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29화>
던전에서 참가자들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스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체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스킬도 있고, 처음부터 천천히 지치는 스킬도 있고, 방식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건 역시 ‘흡혈’이었다.
도살자의 칼에도 붙어 있는 옵션이기도 하지만, 전투를 하면서 상대의 생명력을 갈취해 체력을 보충하는 스킬이었다.
진짜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먹어야 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적을 죽이거나 상처만 내도 체력이 올라가는 방식이 더 많았다.
그런데 정다운에게 생긴 ‘나무 베기’ 스킬은 뜬금없이 그 흡혈의 대상이 사람이나 괴물이 아니라 ‘나무’라는 것이 특이했다.
근면 성실한 나무꾼에게 주는 보상이라서 앞으로도 열심히 지치지 않고 나무를 베라는 뜻으로 느껴졌다.
정다운은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이 스킬 너무 좋은데? 앞으로는 싸우다가 지치면 나무를 베면 되겠구나!”
[그게 뭔 개똥 같은 상황임?]
토끼가 혀를 찼다.
싸우다 말고 갑자기 나무를 벤다니, 상상만 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정다운은 스킬을 실험해 보기 위해 바로 숲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를 직접 베어 봤다.
“나무 베기!”
번쩍!
스킬의 효과가 도끼에 적용되었다.
쾅 쾅 쾅! 쩌적!
벌목 옵션이 없는 도끼였는데도 불구하고, 도끼질이 묘하게 능숙했다.
벌목 도끼가 나무를 대상으로 날이 더 잘 들게 해 주는 방식이었다면, 나무 베기 스킬은 그를 진짜 숙련된 나무꾼처럼 만들어 주었다.
헛손질도 거의 없고, 도끼질에 들어가는 힘도 덜 들어갔다.
그런데 효율은 더 좋았다.
‘마치 도끼와 하나가 된 느낌인데?’
그는 스킬 설명에 있는 ‘벌목 속도가 빨라진다’라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는 게 도끼가 아니라 검이었다면, 검의 대가 소드 마스터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벌목 도끼까지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되리라.
쿠웅!
나무 한 그루를 성공적으로 베어 내자마자 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체력 : 83/100(%)
체력 : 84/100(%)
“오, 나무 한 그루에 1퍼센트쯤 오르는 것 같은데? 이 계산대로라면 나무 100그루쯤 베면 죽다가도 살아나겠는데?”
[말이 쉽지, 빈사 상태에서 잘도 나무 벨 정신이 있겠네요. 0퍼센트 가까이까지 떨어지면 거의 시체나 다름없다고요.]
“그런가? 그럴 땐 장작을 패면 어떨까? 그냥 나무 베는 것보단 쉽잖아.”
[이 요령만 가득한 인간아.]
그는 이번엔 소지품에서 장작들을 꺼냈다.
“나무 베기!”
쾅! 콰직!
스킬을 쓰니 장작 패기도 훨씬 쉬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작으로는 체력 수치가 전혀 올라가지 않았다.
[체력 회복은 땅에 붙어 있는 나무를 벨 때만 적용되나 본데요? 나무를 죽여서 흡혈하는 느낌인 듯.]
졸지에 나무 흡혈귀가 된 정다운이 나무의 시체, 아니, 장작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에이, 아깝다. 필요할 때마다 상비약처럼 장작 꺼내서 체력 채우려고 했더니만.”
[나는 당연히 안 될 줄 알았음. 님은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 게 문제임.]
“그럼 그냥 필요할 때마다 나무부터 심고 베야겠다.”
[……?]
토끼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무 흡혈귀가 이번엔 빈 땅에 어린 나무 묘목들을 심고 먹이를 주고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헨델과 그레텔에게 과자 사탕을 주는 마녀 할망구처럼 묘목 위에 정화된 뼛가루를 솔솔 뿌려 주며 말했다.
“많이 먹고 얼른 자라렴.”
[……다 좋은데 입맛은 왜 다시는 거임? 소름 끼치게.]
“왜 이렇게 얘들이 빨리 안 클까? 밥 더 줄까?”
정다운 마녀 할망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묘목들을 쳐다봤다.
꼬물꼬물 나뭇잎이 자라나는 속도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쥐똥 비료까지 팍팍 추가해 주었다.
“많이 먹고 얼른 크렴.”
쑥쑥! 쑥쑥!
묘목들의 자라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물론 그래 봤자 지렁이가 기어가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묘목 입장에선 빛의 속도로 키가 자라고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쩍쩍 튼살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옳지! 잘 큰다! 힘을 내!”
그리고 열심히 자라나는 나무의 목을 가차 없이 쳐 버렸다.
“나무 베기!”
쾅! 쾅! 쩌저적!
체력 : 84/100(%)
체력 : 85/100(%)
아직 어린 나무라서 2그루를 베었더니 1퍼센트가 올랐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효과였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이구나. 어린 나무는 200그루는 베어야 죽기 전에도 다시 살아나겠다.”
[아 진짜. 아니라니까요. 쉽게 생각하지 마요. 체력이 회복되더라도 심각한 상처 같은 건 낫지 않는다고요.]
“앞으로는 소지품에 묘목 좀 담아 다녀야겠다.”
[…….]
나무 흡혈귀가 이번엔 골렘들에게 앞으로는 어린 묘목들은 부러뜨리지 말고 살려서(?) 납치(?)해 오라는 사악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끼를 잡은 그의 시선이 퀘르쿠스를 매섭게 노려봤다.
쿠릉! 쿠르릉!
“……역시 이걸론 못 잡겠지?”
[어림도 없죠.]
얼른 눈에 힘을 뺐다.
커도 너무 컸다.
심지어 퀘르쿠스는 처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거의 아파트 수준이었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은데?”
[크르륵. 당연한 일이다! 네가 나무를 베면 벨수록 숲의 분노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아, 진짜?”
기다렸다는 듯이 루갈이 엄포를 놓자, 정다운과 토끼가 동시에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런 중요한 걸 왜 지금 말해?”
[나빴다. 그런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었다고? 지금까지 자기가 얻어먹은 밥이 몇 그릇인데, 밥값도 못하네.]
움찔.
[미, 미안하다. 나도 몰랐다. 퀘르쿠스를 직접 보는 건 나도 처음이라…….]
무의식적으로 겸연쩍은 표정으로 변명하는 루갈이었다.
토끼가 이때다 싶어서 그를 몰아붙였다.
[웃기시네. 알고 있었던 말투였는데요?]
[그, 그냥 내 원래 말투다. 크르륵.]
‘응? 그런데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지?’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지만, 이미 초식 동물을 상대로 기세 싸움에서 밀렸다.
그의 꼬리가 바닥으로 시무룩 쳐져 있었다.
“아무튼. 그럼 결국 1만 그루의 나무만큼 퀘르쿠스도 커졌다는 말이네?”
[음, 그럼 어쩌죠? 나무 베기 스킬을 마스터하면 퀘르쿠스도 벨 수 있으려나 했는데, 그러다간 쟤도 점점 더 커지겠어요.]
토끼는 심란해졌다.
앞으로 나무를 더 벴다간 퀘르쿠스가 하늘을 뚫고 우주 끝까지 커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정다운은 태평했다.
“에이, 못 죽이면 어때. 지금도 바보 됐는데.”
퀘르쿠스의 눈과 귀가 되어 주던 숲은 이미 절반 이상이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퀘르쿠스는 정다운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조금 전에 잠깐 묘목을 심었을 때는 우렁차게 다시 움직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금방 베어져서 다시 시무룩 걸음을 멈춰야 했다.
쿠르릉…….
이쯤 되니 그냥 경치 좋은 관광 명소 느낌이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저 그림자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데? 저거 왠지 마법진처럼 생기지 않았어?”
[뭔 마법진이요? 엥? 진짜네?]
정다운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간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처음에는 나무 그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나뭇가지와 잡초들에 뒤섞여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숲이 점점 벌거숭이가 되어 가면서 그 그림자들이 서로 엮이고 합쳐지며 어떤 규칙성을 지닌 거대한 마법진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앗! 그림자 마법이다! 세르파의 마법이 틀림없어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정다운은 카메라 어플을 통해 다시 그 마법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확실히 액정 너머의 세상에선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법이 확실한 것이다.
“뭘 위한 마법인 거지? 위험한 건가? 알파, 좀 알아보겠어?”
<던전 자동화 시스템입니다. 확실히 이런 방식이라면 별도의 관리가 없어도 반영구적으로 유지가 되겠군요.>
알파는 감탄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훼손될 일이 극히 적은 마법진이었다.
<그런데…… 마법진 안에 은밀하게 다른 마법배열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분의 창고열쇠와 비슷한 패턴입니다.>
“어, 그 말은 설마?”
[앗! 그거 분명 세르파의 비밀 공간일 거임! 우와, 대박! 이렇게 스케일 큰 비밀 공간이라니!]
토끼는 엄청나게 흥분했다.
바분의 창고만 해도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과연 세르파의 비밀 공간에는 어떤 대단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정다운도 기대감이 차올랐다.
“좋았어. 들어가 보자. 이번에도 열쇠 같은 게 필요하려나?”
[그러게요.]
대답은 루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크릉. 내가 보기엔 열쇠는 이미 네놈들에게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마침 그의 시선이 정다운의 손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다운은 그림자 팔찌를 들어 보였다.
“아하, 그러네. 바로 이거였구나! 세르파의 유품이 바로 열쇠였어!”
이제야 모든 게 한 줄로 엮이는 기분이었다.
바분의 유품이 창고 열쇠였듯이, 세르파의 유품인 그림자 팔찌도 그의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는 열쇠였던 것이다!
“가 보자!”
[가죠!]
<위치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번쩍!
그들 앞에 황금빛 화살표가 나타나 휘청휘청 방향을 가리켰다.
둘은 신나서 알파 네비게이션을 따라 이동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은 퀘르쿠스의 바로 근처였다.
쿠릉! 쿠르릉!
그들을 발견한 퀘르쿠스가 우렁찬 용트림을 시작하자 토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어? 여기 조금 위험하겠는데요?]
“괜찮아. 얘들아! 여기부터 다 썰어 버리자! 나무 베기! 나무 베기!”
“크워어어!”
“미야옹!”
콰쾅! 쾅, 쾅!
정다운까지 가세하자 벌목 작업이 전보다 더 빨라졌다.
순식간에 그가 서 있는 곳 주위가 쥐 파먹은 머리처럼 숲에 땜빵이 나 버렸다.
쿠르릉…….
다시 시무룩 멈춰서는 퀘르쿠스.
[낄낄. 바보다, 바보.]
[…….]
숲의 분노가 농락당하는 모습에 루갈은 착잡했다.
한편으론 감탄스럽기도 했다.
퀘르쿠스를 막는 일은 애초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숲의 눈을 멀게 하는 발상도 물론 괴상망측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 정도 속도로 나무를 벨 수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척.
“여기구나.”
알파의 화살표가 바로 밑을 가리키는 곳에서 정다운이 걸음을 멈췄다.
문을 여는 방법이야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림자 비술!”
파아앗!
그 순간 그림자 마법진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쿠르릉?
그들이 사라진 땅 위에 퀘르쿠스는 멀뚱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 * *
번쩍!
한순간에 뒤바뀐 시야.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정다운과 토끼, 루갈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게 다 뭐지?”
그들 앞엔 처참하게 박살 난 수백개의 조각상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누가 부쉈는지는 몰라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조각상의 얼굴들은 전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 마녀다.]
“찾았다.”
뜻하지 않게 마녀에 관련된 장소에 정확히 도착하게 된 그들이었다.
“크으, 봤어? 역시 난 뭘 해도 될 놈이라니까! 여기 어딘가에서 그림벨, 아니 마녀의 방울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퉤, 재수 없어. 그냥 얻어걸린 거잖아요.]
웃는 얼굴에 가차 없이 침을 뱉는 토끼였다.
그에 반해 루갈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쯤 되면 운명이다. 크르륵.]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다.
애초에 이곳은 나무를 다 베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장소였다.
도우미의 비밀 공간이라는 건 참가자들이 발견하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정다운은 늘 그렇듯이 참가자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돌출행동을 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남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이면을 찾아내기도 하는 법.
루갈은 발치에 차이는 마녀의 얼굴 조각을 하나 집어 들고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쯧. 그런 거였나. 어리석은 녀석.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그는 한눈에 이 조각들이 전부 세르파의 솜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세르파.
흉내 내기를 좋아하던 마녀의 고양이.
환상을 실체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그림자 마법사 세르파.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루갈은 비로소 깨달았다.
[크륵. 멍청한 것.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겨우 하는 게 이 짓거리인가.]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정다운의 물음에 루갈은 씁쓸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 녀석은 마녀를 부활시키고 싶어 했던 것 같구나…….]
비록 종말의 용과 계약하며 소중한 기억들을 잃었을 지라도.
비록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초심을 잃고 사악하게 변질되었을지라도.
세르파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이곳에서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