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31)화 (231/393)

<던전리셋 231화>

‘이거다!’

세르파를 보자마자 정다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잔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며 머릿속에서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스테이지-4의 던전 도우미였던 세르파는 이미 죽고 없었다.

‘어차피 죽어도 싼 나쁜 놈이었지. 종말의 용의 부하니까.’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세르파는 달랐다.

그는 종말의 용과 계약한 부분을 싹둑 잘라 내고, 마녀를 그리워하던 세르파의 기억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자 비술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면 답은 나왔다.

‘기억의 조각들끼리 만나게 해주면 서로 윈윈이겠는데?’

그는 마녀의 기억, 즉 메모리에게로 세르파를 데리고 갈 계획을 세웠다.

‘진짜 세르파는 이미 죽고 없지만, 어차피 메모리도 진짜 마녀는 아니니까 쌤쌤이지.’

[그러게요. 서로 비슷한 애들끼리 모여 살면 암수 서로 정답겠네.]

세르파를 앞에 두고 정다운과 토끼와 귓말로 쑥덕쑥덕 음모(?)를 꾸몄다.

‘솔직히 영혼이니 생명이니, 그런 복잡한 개념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쉽게 생각하자고.’

[그래요. 죽기 전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죽어서라도 이룰 수 있게 해 주면 좋은 거죠 뭐.]

“그런 의미에서.”

척.

“나와 함께 가자. 네 주인에게 데려다줄게.”

세르파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정다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놈,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하는 거지?]

경계심 가득한 말투였으나 이미 세르파의 그림자는 그의 감정에 따라 불안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원을 정확히 꿰뚫어 본 제안이었다.

그리고 사실 정다운은 세르파의 대답 따윈 별로 관심도 없었다.

“응, 사양할 필요는 없어.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들을게.”

들썩!

[……!?]

그가 손짓을 하자 갑자기 골렘들이 우르르 몰려와 세르파의 조각상을 다짜고짜 들쳐 맸다.

[큭! 뭐, 뭐 하는 짓이냐!]

크게 당황하는 세르파를 향해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그림자 팔찌를 흔들었다.

“뭐긴? 착한 짓이지. 일단 자고 있어. 다시 눈을 떴을 땐 주인님 앞일 테니까.”

[자, 잠깐! 나에게 무슨 짓……!]

“레드 썬.”

딸랑!

[…….]

그림자 비술이 해제되는 순간 세르파의 그림자는 힘없이 조각상 안으로 스며들었다.

*   *   *

세르파는 일종의 지박령이었다.

조각상의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와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길들인 그림자 고양이도 아니라서 그림자 비술로 일으켜 세웠어도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래서 정다운은 조각상을 통째로 아라크네의 탑 꼭대기로 들고 갔다.

“그림자 비술.”

번쩍!

[네 이놈! 나를 어떻……!]

세르파는 다시 눈을 뜨자마자 정다운을 노려보며 호통을 치려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정다운이 아니었다.

“우와! 엄청 큰 고양이다! 고양이가 말도 한다!”

[……!]

자신을 호기심 가득하게 쳐다보고 있는 작은 소녀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세르파의 몸이 덜컥 굳어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꼬리 끝까지 털을 바짝 세운 채로 앞에서 종알거리는 작은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메모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떠 있었다.

“오빠, 얘 진짜 내가 키워도 되요?”

“응, 거미와 둘만 살면 너도 심심할 거 아냐.”

“우왕!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게 길냥이의 의견 따윈 물어보지도 않고 입양처가 결정되었다.

[무섭지도 않음? 님보다 2배는 큰데?]

“모르는 소리.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어요. 뚱냥이는 사랑이고, 말도 하면 금상첨화죠.”

토끼의 말에 메모리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우쭐댔다.

[…….]

세르파는 재잘거리는 그들의 대화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토록…… 그토록 일생을 그리워하던 이가.

기억 속에만 아스라이 남아 있던 어렴풋한 그림자가.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눈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품에 포옥 안기며 묻고 있었다.

기억 속의 그때와 똑같이.

‘야옹아, 너 이름이 뭐니?’

“야옹아, 너 이름이 뭐니?”

[……!]

오싹!

순간 세르파의 털이 쭈뼛 섰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게 똑같았다!

이 햇살 같은 미소! 

맑고 영롱한 목소리!

‘말도 안 돼!!’

메모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다운을 돌아봤다.

“우움? 왜 아무 말도 안 해? 오빠, 얘 이름 없으면 내가 지어 줘도 돼요?”

“맘대로 해. 어차피 네가 주인이니까.”

정다운이 허락이 떨어지자 메모리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메모리는 아직 시기적으로 세르파를 만나 본 적 없는 시절의 마녀의 조각이었다.

정다운도 굳이 세르파에 대한 여러 내막들을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현재로 이어졌다.

메모리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우움, 그래, 좋았어! 그럼 얘 이름은 ‘세르파(Sherpa)’라고 할래요. 도우미라는 뜻인데 앞으로 서로 돕고 살자는 의미로. 세르파, 너도 좋지?”

‘그럼 이름은 세르파라고 하자. 도우미라는 뜻인데 앞으로 서로 돕고 살자는 의미로. 세르파, 너도 좋지?’

오싹!

[……!]

세르파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건 꿈일 것이다.

반드시 꿈일 것이다.

너무도 소중해서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오랜 기억이 지금 이 순간 꿈처럼 눈앞에서 생생히 재현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주인님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은 미소로 웃어 주며 자신을 꼬옥 안아 주고 있었다.

덥석!

“헤헤, 세르파, 우리 이제 같이 사는 거야. 앞으로 평생!”

‘세르파, 우리 이제 같이 사는 거야. 앞으로 평생!’

‘아아, 아아아……!’

오랜 세월 힘껏 버텨왔던 세르파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아, 그래. 이거였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다.

번쩍!

세르파의 그림자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거대했던 그의 몸집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주인님의 작은 품에 안길 수 있을 만큼 그는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그렇게 작고 여린 검은 고양이로 되돌아간 세르파의 입에서 미약하고 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전 그때처럼.

니야아앙……!

“우와, 귀여워어! 우리 세르파는 재주가 많은 아이네!”

메모리는 자신의 품 깊숙히 파고드는 작은 고양이를 안아 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크흥, 감동적인 순간이네요. 킁킁.]

토끼는 콧물을 훔치며 으쓱거렸다.

그리고 정다운은…… 세르파가 작아지면서 바닥에 떨군 목걸이를 냉큼 집어 들었다.

“찾았다. 마녀의 방울!”

[야잇! 감동도 모르는 인간아! 꼭 그걸 지금 챙겨야 했냐! 이쯤 되면 사이코패스 아님?]

“무슨 소리야? 이런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낸 게 바로 난데. 던전도 감동할걸?”

[흥, 웃기고 앉았네!]

코웃음을 치는 토끼였다.

하지만.

번쩍!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최초 업적 달성!]

“추억을 되새기다!”

그림자 연구의 참된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림자를 통해 소중한 추억의 순간을 재현시킨 당신의 갸륵한 마음씨에 던전이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 보상 : <그림자 비술> 스킬

보상은 즉각 이루어졌다.

딸랑!

“……!”

그 순간 정다운의 손목에 차고 있던 그림자 팔찌가 빛으로 변하더니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번쩍!

<스킬>

그림자 비술 (1레벨)

- 그림자에 기억을 덧입혀 실체를 만들어 낸다.

- 그림자 하인 (4/5)

아이템의 특수 옵션이라 1레벨로 고정되어 있던 그림자 비술의 레벨 제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 해낸 업적에 따른 레벨 업까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림자 비술> 스킬이 2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그림자 하인 (4/10)

[맙소사. 아이템이 스킬로 변했다고? 이런 게 가능해?]

토끼는 경악했다.

참가자들이 스킬을 얻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이템의 옵션을 흡수하는 방식은 또 처음 봤다.

물론 스테이지-1에서만 살았던 자신이 던전의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확실히 마법에 재능도 없는 인간이라도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 그림자 비술이 스킬이 되어 버렸네? 이제 레벨 업도 가능하겠는데?”

정다운은 무엇보다 마지막 줄에 있는 그림자 하인의 숫자를 보며 기뻐했다.

“어쩐지 그동안 그림자 고양이가 4마리에서 잘 길들여지지 않는다 했더니, 1레벨은 처음부터 5마리까지가 한계였었나?”

그림자 비술은 ‘격’에 따라 그림자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올라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 ‘격’이라는 개념은 정다운 입장에선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스킬로 깔끔하게 재정립되었으니 알아보기가 훨씬 편해졌다.

이제부턴 속 편하게 스킬 레벨을 올릴수록 그만큼 스킬 효과도 점점 좋아지게 된다는 말이었다.

[흠. 2레벨이 되니까 10마리까지 길들일 수 있게 된 걸 보면, 레벨이 올라갈수록 점점 숫자도 늘어난다는 말이네요.]

“크으, 그럼 마스터하면 최소 50마리라는 거잖아?”

토끼의 말에 정다운은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그림자 하인 50마리를 우르르 끌고 다닐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다.

그림자 하인의 효용성을 생각했을 때 이번 업적 보상은 상상 이상으로 끝내주는 것이었다.

“크으! 역시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오는 구나. 역시 될놈될!”

[웃기시네! 이번에도 또 얻어걸린 거면서.]

“무슨 소리야? 내가 이번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무 1만 그루 베어 봤어? 안 해 봤으면 말을 마. 그러다 숲의 분노도 샀다니까?”

[와, 세상 뻔뻔한 거 봐. 누가 보면 자기가 직접 벤 줄 알겠네요.]

그의 뻔뻔함에 치를 떠는 토끼였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이번에 얻은 세르파의 목걸이에서 방울을 똑 뜯어냈다.

스킬이 되어 사라진 건 본래 가지고 있던 그림자 팔찌였고, 이번에 얻은 건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다.

“자, 먹어라.”

먀옹?

그는 그림자 고양이 한 마리를 불러 입에 방울을 쏙 넣어 주었다.

그림자 비술이 스킬이 되었다는 건 그림자 하인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마녀의 방울을 먹은 하인은 스킬을 쓸 수 있는 그림벨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나와라, 나의 그림벨들아.”

스르륵!

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2명의 그림벨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이보다 더 좋은 윈윈이 또 있을까?

마녀는 평생의 반려동물을 얻었고.

세르파는 그리운 주인님을 만났고.

자신은 노예, 아니,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분신을 얻었다.

……쿠르릉!

한편, 퀘르쿠스는 야수의 숲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정다운의 기척이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을 참가자들이 눈치 보면서 조심조심 지나다니고 있었다.

숲이 황폐해져서 던전의 난이도는 대폭 내려갔지만, 그 대신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아으, 진짜 무서워 죽겠네!’

‘왜 하필 유적지 근처에 서 있는 거냐고!’

퀘르쿠스가 갑자기 변덕을 부려 유적지를 밟고 지나가는 순간 자신들은 한 방에 몰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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