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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251)화 (251/393)

<던전리셋 251화>

문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밖에는 류승우가 서 있었다.

그런데 머리가 하얀 색이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퀭하니 어딘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거 설마 도플…….’

“뭘 봐? 도플갱어 처음 보나?”

“…….”

그는 뻔뻔한 얼굴로 정다운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 허락도 없이 코끼리 골렘 안으로 들어왔다.

“도플갱어……!”

그의 모습을 확인한 휴이 번스타인이 깜짝 놀라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1초! 놈과 나의 공격 거리!’

휙.

‘……?’

그런 휴이를 한 번 힐끔 쳐다보는 것을 끝으로 그냥 지나치는 도플갱어였다.

“침대 좀 빌리자.”

그리고 마침 토끼가 누워 있던 침대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그곳으로 걸어갔다.

토끼가 바짝 긴장해서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어어? 뭐임? 오지 마셈!]

성큼성큼!

[아, 안 돼! 이건 내……!]

성큼성큼!

팍!

[아앗……!]

토끼의 완강한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

“…….”

졸지에 도플갱어와 나란히 한 이불을 덮게 된 토끼는 황당한 표정으로 힐끗 옆을 쳐다봤다.

그는 만성 피로에 찌든 회사원 같은 표정으로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저, 저기요?]

“말 걸지 마. 피곤하니까.”

[넴.]

“…….”

[…….]

뻘쭘.

도저히 말 걸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지금 토끼는 피 냄새가 가득한 도플갱어와 한 이불 속에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 도망갈 타이밍도 놓쳤다.

[어떻게 좀 해 봐욧!]

‘나보고 어쩌라고?’

토끼가 입을 벙긋거리며 귓말로 정다운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배신자 정다운 놈은 무책임하게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결국 토끼는 그를 자극하지 않게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물려 이불 밖으로 나가려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다시 얼음이 되었다.

“침대 잘 만들었군. 역시 정다운이다.”

솔깃?

갑작스런 칭찬에 정다운의 귀가 팔락거렸다.

“너 물건 좀 볼 줄 아는구나. 이 침대로 말할 것 같으면,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마약이라는 진리를 몸소 표현……!”

장황한 미사여구는 생략하자.

아무튼 푹신한 외뿔멧돼지의 털가죽을 5중으로 덧댄 후 충격 흡수 옵션까지 추가해, 12시간을 내리 자더라도 허리가 전혀 아프지 않은 정다운의 특제 강화 침대였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 노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간도에서 마음 놓고 쉴 곳은 여기밖에 없더군.”

“특별한 날? 오늘이 무슨 날인데?”

정다운이 물었다.

처음 보는 이였으나 겉모습과 목소리가 너무 류승우의 판박이라서 친숙한 기분이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정다운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태어난 날.”

벌떡!

그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정다운.

“아, 혹시라도 미역국 같은 거 끓일 생각은 마라. 도플갱어는 밥을 먹지 못하니까.”

“…….”

그 말에 아닌 척 냄비와 국자를 다시 집어넣는 정다운이었다.

안 봐도 뻔하다며 도플갱어는 눈을 감은 채로 킬킬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다운에 대한 류승우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거 알고 있나? 도플갱어는 잠도 못 잔다. 이렇게 누워 있는 것도 사실은 천천히 죽어 가는 중일 뿐이지.”

“오늘 태어났다면서 말이 짧네?”

이 와중에도 서열 잡기를 시도하는 꼰대왕 정꼰대.

하지만 도플갱어는 뻔뻔했다.

“꼬우면 너도 반말하든가. 어차피 난 진짜 류승우도 아니다.”

뒤치닥!

[히익?]

그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토끼를 인형처럼 품에 안자, 토끼가 대놓고 질색하며 소리를 꽥꽥 질렀다.

[토, 토끼 살려! 이 흰승우가 감히 나를 인질로 삼았음!]

“백승우라니, 그게 내 이름인가? 충동적으로 지은 것치곤 나쁘지 않군.”

[…….]

와, 이 뻔뻔한 놈 좀 보게?

아닌 밤중에 갑자기 나타나서 제멋대로 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토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에게서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네가 도플갱어의 왕이지?”

움찔.

갑작스런 정다운의 말에 그가 처음으로 눈을 떠서 정다운을 노려봤다.

“……어떻게 알았지?”

파칙!

그의 붉은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스파크처럼 터졌다.

“헉! 도플갱어의 왕이라니!?”

그 모습에 휴이가 기겁하며 빠르게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좌수에는 도살자의 칼!

우수에는 독이 깃든 장검!

‘1초! 놈과 나의 공격 거…….’

“지금 너 때문에 단톡방이 시끄럽거든.”

“아아. 그러고 보니 귓말이 있었지 참.”

정다운이 자신의 손등을 톡톡 치며 하는 말에 도플갱어의 왕은 김샌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류승우 일행이 귓말이 먹통이었던 유적지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모두에게 귓말을 보내는 일이었다.

도플갱어의 왕의 생김새가 류승우를 닮았으니 혹시라도 주의하라고.

보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위험한 놈이 떡하니 여기 침대에 누워 있다고, 답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정다운이었다.

이런 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휴이만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맙소사. 도플갱어의 왕이 류승우의 몸으로 태어났다니…….”

“내 안엔 너도 있다, 휴이 번스타인.”

“뭐, 뭣!?”

당황의 연속이었다.

도플갱어의 왕이 피식 웃으며 정다운을 불렀다.

“정다운.”

“왜?”

“나는 잠을 자고 싶다.”

“불 끌까?”

“방금 말했잖아. 도플갱어에게는 잠도 밥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건 왕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럼 죽든가요. 죽으면 영원히 잘 수 있, 꾸익.]

토끼가 그의 품에 과하게 짜부라지며 과하게 못생겨졌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

“그런데 나에겐 인간일 때의 기억이 있다. 류승우와 휴이 번스타인. 둘의 기억 속에 공통적으로 있는 게 뭔 줄 아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기회만 보이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휴이에게로 향했다.

“그야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정신력과 전투력…….”

시선을 받은 휴이는 검을 역수로 쥐고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도플갱어의 말은 정다운을 향해 있었다.

“네가 차려 준 밥이다.”

“…….”

휴이 머쓱타인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가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밥이라고요?]

“그래. 따뜻한 밥과 휴식. 이 피비린내 가득한 던전에서 맛본 몇 안 되는 강렬한 기억들.”

도플갱어의 왕은 자신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그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여기 있는 누구의 흡혈 능력 덕분에 영원히 사는 것이 가능해졌지. 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굶어야 하고 영원히 밤을 새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어쩌라, 꾸익.]

“어쩌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을 져야지.”

“그게 내 책임이었어?”

정다운은 억울한 표정을 짓자 도플갱어의 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억지라는 건 나도 안다. 그래서 내가 방법도 미리 생각해 놨지. 너, 나를 생명의 사도로 만들어라.”

“……무슨 사도?”

뜬금없는 제안에 순간 제 귀를 의심한 정다운이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사도 말이다. 기억을 뒤져 보니 생명의 사도들은 ‘먹는 행위’를 통해 제물을 바치던데.”

<흐음. 이것 참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알파까지 반응을 보였다.

“류승우의 기억을 살펴보니 생명의 용 에르테아에 대한 내용이 있더군. 생명의 사도가 되면 도우미조차 건드릴 수 있을 정도로 격이 올랐으렷다?”

[이미 잘도 건드리고 있는뎁쇼?]

“너는 전직 도우미라 그렇고.”

[다 기억하니까 부연 설명 없어서 편하시겠네.]

툴툴대며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는 토끼.

그의 손이 닿은 부위를 하얀 손수건으로 강박적으로 벅벅 닦아 내고도 코를 킁킁대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우, 피 냄새. 이렇게 피 냄새가 진해서 퍽이나 생명의 사도가 되시겠네요.]

“언데드였던 리치도 가능했는데, 나는 안 될 이유가 있나?”

[거, 아는 거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으시겠네.]

토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정다운이 귓말로 류승우에게 얼마나 많은 수다를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토끼가 정다운을 쏘아봤다.

[이 입 싼 인간!]

“왜? 딱히 비밀도 아니잖아? 어차피 던전은 우리를 다 지켜보고 있다고.”

뻔뻔하기로는 도플갱어의 왕보다도 더한 정뻔뻔이 여기 있었다.

하기야 그가 뭐만 하면 감동했다며 업적을 척척 던져 주는 던전에게 뭘 더 숨기랴.

힘을 숨기고, 비밀을 숨기고,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딱 질색인 정다운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정다운이 물었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이 뭐야? 생명의 사도가 돼서 영원히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싶다?”

“명쾌하고 좋네. 딱 그거다.”

“알파, 가능해?”

<사도의 격을 얻어서 제사 음식을 섭취하겠다니, 동기는 불순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잠까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아, 왜!”

잘나가다가 초를 치는 알파의 대답에 도플갱어의 왕이 발끈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혹시 내가 도플갱어라서 그런가? 아니면 사람을 죽여서? 인간은 아직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물론 죽이려다 실패한 거지만!”

물론 그 전에 숱한 인간들을 죽인 도플갱어들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자신이 직접 죽인 건 아니니까 일단 우겨 보는 그였다.

토끼가 자꾸 자신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그 숱한 죽음들 속에서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원한다면 앞으로도 인간을 죽이지 않겠다! 어차피 다른 짐승이나 괴물들을 죽여도 흡혈은 할 수 있으니까! 효율은 낮지만 도플갱어들을 죽여도 된다!”

자, 뭐라 하든 다 변명해 주겠노라고 이를 가는 도플갱어의 왕에게 알파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아직 신전의 주인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하?”

그는 완전히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용의 사도가 되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정다운 님을 크게 감동시키는 게 먼저입니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얄밉게 한마디 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정다운의 입꼬리가 어느새 씰룩거리고 있었다.

저 표정은…… 갑이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나 짓는 극한의 우쭐함이었다.

그 표정을 보자 괜히 욱하는 도플갱어의 왕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을이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글쎄다. 내가 요즘 감성이 통 메말라서-.”

[하긴, 님은 어지간한 일로는 감동을 잘 안 하는 무덤덤한 인간이죠. 표정도 항상 무표정이고요.]

토끼까지 합세했다.

무표정이라면서도 서로 쳐다보며 우쭐우쭐 싱글거리는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혹시 평소에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나? 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썰어 줄 수 있다.”

“어째 감성이 더 팍팍해지는 기분인데. 토끼야, 나는 슬프다.”

정다운이 토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슬픈데요?]

“휴우, 나란 인간은 감정이라는 게 없는 냉혈한인가 봐. 이건 혹시 중학생 때 왼팔에 흑염룡을 키우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하긴, 님이 좀 사이코패스 미치광이긴 하죠. 악마왕 정악마. 던쓰, 꾸익.]

주거니 받거니 하는 빈정거림에 도플갱어의 왕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방법으로 격을 높이겠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유일하게 장난기가 없는 알파가 관심을 보였다.

파칙!

도플갱어의 왕의 눈에 피처럼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있지. 무간도의 모든 인간들을 죽이고 제단에 바쳐 스스로 종말의 사도의 격을 얻을 것이다. 종말의 사도가 밥을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음?”

[오?]

“……왜들 그러지?”

그 말과 동시에 자신을 희번덕 쳐다보는 정다운과 토끼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도플갱어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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