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47화>
정다운은 곧장 짐을 꾸렸다.
출발하기에 앞서 류승우에게 귓말을 보내 봤으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투 중이거나 도플갱어의 말대로 다급한 상황일 가능성이 높았다.
“드디어 제가 밥값을 할 기회가 왔군요.”
휴이가 눈을 번뜩이며 앞으로 나섰다.
도살자의 칼과 광폭 스킬이 있다면 메이플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
“밟아.”
삐이이익-!
푸다닥! 파닥파다닥!
토끼가 귀를 막고 비명초를 밟자, 메이플들이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투 하나 없이 앞길이 뻥 뚫렸다.
“아, 휴이 씨, 지금 무슨 말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민망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는 휴이.
지나가던 토끼가 비웃었다.
[풉. 밥버러지.]
뜨끔.
“……?”
정다운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타조 골렘 위에 올라탔다.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 여유 부릴 때가 아니지. 지금부터는 전력으로 이동한다!”
그동안은 같이 다니는 이들의 레벨 업을 위해 비명초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나 지금부턴 속전속결이었다.
* * *
얼마 후.
“이건…….”
정다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벌써 세 번째.
그의 앞에는 지금 하얀 재가 되어 바스라지고 있는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다.
다름 아닌 도플갱어의 시체였다.
하얗게 공포에 질린 리얼한 표정을 보니 죽기 직전의 상황이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표정만 봐도 자연사는 절대 아님. 타살이에요. 범인은 우리 중에 있음.]
토끼가 명탐정처럼 체크무늬 롱코트를 걸치고 코에 걸친 검은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날카롭게 좌중을 훑어봤다.
류승우를 찾아가는 길에 벌써 세 번이나 도플갱어의 시체를 발견한 일행이었다.
그런데 이 세 구의 시체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누구 한 명이서 하루살이 인간들을 식칼로 썰고 다니나 본데요?]
힐끔?
토끼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도살자의 칼로 당한 상처들입니다.”
[후후, 그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역시! 범인은 비실이 네놈이렷다!]
명탐정 토끼가 그를 향해 당당히 손가락질을 했다.
“……아무래도 제 도플갱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나 봅니다. 칼을 움직이는 흔적들이 제 솜씨와 흡사합니다.”
[크윽, 알리바이가 완벽하군. 도플갱어 탓을 하며 살인 혐의를 벗다니.]
명탐정 토끼는 분한 표정으로 수사 일지를 덮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음…….”
마침 타조 골렘 위에 실고 다니던 기절한 여자 도플갱어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앗, 용의자가, 아니, 피해자가 깨어났어요!]
“여긴…… 어디죠……?”
그녀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금발 청안의 미남자를 발견했다.
휴이가 정중하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괜찮으시다면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말씀을 좀…….”
“꺄아아악!”
“네?”
“꼴깍.”
“……네?”
휴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힘차게 비명을 지르고는 곧장 또 기절해 버리는 그녀였다.
휴이가 억울한 표정을 짓자 토끼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푸핫! 범인은 역시 우리 중에 있었네요. 어휴, 얼마나 못생겼으면 기절까지 하지? 던전에서 제일 못생겼네.]
“…….”
휴이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다.
자랑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잘생긴 편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렸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휴이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이분의…… 도플갱어가 우리를 죽이러 다니고 있어요.”
[아싸! 내가 맞췄음! 거봐요. 내가 그럴 거라 했죠?]
냉큼 말을 바꾸고 거들먹거리는 명탐정 토끼였다.
정다운은 휴이를 처음 만난 날 쳐들어온 도플갱어들 중에 휴이의 도플갱어만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그의 머리 위에는 메이플의 알도 달려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전에 이미 다른 곳에서 알이 부화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쯤 태어났다면 그 후로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안 죽고 살아 있지? 나한테 핸드폰 받아 간 것도 아니면서.”
[열심히 사람을 죽였나 보죠.]
“그럼 도플갱어들은 왜 죽이는데?”
그 말에 여자 도플갱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도플갱어를 죽여도 수명을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으잉? 갑자기요?]
“혼자만 치사하네.”
어리둥절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아낸 도플갱어 상식과는 완전히 정반대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살자의 칼.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에요.”
* * *
“끄아악! 다, 당신이 나를 왜!?”
도플갱어들은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동족’이 왜 자신들을 학살하는지, 끝까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숨이 멎었다.
스아아…….
죽는 순간 몸 전체가 새하얀 재로 변해 가는 시체들.
그리고 그 앞에 피를 뚝뚝 흘리는 식칼이 있었다.
뚝 뚝 뚝…….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감듯, 식칼을 타고 흐르던 붉은 핏물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게걸스럽게 빨아먹었다.
피도.
그 피에 담겨 있던 생명까지도 모두.
‘도살자의 칼’을 손에 든 사내는 이미 죽어 버린 그들의 머리에 대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왜냐니? 도플갱어라는 존재는 어차피 죽여도 되는 놈들 아니던가? 죽기 위해 태어나는 놈들을 죽였는데 뭐가 문제지?”
백발에 적안.
사내는 놀랍게도 광전사 휴이 번스타인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
그리 멀지 않은 높이에서는 도우미 루갈이 팔짱을 끼고 그의 행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크르륵. 하여간 진짜 엉망진창이란 말이지.]
이보다 엉망진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을까?
인간을 죽이라고 존재하는 도플갱어들은 정작 핸드폰에 코를 처박고 돌아다니느라 인간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있었고.
또 어떤 도플갱어는 ‘흡혈’ 옵션이 붙은 무기를 들고 태어나는 바람에, 인간 대신 동족들만 주구장창 죽이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루갈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가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크륵! 나도 이런 건 처음 알았군! 설마하니 도플갱어가 흡혈 무기로 동족을 죽이면 수명을 빼앗아 올 수 있었을 줄이야.]
루갈은 지금까지 도플갱어가 메이플의 알에게서만 수명을 갈취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족에게서 수명을 갈취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체력을 흡수하는 흡혈 무기를 사용하면 성체가 된 도플갱어의 수명도 갈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르륵. 경이롭구나. 던전 스스로가 난이도를 조절하는 셈인가.]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드는 루갈이었다.
최근에 지나가던 오류종자 한 놈이 ‘핸드폰 무료 나눔’을 하는 바람에 무간도의 난이도가 대폭 하락되었다.
그런데 그랬더니 갑자기 저런 특별한 괴물이 나타나 강제로 난이도를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크륵. 그런데 이렇게 동족을 많이 죽이다 보면 스스로 ‘왕위’에 오를지도 모르겠군.]
도플갱어의 왕.
그 호칭이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를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격’을 얻게 되는 법.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휴이의 도플갱어가 무심한 표정으로 위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봐. 왕위가 뭐지?”
[……음?]
루갈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뒤를 쳐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휴이의 도플갱어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이봐. 귀가 먹었나? 아까부터 혼잣말 하는 늑대. 루갈, 너한테 한 말이다.”
[크륵!? 어, 어떻게!]
루갈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도플갱어 따위가 자신을 정확하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던전의 창조물 따위가 도우미를 알아봤다고!?]
“왜? 원래 내가 못 봐야 하나?”
[네놈…… 언제부터 나를 볼 수 있게 된 거지?]
콰릉!
순간 루갈의 눈에 강렬한 살기가 폭살했다.
도우미가 던전의 괴물을 건드리는 건 규정상 금지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던전의 오류라면?
‘오류는 수정한다!’
설령 이곳이 자신이 관할이 아닐지라도!
[대답하라. 도플갱어여!]
“왜?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이거, 무서워서라도 대답해야겠군.”
무섭다고 하면서도 그는 전혀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씨익.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의 대답은 실로 놀라웠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류승우를 죽이고 나서부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류승우를…… 죽였다고? 그 류승우를 네까짓 게?]
“왜? 혹시 죽이면 안 되는 거였나? 내 기억 속을 살펴보니, 엄청 강한 인간이라 한 번쯤 겨뤄 보고 싶었거든.”
[……그렇군. 생명의 용의 사도를 죽였기 때문에 나를 볼 수 있게 된 건가?]
“생명의 용은 또 뭐야? 모를 소리만 골라 하는 녀석이군.”
휴이의 도플갱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늑대인간의 표정이 제법 볼만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왜? 내가 류승우의 등에 칼을 꽂아 넣는 모습은 위에서 미처 못 봤나 보지? 물론 제대로 싸운 건 아니야. 방심할 때 먼저 기습을 했지.”
[허어.]
루갈은 길게 탄식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천히 위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넌, 실수했다.]
“무슨 실수를 했…….”
우뚝.
그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높이 떠오른 루갈의 밑에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서있었던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시. 말해 봐.”
“음? 넌 누구지? 나를 아나?”
휴이의 도플갱어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얼굴은 자신의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부디 헛소리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또박또박 다시 물었다.
“네가. 누굴. 죽였다고?”
“아아, 류승우 말인가?”
“…….”
뿌드득!
그 순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사실은 거짓말이었다고.”
“진짜인데. 그런데 넌 누구지? 혹시 그의 동료였나?”
“다시…… 말하라고!”
콰쾅!
그 순간 ‘그’가 발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흐흐, 공격은 네가 먼저 했다?”
휴이의 도플갱어는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해 냈다.
“광폭!”
콰르릉!
전신에서 피처럼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자 그의 움직임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그는 자신을 향해 미친 황소처럼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말했다.
“이봐, 왜 그래? 너는 누군데 류승우가 죽었다는 말에 이렇게 발광하는 거지?”
“흙 뭉치기!”
콰드득!
‘정다운’의 손이 그가 서 있는 땅을 붙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엇, 땅이?”
바닥이 갑자기 푹 꺼지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거대한 흙뭉치가 날아왔다.
“……이런, 젠장!”
쿠와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