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39화>
‘살기가 지나칠 정도로 짙은데?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거지?’
사실 토끼는 휴이 번스타인을 보자마자 그에게 배어 있는 짙은 피 냄새를 맡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워낙 약골이라 동정의 대상이었던 참가자가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몰라볼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참가자들의 인생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토끼는 피 냄새를 맡은 순간부터 경계심이 들었다.
몰라볼 정도로 변한 휴이가 갑자기 정다운을 공격한다면?
과연 저 만사태평한 인간이 그 기습적인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을까?
물론 정다운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평소에 항상 자신의 그림자 속에 그림자 하인들을 숨겨 놓고 다니긴 했다.
하지만 휴이의 살기가 너무 짙은 점이 어쩐지 꺼림칙했다.
결국 토끼는 꺄르륵 웃고 떠들면서도 눈으로는 계속 휴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여차하면…… 내가 대신 죽여야 할지도. 페널티를 각오하고라도.’
그 누구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은밀한 살기가 토끼의 눈빛에 맺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비명초를 우려낸 차의 효능은 놀라웠다.
휴이가 차를 마시는 순간 그의 안에서 계속 불안하게 꿈틀대던 살기가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이다.
주르륵.
“……음? 왜 갑자기 눈물이?”
휴이는 자신의 눈에서 갑자기 흐르는 눈물에 당황했다.
그리고 매사에 날이 서 있던 불안정한 마음이 묘하게 편안해진 것을 느끼고 더욱 당황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토끼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계심만큼은 절대 늦추지 않았다.
‘에혀, 참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라니까.’
실제로는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도 토끼는 자신의 살신성인의 정신에 혼자 우쭐해했다.
반면에 정다운은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자신의 이런 치밀한 심계를 알고나 있는지, 그저 처음 보는 외국인 손님에게 뭘 대접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흠, 독일인이면 뭘 먹지? 소시지? 핫도그?”
문제는 메뉴였다.
정다운은 독일인에게 쌀밥을 주기도 뭐해서 뭔가 특별한 요리를 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아는 독일 요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소시지는 없지만 소고기는 있었다.
핫도그는 없지만 핫바는 있었다.
“그래, 핫바가 좋겠어.”
[갑자기요?]
“응. 핫바가 먹고 싶어졌어.”
[…….]
결국엔 전지적 정다운 시점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심연어의 하얀 속살을 챡챡챡챡 잘게 다지고, 쌀가루와 슬러그를 버무려 둥글둥글 길게 반죽했다.
그 후 소금을 뿌려 반죽의 간을 맞춘 뒤 나무 막대에 푹 꽂았다.
그리고 지글지글 끓는 기름에 하나씩 쏙쏙 투척 시작!
챠르르륵!
[오호, 이거 제법?]
기름 안에서 핫바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자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누구보다도 빠르게 양손에 핫바 하나씩을 집어 들고 입에 쑤셔 넣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먹을 자격이 있었다.
[햐으으! 흐거어!(뜨거워!)]
냠냠냠.
뜨거워도 절대 뱉지는 않았다.
……꿀꺽.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휴이 번스타인도 입맛을 다시며 그 뒤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스스로의 모습을 퍼뜩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내, 내가 왜?’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그만 휩쓸려 버렸다.
워낙 평소에 못 먹고 못 살았더니, 도저히 맛있는 냄새와 비주얼의 유혹을 이겨 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믿는 바가 있었다.
‘혹시라도 음식에 독을 탄다 해도 상관없다. 나에겐 독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의 ‘광폭’ 스킬은 쓰는 순간 몸속의 피가 끓어오른다.
그 과정에서 몸속에 흐르는 독소들이 전부 불타 버리는 부가적인 효과가 있었다.
정다운의 ‘정화’ 스킬과는 방식이 많이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한 셈이었다.
그는 절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레 핫바를 하나 받아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우적.
“……!”
그 순간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경악하고 말았다.
‘이, 이 맛은!?’
쫀득쫀득한 어육을 한입 씹는 순간, 입안에서 팡! 하고 터지는 탄력 있고 탱글탱글한 핫바의 식감이라니!
휴이는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절대 방심은 금물이었다.
흠칫!
“……!”
그는 결국 발견하고 말았다.
정다운이 핫바 안에 교묘하게 숨겨 놓은 이질적인 풀 내음을 그의 혀가 포착한 것이다!
‘이 향은 뭐지? 어육에 허브향이 난다! 설마 독초인가?’
역시 이 모든 게 전부 함정이었던 것이다!
“큭!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정다운을 쏘아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도는 좋았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감히 음식에 독초 섞다니!”
“깻잎 싫어해요?”
정다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핫바와 깻잎을 섞으면 그 맛과 향이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이걸 완벽한 조합을 이해 못 하다니?
“독일 사람 입에는 깻잎향이 잘 안 맞나? 그럼 이거라도 뿌려 먹던가요.”
찌이익.
“……!”
갑자기 정다운이 아랑곳 않고 빨간 무언가를 꺼내 핫바 위에 뿌려 주자 휴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니, 던전에 왜 저런 게 있는 걸까?
“토, 토마토케첩을 대체 어디서 구했지?”
[이 인간이 만들었죠 뭐.]
할짝.
토끼는 이미 옆에서 케첩을 날름날름 핥아 먹고 있었다.
안개섬 마을에서 서리해 온 농작물 중에는 방울토마토가 껴 있었다.
그 방울토마토를 으깨고 양파와 전분 물에 섞어 약한 불에 졸였더니 완성된 게 바로 이 토마토케첩이었다.
물론 식초, 설탕,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단맛과 새콤한 맛까지 잡아냈다.
“평소에 먹방 좀 봐 두길 잘했지. 어때요? 제법 먹을 만하죠?”
오랜만에 토끼가 아니라 사람에게 생색을 낼 수 있어서 정다운은 신이 났다.
“……맙소사. 진짜 케첩이잖아, 이거?”
휴이는 정신없이 핫바를 베어 물었다.
핫바와 깻잎도 막강했는데 케첩까지 힘을 합치자, 결국 휴이의 두껍던 철벽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부턴 그냥 군말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부터일 것이다.
그의 배가 나오기 시작한 건.
정다운은 구정 때 내려간 시골 할머니처럼 쉴 새 없이 그의 입에 먹을 걸 쑤셔 넣기 시작했다.
“고기 구울 건데 먹을래요?”
“…….”
“생선 회 칠 건데 한입 거들래요?”
“…….”
“먹는 김에 밥 한 공기 할래요? 아, 독일인도 된장찌개 먹을 줄 아나?”
“……”
“아, 그리고 이것도.”
“……제, 제발 그만.”
휴이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하루 종일 모자이크 하우스에 머물며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휴이 번스타인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위기는 처음 겪는 것이었다.
마치 사육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사육장에서 주는 사료가 너무 맛있어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배가 불러서 터질 것 같은데, 또 막상 한입 맛을 보면 너무 맛있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온천.
그것도 문제였다.
“같은 남자끼리 뭘 쑥스러워하고 그래요? 독일에는 대중탕 같은 거 없나?”
“…….”
서슴없이 허리 아래에 천 한 장만 두르고 온천으로 내려가는 정다운을 보며 휴이의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내 앞에서 무장을 해제하는 거지?’
대체 뭘 믿고 저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 해도 저건 좀 아니지 않은가.
‘용기인가, 만용인가. 얼마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인간이란 말인가.’
그를 보고 있으니 생각이 점점 많아지는 휴이였다.
하지만 상대가 저렇게까지 자신 있게 나오니, 자신도 여기서 물러서면 겁쟁이라고 비웃음을 당할 것 같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방어구는 단출했다.
자신은 방어보단 극단적인 공격에 치우쳐져 있는 광폭의 전사.
맨몸으로 있어도 무기만 꺼내 들면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냐! 그 승부, 얼마든지 받아 주마!’
휴이는 호기롭게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극도로 단련된 전사의 근육이 밖으로 드러났다.
[오오! 몸짱이시네!]
토끼가 박수를 쳤다.
그런데 그가 막상 아래로 내려가 보니 정다운은 온천에 몸을 담그지 않고 그 옆에서 그림자 하인들과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다.
‘설마 매복인가!?’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에 휴이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아,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 몸 녹이고 있어요.”
“먀옹.”
“……뭐 하는 거지?”
그들은 온천 옆에 넓게 펼쳐져 놓은 거미줄 앞에 모여 있었다.
[진짜 뭐 하는 거임?]
뒤따라온 토끼까지 고개를 갸웃하자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아, 이 거미줄 자꾸 만지고 놀다 보니까 특이한 점이 보이더라고.”
[뭔데요?]
“가로줄은 엄청 끈적거리는데, 세로줄은 전혀 끈적이지 않아.”
[으잉? 뭔 말임?]
정다운은 거미줄이 이렇게 끈적거리는데도 정작 거미들은 그 위에서 자유롭게 기어 다닌다는 점이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시간 내서 유심히 살펴보니, 씨실과 날실이 서로 점성이 다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괴물 거미들은 점성이 없는 세로줄만 밟고 다니는 거였어.”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세로줄만 골라내면 실이나 밧줄로 쓰기 딱 좋을 것 같지 않아?”
[그게 말이 쉽죠. 퍽이나 잘 되겠다.]
“어려울 건 또 뭐야?”
해맑게 대답하는 정다운이었다.
괴물 거미의 거미줄은 씨실과 날실이 서로 엇갈려 붙어 있다.
그래서 억지로 뜯어내려 한다면, 둘 다 끊어지거나 오히려 더 엉켜 버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핸드폰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한 상식백과 어플이 있었다.
[꿀팁 백과]
-끈적한 스티커 깔끔하게 떼는 방법!
“드라이기로 스티커를 따뜻하게 데우면 깔끔하게 떨어져요!”
원래 이런 일은 목욕탕에서 하면 잘 되는 법이다.
온천의 노곤노곤한 공기에 거미줄이 마침 적절하게 흐물거리게 변해 있었다.
이 틈에 살짝 손가락으로 떼어 내면?
“짠.”
[대박. 진짜 잘 떨어지네요?]
그의 손길을 따라서 거짓말처럼 똑, 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거미줄을 보며 토끼가 눈을 크게 떴다.
“좋았어. 이런 식으로 점성 없는 거미줄만 싹 골라내 보자고.”
“먀옹!”
요령을 터득했으니 이제부턴 어려울 게 없었다.
정다운과 그림자 하인들은 서로 힘을 합쳐 조심조심 거미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작업이었지만, 일 자체는 쉬웠다.
점성 없는 거미줄을 손으로 뜯어내고, 끈적이는 거미줄은 칼로 끊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은근 재밌는데?”
심봉에 둘둘 말아서 실타래를 만들어 나갔더니 보람이 아주 컸다.
그리고 휴이 번스타인은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멍하니 온천에 몸을 녹이며 구경하고 있었다.
“…….”
마냥 혼란스러웠다.
저게 다 뭐란 말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이상했다.
여긴 어디고 자신은 누구인가?
여긴 던전이고 자신은 참가자였다.
‘그런데 저자는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전혀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이질감에 그는 자신이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곳이 여전히 던전이라는 진실을 되새겨 주는 일이 일어났다.
콰쾅!
“……!”
쭈뼛!
머리 위에서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뭐냐!”
촤아악!
휴이는 벌떡 일어나 온천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다운도 거미줄을 뜯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바쁘네. 새 손님들이 오셨나?”
[그런가 본데요? 그런데…… 오늘따라 왜들 저렇게 피 냄새가 지독하지?]
토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친 고함 소리들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찾아라! 광폭의 전사는 분명 여기 있을 거다!”
“숨지 말고 나와라! 광폭의 전사! 동료들의 복수를 하러 왔다!”
“큭, 웃기고 있군. 복수는 무슨.”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휴이의 입꼬리가 씨익 말아 올라가며 살기 짙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가식적인 것들. 왜 내 무기가 탐이 난다고 솔직하게 말을 못 하는 걸까?”
촤아악!
그의 신형이 온천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양손에는 어느새 저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신의 무기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 칼.
몸에 걸친 방어구라곤 가운 한 장이 전부였지만, 공격이 최고의 방어였다.
그 누구보다도 저돌적인 광폭의 전사 휴이 번스타인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정다운을 향해 말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군. 저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거미줄이나 계속 뜯도록.”
“어? 그 칼은?”
그의 무기를 보자마자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반응에 휴이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왜? 네놈도 내 무기가 탐나나? 죽여서라도 빼앗고 싶을 정도로?”
“음, 아뇨? 그냥 반가워서요. 우리도 마침 그거랑 똑같은 식칼이 있어서.”
“……뭐?”
순간 멈칫하는 휴이 번스타인.
똑같은 식칼이라니?
저게 무슨 헛소리일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옹기종기 앉아 거미줄을 뜯고 있던 그림자 하인들의 손에 짧은 칼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끈적거리는 거미줄을 끊어 내는 용도였는데, 모양새가 마침 그의 무기와 비슷…….
아니,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똑같았다.
“자, 잠깐. 설마 그게 전부?”
휴이는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애병 도살자의 칼이 이곳에 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