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27화>
[님은 초심을 잃었음.]
토끼는 정다운을 매도했다.
한때 그가 함정 밑에 갇혀 땅만 파먹고 살았을 때만 해도, 그는 땅 밑으로 뻗어 내려온 나무뿌리들을 잘라서 목재를 구해야 했다.
땅 위에 있는 나무들은 괴물들이 무서워서 엄두도 못 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목재들을 아껴 가며 횃불도 만들고 가구도 만들어 쓰곤 했다.
[그랬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언젠가부터는 새로 캘 생각은 않고 펑펑 쓰기만 했으니 이렇게 다 탕진해 버린 거잖아요.]
“뭐 어때. 어차피 지척에 널린 게 나무라고.”
[아니, 이렇게 건방질 수가? 다크모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딱 님을 두고 한 소리네요.]
“이상한 속담 즉석에서 만들어 내지 마, 이놈아.”
[으익?]
정다운은 종알종알 잔소리를 하며 귀찮게 따라다니는 토끼를 붙잡아서 멀리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벌목 작업은 순조로웠다.
아니, 그 이상을 한참이나 초월했다.
그는 작업 효율을 위해 골렘들을 세 조로 나누었고, 1조에겐 나무를 뽑아 오라 하고 2조에겐 잔가지를 잡아 뜯어내게 시켰다.
그리고 3조는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덤벼드는 괴물들을 막아 내는 용도였다.
그렇게 골렘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1차 작업이 끝난 나무들이 도착하면, 그다음은 그림자 목수들의 차례였다.
먀옹 먀옹!
쾅쾅! 쾅쾅! 퍽퍽, 쾅쾅!
그림자로 물든 황금 도끼들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그림자 고양이들.
사실 장작 좀 팬다 하는 목수들이라면 도끼질 두어 번이면 나무를 쪼갤 수 있긴 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무토막으로 만들 때의 얘기였고, 뿌리째 뽑아낸 원목을 동강 낼 때는 전기톱 같은 전문 장비를 써야지 일반 도끼로는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림자 하인들은 애초에 힘들다는 개념이 없었다.
무념무상 그 자체.
마치 공장 기계처럼 최대치의 힘과 한결같은 페이스로 끝도 없이 도끼를 내리칠 뿐이었다.
그런데 2레벨 벌목 옵션의 효과가 상상 이상이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식칼로 무를 써는 느낌.
아무리 두꺼운 원목이라도 도끼날을 퍽퍽 내리칠 때마다 나무 허리가 푹푹 잘려 나갔다.
아무리 두꺼워도 이쪽저쪽에서 한꺼번에 달려들면 못 자를 나무가 없었다.
이쯤 되니 진짜 공장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목재들 사이를 나무 공장장장 그림벨 부장님이 친히 돌아다니시며 소지품 안으로 차곡차곡 목재들을 수거해 갔다.
그러다 가끔씩 그림자 목수들의 힘으로는 버거울 정도의 엄청 두꺼운 나무들이 나타나면?
“먀옹!”
그럴 땐 그림벨 부장님이 멋지게 등장해 외뿔멧돼지의 힘으로 친히 해결해 주셨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그림벨 부장님의 모습에 그림자 하인들은 모두 그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봤다.
덕분에 정다운 공장주는 이번에도 또 놀고먹고 있었다.
“크으, 이렇게 완벽한 시스템이라니! 이게 내 공장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구나!”
[흥, 재수 없어. 자화자찬 쩌시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음.]
“허헛, 토끼 경리,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내 완벽한 공장에 문제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
정다운이 꼰대 같은 포즈로 껄껄거리며 토끼가 지적한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의외로 문제는 묘한 부분에서 발생했다.
애초에 생산자와 하청업자들 간의 밸런스가 문제였다.
고작 4마리밖에 안 되는 그림자 하인들로 골렘들이 뽑아오는 물량을 억지로 감당하다 보니 공장 기계가 점점 파손되기 시작한 것이다.
[황금 도끼 +3]
- 내구력 : 7/100 (%)
- 옵션 1 : 단단함 (1레벨)
- 옵션 2 : 벌목 (2레벨)
야수의 숲이 점점 좁아지는 속도에 맞춰서 도끼의 내구도가 파격적으로 쭉쭉 떨어지고 있었다.
정다운은 깜짝 놀랐다.
“아니, 단단함 옵션이 있는데도 이 정도라고?”
[황금으로 만든 도끼라서 더욱 그렇기도 하고요.]
날이 눈에 띄게 무뎌진 황금 도끼들의 상태를 보며 토끼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지금 님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속도로 벌목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음? 류승우 님이 피터지게 싸울 때나 이런 속도로 무기 내구도가 떨어진다고요.]
무기라는 건 어차피 소모품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도 내구도가 0이 되는 순간 강화된 옵션들은 전부 효력을 잃게 된다.
그는 별수 없이 잠시 공장 문을 닫기로 했다.
도끼들의 내구도를 다시 올리려면 숫돌로 날을 전부 갈아 줘야 했다.
한번 내구도가 0까지 떨어지고 나면 재활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얘들아, 갈아라.”
쓱싹 쓱싹.
쓱싹 쓱싹.
그림자 하인들이 손에 숫돌을 하나씩 들고 옹기종기 마주 앉아 연마질을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다시 100퍼센트까지 완벽하게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생하는 만큼의 효과는 있었다.
- 내구력 : 13/100 (%)
- 내구력 : 15/100 (%)
- 내구력 : 21/100 (%)
- 내구력 : 24…….
“좋아, 좋아. 쭉쭉 잘 오르네.”
[님도 놀지 말고 좀 거들라고요. 그림자 고양이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심?]
“네가 할 소리냐?”
[…….]
뜨끔한 토끼였다.
토끼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아셈? 인생을 살다 보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임.]
“그게 뭔데?”
[놀고먹는 거죠. 아얏!]
꿀밤을 먹었다.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숲이 조용해진 기분이 드는 건 왜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토끼는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몸을 오소소 떨었다.
정다운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괴물들이 좀 뜸하게 나타나는 것 같은데?”
[다 잡아서 그런 건…… 역시 아니겠죠?]
토끼도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주변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그 빽빽하던 나무들이 죄다 소지품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그럼 슬슬…… 저쪽으로 이동할까?”
정다운이 그림자 하인들을 데리고 나무들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쿠르릉……!
“……!?”
처음에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던전이 리셋되는 건가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숲이…… 움직이고 있었다.
쿠르릉!
[뭐, 뭐임! 저거 뭔데!?]
토끼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과장도 비유도 아니고, 진짜로 숲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들이 서로 합쳐지며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갔다.
그 크기는 골렘들보다 족히 서너 배 이상!
문제는 그 나무의 형태가 점점 인간처럼 팔과 다리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인간이라고 하기엔 몹시 두껍고 비대했으나, 그것은 분명히 팔과 다리였다.
그 다리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일어나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여기가 원래 저런 괴물도 나오는 던전이었어?”
정다운은 새삼 야수의 숲을 공략했던 참가자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절대 아니다. 트리 가드(Tree Guard) ‘퀘르쿠스’는 규격 외의 존재다.]
마침 그의 앞으로 굳은 표정으로 나타난 루갈의 말에 정다운이 되물었다.
“트리 가드라고? 나무 지킴이?”
대답은 의외로 알파에게서 나왔다.
<퀘르쿠스는 나무를 지키는 수호신의 이름입니다. 전설상의 존재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크르륵! 애초에 네놈이 숲을 너무 많이 훼손시킨 게 문제였다. 퀘르쿠스는 숲을 파괴한 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존재다.]
단호한 루갈의 말에 토끼가 정다운를 쏘아보며 버럭 화를 냈다.
[으익!? 그럼 큰일 난 거잖아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내가 나무 좀 작작 베라고 했잖아요!]
“와, 이놈 태세 전환 봐라? 네가 언제 그랬냐!”
[……흥. 지금 우리끼리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님.]
토끼는 갑자기 정색하고 퀘르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쿠르릉! 쿠릉!
놈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숲이 흔들리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깨어난 수호신을 칭송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의 진로를 방해하는 다른 풀과 나뭇가지들이 스스로 방향을 틀어서 앞길을 터 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야수의 숲 전체가 정다운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고생하는 이들은 바로 숲을 탐험하던 다른 참가자들이었다.
“으악! 숲이 미쳤어!”
“이게 무슨 일이야!”
“괴물이다!”
야수의 숲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나무들이 갑자기 꿈틀거리지 않나, 그에 놀란 온갖 괴물들이 사방팔방 미쳐 날뛰지 않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덕을 보는 이들도 상당했다.
숲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안전했다.
결국 문제는 퀘르쿠스였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었다.
바로 속도.
“그래도 속도가 느려서 다행이네.”
정다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퀘르쿠스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수십 미터의 나무 거인과 맞서 싸우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느릿느릿 다가오는 퀘르쿠스의 움직임은 기껏해야 사람이 빠르게 걷는 수준이었다.
골렘들도 그렇지만 크고 무거운 괴물들일수록 움직임이 둔하고 느린 게 단점이었다.
정다운이 골렘을 한도 끝도 없이 크게 만들 수 있어도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효율 때문이었다.
혹시 골렘의 핵을 여러 개 박으면 해결될까 싶어서 실험해 봤더니, 그냥 둘로 쪼개져서 개별적으로 살아나는 식이었다.
하지만 알파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느리다고 절대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이 페이스로 퀘르쿠스는 평생토록 우리를 쫓아다닐 겁니다. 그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우리의 신전들을 전부 짓밟아 가며.>
[히익? 그냥 게이트 열고 튀면 어떰?]
잽싸게 잔머리를 굴리는 토끼에게 루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크르륵! 트리 가드 퀘르쿠스는 눈이 따로 없다. 대신 모든 숲과 나무들이 퀘르쿠스의 눈이 되어 네놈들의 위치를 알려 줄 것이다.]
정다운도 잔머리를 굴리며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럼 부유섬으로 도망치면?”
[크륵, 소용없다. 그곳에도 숲은 존재하니까.]
루갈은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그곳에 있는 숲이 새로운 퀘르쿠스로 변해 네놈을 공격할 것이다. 너희가 숲을 파괴했듯이, 이제부턴 숲이 너희를 파괴할 것이다.]
[휴, 이래서 인간이란……. 한 인간의 만용이 대자연의 분노를 샀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차는 토끼였다.
어차피 나쁜 놈은 정다운 하나뿐이었다.
자신은 죄가 없었다.
역시 일 안하고 놀고먹길 잘했다는 생각에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놀아야겠다고 다짐하는 토끼였다.
그런데…… 정다운은 생각보다 훨씬 나쁜 놈이었다.
“흠, 숲과 나무가 눈이 되어 준다고? 그럼 다 베어 버리면 눈도 없어지는 거 아냐?”
[크륵!?]
[뭣이라고!?]
정다운 나무꾼이 호기롭게 황금도끼를 들어 올리고 그림자 목수들을 돌아봤다.
후회해 봤자 이제 와서는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 베어 버리자!”
“먀옹!”
“크워어!”
[히익! 이 미친 인간이!?]
진정한 파괴가 시작되었다.
그는 골렘들과 그림자 목수들을 끌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쾅쾅! 쾅쾅!
[크르렁! 네놈, 진정으로 숲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은 거냐!]
쿠릉! 쿠르릉!
루갈이 당황하며 울부짖었지만, 말을 들을 인간이 아니었다.
뒤에서는 계속 퀘르쿠스가 쫓아다니고 있었지만, 가까이 오면 얼른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또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게이트 설치!”
급기야 숲 곳곳에 게이트까지 설치해 두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더니 술래잡기가 더욱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