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30)화 (230/393)

<던전리셋 230화>

[님이 잘못했네.]

토끼의 맹비난이 시작되었다.

“아니, 내가 뭐 알고 죽였냐고…….”

[심지어 때려죽임.]

“안 죽였으면 우리가 죽었을…….”

[길냥이 학살마. 환경 파괴범. 던쓰.]

“…….”

[휴, 악마는 뭐 하지? 이런 인간 지옥에 안 데려가고? 아참, 그 악마가 바로 여기 있구나?]

“……던쓰는 뭔데?”

[던전 쓰레기.]

“…….”

그래. 더 변명해서 뭐 하랴.

인정한다. 미안하다.

무진장 미안했다.

억울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진짜 진짜로 정당방위였지만.

죽어도 싼 놈이었지만.

“아 놔. 이래서 내가 사연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니까…….”

사연을 알고 보니 세르파는 엄청나게 짠한 존재였다.

정작 주인이었던 마녀에 대해선 거의 기억도 못 하면서,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을 살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던전도 다 자동화로 돌려놓고 마력을 차근차근 축적했다.

오로지 마녀, 아니, 검은 여왕의 부활을 위해서.

[크르륵. 애초에 ‘검은 여왕’이라는 이름을 지은 게 바로 세르파다.]

루갈은 말했다.

세르파는 자신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마녀를 그림자 비술로 불러냈다.

하지만 그림자라서 검은 실루엣만 볼 수 있었다.

검은 여왕.

그녀에게선 늘 자신을 향해 웃어 주었던 그녀의 밝은 미소도, 따뜻한 눈빛도 볼 수 없었다.

그 후로 세르파의 집착은 더욱 강박적으로 변해 갔다.

그는 그림자 비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선 보다 더 많은 마력이 간절히 필요해졌다.

마녀를 수도 없이 조각한 이유?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되새기고 싶었으리라.

그림자로는 볼 수 없는 온전한 형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머리를 부비고, 그 발아래 엎드려 잠들고 싶었으리라.

그는…… 마녀의 고양이였으니까.

하지만 루갈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그 계획이 성공했을지라도 마녀의 부활은 어차피 불가능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크르르, 가능할 리 없지. 그래 봤자 그림자 비술이 만들어 내는 건 기억의 조각일 뿐, 진짜 마녀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최소한 아라크네의 탑 정도는 만들었을 듯요?]

“그러게.”

정다운은 토끼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자동화 시스템도 그렇지만, 세르파는 상위 던전에 있는 현상들을 연구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흉내 내는 녀석이었다.

그 모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메모리’ 같은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면 말이 됐다.

비록 그게 온전한 마녀의 실체는 아닐지라도.

함께 울고 웃고, 서로 대화도 가능한 수준의 주인님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어쩌면 세르파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에 겨웠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러기 전에 우리 던쓰님이 패 죽였지만요.]

“으윽.”

정다운은 양심통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이히! 여기 던쓰가 있다네-. 에헤라디야!]

오랜만에 신이 나 버린 토끼가 우줄우줄 어깨춤을 추며 정다운을 놀렸다.

사실은 세르파를 죽이는 데는 자신도 거들었지만, 사소한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지. 잠깐만?”

움찔?

하지만 정다운은 그때의 일이 생각나 버렸다.

“토끼, 엎드려.”

[훗,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토끼는 코를 쓱 훔치며 겸허히 바닥에 엎드려뻗쳤다.

그리고 궁둥이가 빨개질 때까지 곤장을 맞았다.

쨕!

[끼약!? 이 동물 학대범아!]

*   *   *

“아무튼 중요한 건 여기에 마녀의 방울이 있느냐야.”

[찾아봅시다.]

그들은 엉망진창인 세르파의 공간을 샅샅이 뒤졌다.

어딜 봐도 돌조각밖에 없었지만 혹시라도 있을 마법적인 요소를 찾기 위해 카메라 어플을 번갈아 가며 확인했다.

토끼도 개인폰 하나를 받아 따로 흩어져 돌아다녔다.

[으으, 이러다 눈이 빠질 것 같아요.]

“왜? 틀린 그림 찾기 하는 것 같아서 재밌지 않냐?”

[그건 또 무슨 종류의 노가다임?]

“노가다? 아하.”

정다운은 노가다라는 말을 듣자 기발한 방법이 생각났다.

“그렇지. 어차피 수고하는 김에 이 조각들을 원래 모습대로 하나씩 조립해 나가면서 찾아보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으엑, 이걸 전부요? 이 조각상들 족히 천 개는 넘을 것 같은데요?]

토끼는 황당했다.

정다운은 이미 1만 피스 입체 퍼즐을 앞에 둔 소년 같은 얼굴로 손가락을 우두둑 풀고 있었다.

“뭐, 하나씩 하다 보면 언젠간 되지 않겠어?”

[그게 말이 쉽지……. 아니지, 말만 들어도 안 쉽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평소에 이런 거 취미로 하는 사람들 많아.”

정다운은 쉽게 생각했다.

유심히 관찰해 보니, 조각상들은 깨진 부위가 큼직큼직하고 서로 위치가 달랐다.

일부러 조각들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것도 아니라서 퍼즐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이 조각들을 박살 낸 존재는 바로 바분이었다.

그가 조각들을 꼼꼼하게 짓이겨 부쉈다면 어려웠겠지만, 엄청난 힘을 휘둘러 우악스럽게 파괴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조각 하나당 한 대씩 맞은 수준에 불과했다.

“바하무트, 잠깐 나와 봐.”

철커덕!

[부르셨나이까. 헉? 아이고, 이런 난장판이 있나!]

마법 창고에서 나오자마자 기겁하는 바하무트에게 정다운이 명령했다.

“정신없지? 지금부터 여길 정리할 거니까, 미니 바하무트들 최대한 많이 소환해.”

[……?]

잠시 후 그들 앞에는 10마리의 작은 눈사람들이 아장아장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호우!]

[호우! 호우!]

정다운은 바하무트가 미니 바하무트들과 시야를 공유한다는 점을 적극 활용했다.

미니 바하무트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해 퍼즐이 맞는 조각들을 찾아서 자신에게 알려 주게 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붙이는 건 그와 그림자 하인들의 몫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1) 조각들의 단면에 시멘트를 발라 접착시킨다.

2) 시멘트가 굳을 때까지 그 위를 거미줄로 단단히 동여매 형태를 고정해 둔다.

3)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시오. 끝날 때까지.

“어때? 간단하지?”

[…….]

해맑게 우쭐거리는 정다운을 보며 토끼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아잣! 내가 또 찾았다! 여기 이 조각이요! 딱 맞을 듯! 아, 빨리 좀 와 보라니까요!]

토끼가 더 신이 나 버렸다.

“오, 진짜네? 잘 찾는다.”

[에헴! 이게 바로 나임!]

[주인님! 저는 더 많이 찾았나이다!]

[너님은 치사하게 물량이잖아! 솔직히 이건 나누기 10 하고 스코어 매겨야 함!]

어쩌다 보니 경쟁이 붙어 버렸다.

토끼 팀 : 토끼, 정다운, 그림자 하인 하나.

바하무트 팀 : 바하무트, 그림벨, 그림자 하인 둘.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와, 어느새 절반이나 했네?”

[아직 절반밖에 못 한 거죠! 자, 이번엔 이거 붙이셈!]

처음엔 항상 싫다고 투덜대지만, 막상 해 보면 항상 본인이 제일 흥분해서 날뛰는 토끼였다.

덕분에 마녀의 조각상들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원래 모습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찍이 물러나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루갈.

[공동묘지를 보는 것 같군, 크르륵.]

같은 모습으로 줄지어 서 있는 마녀들의 모습은 을씨년스럽고 어두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발랄하게 떠들며 놀고 있는 저 녀석들의 정신 상태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크르륵, 이봐. 저 조각상은 뭔가 모습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뭔데? 어?”

그가 발견한 마녀의 조각상은 다른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마녀가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품에 박살 난 무언가를 안고 있었으며, 그 곁에는 몸을 둥글게 만 고양이가 깨져 있었다.

“아, 이거 혹시?”

불현듯 정다운의 촉이 발동했다.

바분을 죽이고 얻은 마녀의 나무 조각이 떠오른 것이다.

[오래된 나무 조각 +6] [비활성]

- 내구력 : 0/100 (%)

- 옵션 : 부패의 저주 (6레벨)

나무 조각을 꺼내 조각상과 비교해 본 토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헐, 진짜다! 이 조각상 완성시켜 보면 나무 조각이랑 모양이 똑같을 것 같은데요?]

순간 정다운과 토끼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정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 조각부터 완성시키자!”

그들은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앗. 고양이 궁둥이를 찾았음!]

[주인님! 토끼 인형의 머리를 찾았나이다!]

[히익? 내 머리다!]

찾다 보니 점점 고양이만 빼고 조각상이 완벽해져 갔다.

결국 마지막 조각을 찾아낸 것은 토끼였다.

[아싸! 고양이 머리 찾았다!]

토끼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고, 세르파의 머리를 우승 트로피처럼 치켜들고 세레모니를 하기 시작했다.

[음하하! 봤냐! 최후의 승자는 나다!]

“응, 가져와. 붙이게.”

[넴.]

정다운은 마지막 조각을 시멘트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나무 조각을 10배로 뻥튀기해 놓은 듯한 조각상이 눈앞에서 완성되었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하면 될까나.”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림자 비술.”

딸랑.

그림자 마법사 세르파의 조각상은 애초부터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리라.

그의 그림자 팔찌가 흔들리는 순간 조각상의 그림자가 한차례 출렁거리며 길게 늘어났다.

번쩍!

그림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녀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매끄럽게 굴곡진 검은 실루엣.

흔들리는 꼬리.

나타난 건 바로 그림자 고양이였다.

그런데 그 그림자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2미터를 훌쩍 넘겨 버렸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세르파. 마녀의 고양이 세르파다. 너희들은 누구인가.]

“말도 한다고?”

[대박!]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루갈도 경악했다.

[크르륵! 맙소사. 세르파라니!]

[너는…… 늑대 루갈이군.]

놀랍게도 세르파는 루갈을 알아보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크륵! 나를 알아보겠나?]

[못 알아볼 이유는 또 뭔가.]

그림자로 이루어진 세르파는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지?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아, 그런가. 이제 보니 나는 내가 아니었구나.]

세르파는 씁쓸히 고개를 떨궜다.

그림자 비술의 대가였기에 누가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금방 자신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세르파가 아니었구나. 나는 세르파의 기억. 나의 비술은 결국 반쪽짜리 성공을 거뒀구나.]

반쪽짜리 성공이라고?

그딴 건 다 말장난일 뿐이었다.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면 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래. 나는…… 결국 또 실패하고 말았구나.]

후우욱!

“……!”

오싹!

갑자기 세르파에게서 퍼져 나온 음울한 감정의 물결에 직격당한 정다운은 심장이 옥죄는 기분을 느꼈다.

그림자 고양이는 악몽을 실체화한다.

하지만 그 정점에 서 있는 세르파는 악몽 그 자체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크하하, 참으로 얄궂은 일이구나. 내 그렇게 노력했거늘, 지금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악몽이구나.]

세르파는 앞에 서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관심도 주지 않은 채 혼자 웃고 혼자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처럼.

그러나 그걸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기엔 입이 근질거리는 이들이 이곳에 한가득 있었다.

[흠흠, 저기요? 고양이 양반?]

빼꼼 손을 들고 토끼가 앞으로 나섰다.

정다운도 성큼 앞으로 나섰다.

“나도 분위기 깨서 진짜 미안한데, 그 목에 걸고 있는 방울 좀 나 주면 안 될까?”

[……네놈들 죽고 싶은가? 이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 줄은 알고 감히 그딴 말하는 건가?]

까드득!

그림자가 이를 악물어도 이런 소리가 나는 줄은 몰랐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그들의 말에 세르파에게서 날선 분노가 일렁거리자 주변의 기온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느낌이었다.

‘진짜 철없는 것들…….’

루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눈앞의 놈들을 찢어발길 듯한 세르파의 기세에도 정다운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뻔뻔하게 딜을 걸었다.

“주인님 만나고 싶지 않아? 그 방울 주면 내가 만나게 해 줄 수 있는데.”

[……!]

그 말에 세르파의 몸이 덜컥 굳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이라도 들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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