이 책은 어떨까?’
정다운은 자신의 손에서 푸드덕거리며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종말의 서로 시선을 돌렸다.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게, 딱 봐도 불길해 보였다.
“정화! 정화!”
파앗! 파아앗!
하지만 이번에도 먹통이었다.
철근 하나를 더 넘어뜨리고 뒤따라오던 종말의 용이 그를 비웃었다.
[다 소용없다! 종말은 세계의 자연스러운 흐름! 정화 따위로는 종말을 거스르지 못하리라!]
“에이씨! 안 되겠다! 얘들아, 한꺼번에 밟아!”
정다운은 결국 정화 스킬을 거두고 골렘들을 불러들였다.
이번 전투로 철갑 골렘 몇 기 정도는 잃을 각오였다.
종말의 용만 잡을 수 있다면, 사실 뭘 얼마나 손해 봐도 이득 아니겠는가!
하지만.
“……뭐 하냐, 너네?”
“크워업.”
“오오옴?”
뜬금없이 골렘들이 전부 땅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자석처럼.
그 밑에는 뇌전에 의해 전자석처럼 변해 버린 철근들이 골렘들의 나전칠기 철갑에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푸히히! 엉망진창이네요!]
골렘들이 모두 엎드린 채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모습에 토끼가 자지러졌다.
“그, 그럼 바하무트는?”
[저는 여기 있나이다…….]
바하무트는 구석에서 절반쯤 녹아 있었다.
주변에 온통 뇌전으로 시뻘겋게 달궈진 철근들이 널려 있어서 광산이 너무 더웠다.
그래도 뭐라도 도와줄 생각이었는지, 꾸물꾸물 기어가 아까 한 방 맞고 기절한 휴이 번스타인을 메이플들에게서 지켜 주고 있었다.
“에이씨! 일단 튀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었다.
믿을 거라곤 자신의 두 다리와 외뿔 멧돼지의 기운으로 튼튼해진 체력뿐!
[서라! 이놈!]
“싫어, 이 자식아! 너 같으면 서겠냐! 으아아!”
정다운은 잘도 도망쳤다.
잡혔다간 진짜 큰일 날 것 같아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흙벽돌로 벽을 친 후, 자신은 옆으로 방향을 틀기도 하고.
[소용없다!]
콰쾅!
바로 흙벽을 폭발시키고 놈이 따라 붙으면.
또 꽝!
[……!]
거기에 딱 철근을 꽂아 놔 놈의 허를 찌르기도 하고.
[크아악! 이놈이 정말!]
그사이에 자신은 흙벽에 다시 구멍을 뚫고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둘이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촐랑촐랑 뛰어다니는 모습이 톰과 제리가 따로 없었다.
“헉헉. 그만 좀 쫓아오라고!”
겉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막상 이쪽은 목숨이 달려 있으니 스릴이 장난 아니었다.
이미 아주 멀리까지 도망친 토끼가 쌍수를 들고 응원했다.
[잘하고 있어요! 계속 도망치셈! 잡히면 끝장! 살짝이라도 술래의 손에 닿으면 감전사로 사망하는 죽음의 술래잡기임!]
“응원만 하든가 중계만 하든가 하나만 해, 이 자식아!”
[죽인다……. 반드시 죽이리라…….]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눈에 띄게 지쳐 갔다.
“헉헉. 그만 좀…… 쫓아오라고…….”
[헉헉. 죽이리라…….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 쿨럭 쿨럭.]
아무리 외뿔멧돼지의 기운이 있다 해도 체력의 한계는 있는 법.
그건 정다운뿐만 아니라 종말의 용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완벽한 몸을 만들었다 해도, 역시 인간의 육체는 한계가 있었다.
용에 비해 인간의 몸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몸에겐 흡혈이 있지! 흡혈!]
“키히잇!?”
촤아악!
종말의 용은 주변에 날아다니는 메이플들을 죽여서 순식간에 체력을 회복했다.
그의 흡혈 능력은 더 이상 도살자의 칼에 붙은 특수 옵션 따위가 아니었다.
칼이나 손으로 ‘직접’ 대상을 공격해서 체력을 갈취하는 패시브 스킬로 다시 태어난 상태였다.
다만 그의 장기인 뇌전은 원거리 공격이라서 흡혈이 적용되지 않는 게 아쉬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사기적인 능력 아니겠는가.
약해 빠진 메이플 몇 마리만 잡아도 최소 저 빌어먹을 인간 놈에게 한 방 먹이기엔 차고 넘치는 에너지였으니까!
[크하하!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
다시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며 정다운에게로 고개를 돌린 종말의 용.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나무 베기! 나무 베기!”
그사이에 정다운도 열심히 장작을 패고 있었다.
[<나무 베기> 스킬이 3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아싸! 레벨 업!”
[레벨 업하지 마!]
보다 못한 종말의 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무 베기 (3레벨)
- 벌목 속도가 빨라진다.
- 나무를 베면 체력이 조금씩 회복된다.
날아다니는 메이플을 잡는 것보다 소지품에서 장작을 꺼내는 일이 훨씬 빠르고 쉬운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올라간 스킬 효과로 인해 벌목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정다운이 다시 힘차게 기지개를 폈다.
“좋았어! 이제 다시 도망칠 수 있겠다!”
후다닥!
다시 술래잡기 리셋!
[이, 이런 미친!]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다시 그를 뒤쫓기 시작하는 종말의 용이었다.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이대로라면 이 지독한 술래잡기가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았다.
‘이러다 수명이 끝나면?’
자신은 이번 같은 육체가 또 만들어질 때까지 잠에 빠져야 했다.
[크윽, 그렇게는 안 되지.]
턱.
그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내 이 기술만큼은…… 너무 위험해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거늘!]
쿠르릉!
그의 몸속에서 천둥이 쳤다.
류승우가 뇌전 스킬을 활용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 딱 사용하기 적절한 기술이 한 가지 있었다.
자신의 몸에 뇌전을 응축시켜 모든 신체 능력을 폭발시키는 기술!
이 기술을 휴이 번스타인의 증폭과 동시에 사용한다면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를 얻을 수 있으리라!
눈앞에 있는 저 거치덕거리는 모든 방해물들을 다 폭발시키며 이동할 수 있으리라!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네놈만은……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그리고 네놈의 수명을 갈취해 이 몸을 유지하겠노라!]
쿠르릉!
붉은 뇌전이 고도로 응축되며 그의 전신이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에 알파가 경악했다.
<위험합니다! 저 힘이 폭발한다면 광산조차 무너질 겁니다!>
“뭐!?”
경악한 정다운의 시선이 빠르게 제단부터 찾았다.
다행히 제단은 골렘들의 품에 있었다.
“열려라! 마법 창고!”
철커덕!
그 순간.
[증폭! 전광석화!]
콰르릉!
붉게 물든 종말의 용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실로 숨 가쁜 순간이 이어졌다.
창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철근을 몸에 붙인 골렘들이 몸을 일으켰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종말의 용과 그 앞을 막아서는 정다운.
자신도 창고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창고로 들어가 봐야 다시 밖으로 나오면 또 이곳이었다.
결국 종말의 용과는 여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렇다면?’
정다운은 여태껏 들고 다니던 종말의 서를 흙으로 똘똘 뭉쳤다.
푸드덕! 꾸왁!
종말의 서가 발버둥쳤지만 속수무책으로 흙덩이 속에 갇혀 버렸다.
‘이걸 창고 안으로 집어 던진다!’
종말의 서가 종말의 용의 본체라면 창고 안에 가둬 버리는 순간 도플갱어의 왕도 움직임을 멈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속 도망다니면서 간신히 생각해 낸 그의 노림수였다.
하지만 다가오는 종말의 용의 속도는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다 죽여 주겠다! 크아아아!]
‘이런! 너무 빨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종말의 용!
정다운은 결국 계획을 바꿔야 했다.
종말의 서를 가둔 흙덩이를 멀리 집어 던지고, 용감하게 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흙…… 뭉치기!”
[……!]
푹!
그 순간 그들의 발아래가 푹 꺼지며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마법 창고의 문과 골렘들은 내버려 둔 채, 오로지 정다운과 종말의 용 단둘이서만 그 밑으로 뚝 떨어졌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푸파파파파팍!
정다운은 두 손을 마구 휘두르며 발밑을 끝없이 파헤쳐 내려갔다.
평소처럼 네모난 흙벽돌이 아니라 최대한 얇고 넓은 범위로 구덩이를 만들어 나갔다.
그에 따라 종말의 용 또한 계속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황당한 순간이었다!
바닥이 뜯겨 나가면서 자꾸 발밑이 사라지니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면 놈을 죽일 수 있는데, 이 자식이 자꾸만 철근 하나씩을 중간에 떨궈서 공격과 시야를 방해했다.
[설마!?]
정신없는 와중에 종말의 용은 퍼뜩 깨달았다.
이 인간의 계획이 무엇인지!
[설마 무간도를 이대로 꿰뚫을 생각인가!]
무간도는 엄청난 높이의 상공에 떠 있는 섬이었다.
이대로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간 밑이 뻥 뚫려서 그대로 낙사할 것이다!
이 높이에서 추락하면 류승우의 완벽한 육체고 뭐고 반드시 죽으리라!
[이 미친놈이 감히 이 몸과 동반자살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필사적으로 휘둘러 옆의 벽에 찔러 넣었다.
그그그극……!
장검이 추락하는 그의 몸을 간신히 벽에 고정시켰다.
[크하하! 됐……!]
퍼억!
[……!]
그 순간 위에서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떨어지며 그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이크! 에헷.]
저 위에서 돌덩이를 떨어뜨린 토끼가 후다닥 도망치고 있었다.
겁나 약 올랐다.
결국 또 검을 놓치고 추락하게 된 종말의 용은 크게 분노했다.
[이, 이놈들이!]
콰르릉!
결국 그는 크게 분노하며 전신에서 엄청난 힘을 폭발시켰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힘을 폭발시키면 자신도 위험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했다.
어차피 류승우의 기억에 따르면 정다운은 생명의 용을 따르는 자였다.
이 놈 하나만 죽여도 앞으로 귀찮은 일들은 모두 사라지리라!
[죽어라. 이곳에서 네놈을 죽이고 나는 영원히 살리라!]
극도로 분노한 그는 결국 몸속에 응축시키고 있던 모든 힘을 폭발시켰다.
파아아앗!
피처럼 붉은 기운!
그 빛이 정다운을 덮쳤다.
“……!”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은 사방이 꽉 막힌 구덩이 속이니까.
하지만.
있었다!
피할 곳이라면!
‘바로 위!’
그 순간 땅을 파던 정다운의 손이 우뚝 멈추고, 그 대신 흙벽돌을 와르르 꺼내기 시작했다.
“전망대 설치!”
[전망대를 설치합니다.]
전망대를 건설할 때의 그의 작업 속도는 무려 3배!
처처처처척!
쑤우욱!
그 순간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종말의 용만 혼자 남겨 두고!
[이 미친 자가!]
종말의 용은 기겁했다.
닭 쫓던 개처럼 휘몰아치듯이 다시 위로 올라가는 정다운을 올려다보며!
이대로라면 폭발에 휘말리는 건 자신 혼자뿐이었다!
뇌전에 의한 데미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폭발에 정다운의 전망대가 아래로 무너져 내리면 자신은 이곳에서 생매장되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그 무게로 인해 혹시라도 발밑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추락한다!’
[크아악! 힘을…… 다시 거둬야……!]
그는 필사적으로 폭발력을 다시 온몸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쿨럭!
힘이 역류하는 충격 때문에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