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35화>
참가자들이 등천로에 처음으로 도착하게 되는 섬은 매번 다르다.
등천로를 떠도는 부유섬들의 위치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기에서 다음 던전으로 가는 길 또한 매번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니, 참가자들은 결국 저마다 다른 동선을 따라서 등선로를 떠돌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등천로는 다양한 참가자들이 회차에 상관없이 마주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건 검은 여왕의 성을 막 공략하고 등천로에 올라온 오동민도 마찬가지였다.
“어?”
“응? 너는?”
오동민과 지서연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저 하던 대로 슬러그를 피해 다니며 던전을 공략하던 중에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그들의 손등에서 황금빛 문양이 떠올랐다.
서로가 용의 사도임을 확인시켜 주는 문양이었다.
지서연은 놀라워하며 눈앞의 뚱뚱한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 설마 너도 정다운 씨의?”
“그럼 아줌마도요?”
빠직.
순간 지서연의 미소에 상처가 생겼다.
“호호, 기왕이면 누나라고 불러 줄래?”
“네, 이모.”
“……참 예의 바른 아이네.”
“감사합니다!”
“…….”
오동민은 가정 교육을 어찌나 잘 받았는지 예의도 바르고 해맑기 그지 같, 아니, 해맑기 그지없었다.
사실 서로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정확한 호칭이긴 했다.
지서연은 세월의 야속함을 탓하며 등을 돌려 애꿎은 괴물들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슈와악! 콰쾅! 쾅!
무서운 기세로 펼쳐지는 제국창술.
용의 사도 둘이 만나는 순간 괴물들에겐 불행이 시작되었다.
오동민의 괴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냠.”
와드득!
“캬아악!?”
괴물의 앞다리를 붙잡아 과자처럼 호쾌하게 한입 씹어 삼키는 오동민의 기행에 지서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 표정이 안도감으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창술로는 상대하기 번거로운 슬러그들을 갑자기 오동민이 입을 대고 호로록 빨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진공청소기가 따로 없었다.
“서연 이모! 이쪽은 제가 맡을 게요!”
“……어, 그래.”
오동민이 워낙 싹싹한 성격이라 그들은 통성명을 하자마자 친해질 수 있었다.
* * *
또 다른 용의 사도들.
석정호 패거리는 지서연과는 일찌감치 헤어져 다른 섬을 돌고 있었다.
애초에 다른 검은 기둥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 중 용의 사도는 총 두 명으로, 화염충을 부리는 석정호와 생산직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도민준이었다.
그런데 항상 기세등등하던 석정호라도 심연의 안개가 퍼져 있는 섬을 만나면 맥을 못 췄다.
화염충들이 안개에 닿으면 전부 힘을 잃고 녹아 버리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바다에선 그나마 정다운이 곳곳에 만들어 둔 태양석 가로등 덕분에 괜찮았는데, 등천로에서 그런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스킬 사용이 극도로 제한되자 석정호는 불안감을 느끼고 평소보다 성격이 훨씬 예민하고 거칠어지게 되었다.
“이것들아! 횃불 좀 빨리 만들란 말이다! 횃불이 모자라면 너도 나도 다 죽는 거 알아, 몰라!”
“큭…….”
그가 생산직들을 들들 볶는 일이 점점 많아지자 생산직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쌓여 갔다.
“휴,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고요.”
“정다운 씨가 있을 땐 좀 얌전해지더니 결국 얼마 못 가고 또 이러네요.”
도민준은 틈만 나면 울상이 되어 찾아와 투덜거리는 생산직들을 쓴웃음을 지으며 독려했다.
“그래도 석정호도 예전보단 많이 변하지 않았나. 지금은 말만 험할 뿐, 멱살 잡히는 일은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조금만 참게. 심연의 안개가 없는 섬에 가면 다시 기분이 풀리지 않겠나?”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석정호는 점점 더 난폭해졌다.
두려움은 사람의 인성을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한다.
누군가는 겁에 질리면 움츠러들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숨기기 위해 잔인성이 드러나기도 했다.
석정호는 물론 후자였고, 토끼는 처음부터 그러한 사실을 정다운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런 사람들일수록 눈치도 빨라서 강한 자에겐 한없이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석정호는 정다운에 대해 알게 된 후로 절대로 그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선 순한 양이 되어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정다운 입장에서도 그를 딱히 내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진 후로 요즘 들어 다시 그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정도는 점점 심해졌고.
결국엔 파국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 새끼가 진짜!”
콰쾅!
“저, 정호 씨! 끄아악!”
억눌려 있던 그의 분노와 함께 화염충이 결국 동료를 향해 폭발하고 말았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단지 자신이 이렇게나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화염충의 폭발력도 절반으로 축소시켜서 엄포를 놨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하필이면 방어력이 전무한 생산직이라는 게 문제였다.
“크윽! 으아악!”
“괘, 괜찮나!?”
도민준은 극심한 화상을 입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젊은 생산직의 앞을 막아서며 필사적으로 석정호를 뜯어말렸다.
“저, 정호 씨! 진정하게! 이러면 안……!”
“닥쳐! 이 꼰대가!”
“……!”
틀렸다.
이성을 잃고 극도로 흥분한 석정호의 모습에 도민준은 아찔한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콰쾅!
그 순간 옆에서 화염충이 또 폭발했다.
이번엔 또 누가 당했을까?
콰쾅!
또 폭발했다.
비명은 없었다.
‘……왜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 도민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놀랍게도 그 앞엔 상상도 못 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끄, 끄윽…….”
석정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처음 보는 사내에게 목이 잡힌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내의 입가엔 피처럼 잔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 죽이려면 너 같은 놈들을 죽여야 재밌지.”
“……!”
충격적인 상황에 석정호의 일행들은 기겁하며 황급히 무기를 집어 들었다.
“저, 적이다!”
언제 다가온 걸까?
대체 누구지?
의문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 사내는 석정호를 한 손으로 들어올린 채 삐딱하게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신경 끄고 볼일들 봐라. 난 이놈만 죽이고 지나갈 거니까.”
다수에게 포위당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가, 갑자기 이런 놈이 어디서……!’
석정호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압도적인 사내의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주능력은 힘이 아니라 화염충이었다.
‘터, 터져라!’
콰쾅! 쾅!
사내의 등 뒤로 수많은 폭발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흥미로운 스킬이군.”
“……!”
석정호는 눈을 부릅떴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화염충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사내의 전신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피가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결같은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의 심장을 물어뜯을 것처럼 공포스러웠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이 섬에 막 도착한 것 같은데, 선배 입장에서 중요한 규칙 한 가지를 알려 주지.”
이 말은 석정호가 아니라 그의 일행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대지 마라. 그럼 죽는다.”
푹!
사내의 칼이 석정호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자 그 순간 붉게 물들어 있던 사내의 몸이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처음부터 순백색이었던 그의 머리카락처럼.
툭.
결국 그의 손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석정호의 안색도 급속도로 창백해져 갔다.
비현실적인 압도적인 공포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그의 동료들을 향해 사내는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 * *
던전이 리셋된다는 말은 공략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다운이 도착한 섬은 그 흔한 괴물은커녕 유적지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한 섬이었다.
따라서 리셋이 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설마 여기 도착하는 게 공략 조건은 아닐 테고. 음?]
주변을 둘러보던 토끼가 뭔가를 발견했다.
리셋되면서 변한 게 하나 있긴 했다.
그들이 도착한 섬 끄트머리에 갑자기 다른 섬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다리가 생성된 것이다.
[아항, 뭔 일인지 알겠음. 저 다리를 건너가야 진짜 던전이 시작되는 것 같은데요?]
토끼는 폴짝 뛰어올라 다리 너머의 섬을 확인한 뒤 정다운에게로 돌아와 말했다.
[저 섬은 리셋 중이 아니에요. 이 작은 섬들 하나하나가 별개의 던전이라 리셋도 따로따로 진행되나 봐요.]
근처를 돌아보니 이곳과 비슷한 사이즈에 괴물이 없는 작은 섬들이 많았다.
[저 자잘한 섬들 중 어디로 도착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여긴 결국 참가자들이 도착하면 잠시 재정비를 하고 떠나는 스타팅 포인트인 셈인 거임.]
전직 도우미 토끼는 던전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몰아칠 땐 한도 끝도 없이 몰아치지만, 매 게임이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는 치열한 전투를 위해 약간의 정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섬들이 전부 다른 던전이라고?”
정다운의 시선이 부실해 보이는 나무다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리를 넘어가면 진짜 시작이라는 거구나.”
[지옥이 시작되는 거죠.]
토끼는 으스스한 표정으로 정다운을 겁줬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튼 여긴 그럼 안전하다는 거네.”
척척척척.
그는 이미 섬 위에 살림살이를 하나씩 늘어놓고 있었다.
[……뭐 하심?]
“여기서 그냥 노숙할 수는 없잖아? 온 김에 간단하게 텐트라도 만들어 두려고.”
[그게 텐트라고요?]
그가 꺼내 든 것을 보며 토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넓다고 생각했던 하늘 신전도 이젠 좁아터질 지경이었다.
물론 실제론 공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평소에 골렘들이 돌아다닐 길도 넉넉히 필요하고, 간간히 그 녀석들에게 일이라도 시키려면 충분한 마당이 필요해서 세간 살림을 더 늘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한적한 공터를 발견하자 그는 신이 나서 안개섬의 마을 퍼즐(?)을 꺼내 들었다.
폐허였던 건물들을 퍼즐처럼 쪼개서 챙겨 둔 조각들을 블록 놀이하듯이 이어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치덕치덕.
그는 시멘트를 풀처럼 써서 건물을 조립했다.
흙 뭉치기 스킬을 사용하면 시멘트 덩어리를 맨손으로 들고 다녀도 손에 전혀 묻지 않았다.
깔끔하게 잘 뭉쳐진 것이다.
그렇게 소담스러운 건물 하나가 뚝딱 완성됐다.
그리고 그 앞에서 정다운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잘 만들었는데? 신이시여! 이 건물을 정녕 제가 만들었나이까!”
[그냥 누더기 같은데요?]
토끼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폐허에서 가급적 멀쩡한 부위들을 골라 왔다곤 하지만, 서로 다른 모양들과 색깔들의 벽이 누더기처럼 뒤죽박죽 합쳐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이미 그 앞에서 건축계의 거장 같은 표정으로 우수에 젖어 있었다.
“후우, 역시 천재는 외로운 법인가. 넌 진정한 예술을 몰라. 이런 게 원래 볼수록 매력 있는 인테리어라고.”
[안 보면 더 매력 있을 듯요.]
“난 앞으로 여길 모자이크 하우스라고 부르겠어.”
[눼이, 그러시든가요.]
토끼는 끝까지 심드렁했다.
잠시 후 그 앞에 푯말이 하나 생겼다.
[정다운 모자이크 하우스]
그런데 그때였다.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알파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안 좋은 소식?”
<용의 사도 한 명이 죽었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