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34화>
정다운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하나가 성공하자 두 번째 실험을 하고 싶었다.
그림자 비술 (2레벨)
- 그림자에 기억을 덧입혀 실체를 만들어 낸다.
- 그림자 하인 (4/10)
스킬 설명을 다시 살펴봐도 정확히 누구의 그림자라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라도 적용이 된다는 말 아니겠어?’
생각해 보면 세르파가 이렇게 되살아난 이유도 그의 조각상에 그림자 비술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똑같이 생긴 ‘그림자’와 그의 ‘기억’이 합쳐진 결과물인 것이다.
‘결국 재료는 기억과 그림자라는 말이지. 흠, 기억이 남아 있는 그림자라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골렘들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모든 사물에는 그림자가 있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기억이 있어야 하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골렘들의 그림자가 딱 적격이었다.
심지어 골렘이라면 형태도 자유롭게 고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 있게 골렘들의 그림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림자 비술!”
……조용.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쯧.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주제에 벌써부터 달리려 하는구나.]
세르파가 메모리의 품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
정다운도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에이, 될 줄 알았는데.”
[쯧.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네 그림자 외의 그림자들까지 건드리기엔 아직 네 격이 너무 하찮다. 레벨부터 올리도록.]
“그놈의 레벨 진짜.”
정다운은 투덜댔지만, 그래도 나중에라도 가능하다는 거에 만족했다.
“그래도 레벨을 올리면 언젠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네? 막연하게 격을 올리라는 것보단 레벨 업이 차라리 속 편하지!”
[맨날 속 편해서 소화도 잘 되시겠네. 흥, 변비나 걸려 버려라.]
희망차게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그의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악담을 퍼붓는 토끼였다.
하지만 정다운은 구체적인 목표가 생겨서 좋았다.
“좋았어! 레벨을 올리자! 앞으로 모든 일은 그림자 하인들한테 시켜야겠다!”
[정말 소름이네요. 누가 보면 지금까진 그림자 고양이들이 밥이나 먹고 똥이나 싼 줄 알겠네.]
반면에 세르파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자 비술을 연구하던 마녀의 뒷모습을.
지금까지 정다운의 행동은 과정은 조금 달라도 궁극적으로는 마녀가 연구하던 모습과 의식의 흐름이 비슷했다.
애초에 그가 이번에 세르파를 깨워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세르파가 죽기 전에 조각상에 그림자 비술을 걸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조각상을 만들어 그림자를 뽑아낸다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방금 정다운도 정확히 그 순서대로 흙 조각에서 그림자를 뽑아내려고 한 것이다.
옆에서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의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그림자 비술의 궁극적인 형태에 닿아 있었다.
‘……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인간 따위를 감히 우리 주인님과 비교하려 하다니.’
투덜거리는 정다운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세르파는 다시 메모리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아무렴 어떤가?
생각이 비슷해 봤자, 어차피 그는 재능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 * *
“그럼 슬슬 떠나 볼까?”
다음 날, 정다운은 다른 섬으로 이어지는 3개의 검은 기둥 앞에 서 있었다.
아쉽게도 그를 배웅 나온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메모리가 미로 밖으로 걸어 나오자 안개섬은 바로 공략되었고, 그 순간 메모리도 자취를 감췄다.
<류승우 님의 미니 제단은 오른쪽 기둥 방향에서 감지됩니다.>
번쩍!
알파 네비게이션의 화살표가 오른쪽을 가리키며 깜빡거렸다.
“모두 노를 저어라!”
[노를 저으랍신다! 이히!]
정다운의 말을 따라 외치는 토끼는 어느새 해적 선장 모자에 까만 애꾸눈 안대까지 끼고 방방 뛰어다녔다.
한 손에는 갈고리도 들고 있었는데, 끝이 뾰족하진 않고 플라스틱 옷걸이처럼 도톰했다.
그에 반해 노를 젓는 노예(?)들은 우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크워어!”
이번엔 문어 골렘뿐만 아니라 다른 골렘들까지도 심연어의 비늘로 코팅한 거대한 노를 들고 하늘 신전에 추진력을 더했다.
출렁! 콰오오!
덕분에 엄청난 속도로 검은 기둥 위를 날아가기 시작하는 하늘 신전이었다.
[이번엔 부디 류승우 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당.]
“응?”
어쩐 일로 토끼가 응원을 다 하자 그가 토끼를 쳐다봤다.
[지켜보니까 님이 너무 약해 빠져서 동료가 필요하겠더라고요.]
“네가 그럼 그렇지. 그래도 나 제법 강해지지 않았어?”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토끼가 피식 비웃었다.
[글쎄요? 님이 성장하는 만큼 다른 참가자들도 강해진다는 걸 잊지 마셈. 류승우 님은 어떻겠음?]
그건 정다운도 궁금했다.
류승우는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을까?
* * *
한편, 류승우는 극도로 분노해 있었다.
“대체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콰르릉! 콰릉!
그는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사자 같았다.
분노에 찬 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푸른 뇌전이 전신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처럼.
극도로 압축된 그의 분노가 전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시뻘건 핏덩이가 되어 있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경악스럽게도 그것은 괴물의 시체가 아니었다.
바로 참가자들의 시체였다.
그리고 이 끔찍한 참상을 저지른 이가 바로 류승우의 앞에 오연히 서 있었다.
“……모두 죽일 만한 놈들이었다.”
전신이 피칠갑이 된 사내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는 류승우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개운한 표정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극도로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붉게 물든 하늘보다 그가 밟고 있는 시체들이 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모두가 죽었고.
지금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은 사내와 류승우 단둘뿐이었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늘 죽이고 싶었고, 드디어 죽였을 뿐이다. 죽여도 되는 놈들이었으니까.”
“궤변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 명분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피식.
이를 악무는 류승우의 말에 사내는 슬쩍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을 막아선 그를 쳐다봤다.
“류승우, 너는 죽이고 싶지 않다. 비켜라.”
“못 비킨다면?”
“죽겠지.”
콰르릉!
그의 시선이 류승우의 눈을 쳐다본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암울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류승우는 시선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의 전신은 더욱 찬란한 푸른 뇌전으로 빛날 뿐이었다.
마치 전신을 붉게 물든 사내에게 대항하듯이.
“……재미없군.”
결국 눈을 먼저 피한 것은 사내였다.
“류승우, 너와 말을 섞는 건 시간 낭비다. 애초에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다.”
“우리라고 말하지 마라. 나는 너 같은 살인마가 아니니까.”
“큭.”
그 말에 사내는 다시 웃었다.
이번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애초에 괴물을 죽이는 것과 인간을 죽이는 것이 뭐가 다르지? 생명을 죽인 횟수는 나보단 네가 더 많을 것 같은데?”
“다르다. 던전 게임은 인간들끼리 서로 힘을 모아 괴물들에게서 살아남는 게임이다.”
“…….”
단호한 그의 음성에 사내의 눈빛에 맺혀 있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교과서적인 말이군. 그래서 내가 너를 죽이기 싫다는 거다.”
스르륵.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 새빨갛게 물들어 있던 그의 몸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처럼.
스으읍, 후우…….
그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가 내쉬었을 때는 이미 그의 몸에는 단 한 방울의 피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듯.
그의 몸에 가득하던 상처들까지도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붉게 물든 시체 위에서 혼자만 깨끗해진 사내의 모습은 아까보다 더욱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비켜라. 아무리 너라도 나와 싸우면 죽는다.”
“그건 붙어 봐야 알겠지.”
“……그래, 네가 가란다고 순순히 물러설 타입은 아니긴 하지.”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류승우의 모습에 사내가 삐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와의 전투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푸른 광휘의 기사 류승우는 강하다.
하지만 먼저 덤벼 온다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류승우가 아무리 강해도 어차피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자신일 테니까.
언제나처럼.
그는 결국 류승우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너도 여기서 죽어라.”
콰르릉!
그 순간 류승우도 총력을 끌어 올렸다.
푸른 광휘의 기사가 전장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콰르릉!
그리고 천지가 진동했다.
그런데 둘의 힘이 격돌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6차 공세가 시작됩니다.]
쿠르릉!
그들을 향해 지긋지긋한 던전의 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 사내는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거 아직 우리끼리 싸울 상황이 아닌가 본데?”
“도망갈 생각이냐!”
“물론 그럴 생각이다.”
콰르릉!
류승우가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이미 발을 빼기로 작정한 사내를 그가 잡을 방법은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너는 나를 못 잡는다. 네가 최강의 사냥꾼이라면, 나는 최악의 사냥감 출신이니까.”
사내는 류승우의 압도적인 공격들을 능숙하게 피해 내며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류승우가 맹공을 펼치며 그를 따라붙었지만, 어느새 사내는 사라지고 그의 짓궂은 목소리만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맴돌 뿐이었다.
“류승우, 공세가 시작되었으니 너는 늘 하던 대로 네 동료들이나 지키러 가라.”
“거기 서, 이 자식아!”
“싫다, 이 자식아.”
콰르릉!
* * *
정다운이 도착한 부유섬은 군도였다.
수많은 작은 섬들이 암초처럼 서로 흩어져 있었는데, 그 전체가 하나처럼 같은 위치를 유지하며 부유하고 있었다.
“어느 섬에 정박해야 되지? 알파?”
<류승우 님의 미니 제단은 좀 더 깊숙한 곳에서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섬들 어딘가에 있는 건 맞지?”
<특별한 오류가 없는 한 그럴 거라 예상됩니다.>
토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고민해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일단 가까운 섬에서 내립시당. 어차피 검은 기둥에서 멀어지면 범독수리들이 덤빈다고요.]
“그래, 그나마 멀쩡한 섬을 좀 골라 볼까?”
[문제는 다들 부실해 보인다는 거죠.]
가까이 보이는 부유섬들은 진짜 암초 수준으로 작았다.
어느 정도냐면 하늘 신전보다 작은 섬도 많았다.
“그나마 저게 낫겠네.”
정다운의 손가락이 섬 하나를 가리키자 바하무트가 척, 하고 경례를 붙였다.
[바로 이동하겠나이다. 블리자드!]
쿠오오오!
검은 기둥을 벗어나는 순간 바하무트가 운전대를 잡았다.
하늘 신전은 범독수리들이 몰려오기 전에 재빨리 부유섬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오류! 던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장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반가운 오류 시스템이 이곳이 던전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우와, 던전이 뭐 이래? 완전 맹탕이네요.]
토끼는 잡초밖에 없는 부유섬의 상태를 보며 김샌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별거 없어 보이는 작은 섬이 그들이 내려선 순간 다짜고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던전이 리셋됩니다.]
“응? 갑자기?”
[뭐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혼자 공략되고 난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