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26화>
야수의 숲에는 크고 작은 유적지가 많다.
종류도 형태도 다양한 폐허들.
그 안에는 ‘야수의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야수들을 형상화한 공포스런 조각상들과 벽화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야수들 중에는 과거 이 숲에 군림했던 늑대인간 루가루 일족을 형상화한 유적지도 존재했다.
하지만 어떠한 영문인지 루가루의 유적지는 다른 유적들에 비해 유독 처참하게 붕괴되어 있었다.
[……저, 보물 상자를 지금 나더러 가져오라는 말인가?]
정다운의 부탁에 루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정다운에게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었다.
원래라면 늑대인간의 수호부를 가진 자에게 호출당한 루가루 일족은 어지간하면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물론 무조건적인 복종 관계는 아니었다.
애초에 수호부는 ‘늑대인간의 친구’라고 인정받은 자들에게만 주는 증표.
그래서 친구 사이에 가능한 수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때문에 그 횟수도 사람마다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수호부를 받은 사람들은 일평생 그 소중한 기회를 가슴 속에 품고 살다가, 목숨이 위급할 정도로 정말 중요한 기로에 처했을 때만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루갈은 그러한 관례에 대해서 정다운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정석적인 방법으로 수호부를 얻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부탁’이라는 걸 듣는 순간 마음이 심란해지고 말았다.
[크륵, 참으로 얄궂은 부탁이로구나.]
절묘한 우연일까, 아니면 더럽게 꼬인 운명의 장난일까.
[설마하니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나에게…… 일족의 보물을 직접 내 손으로 들고 오라고 할 줄이야…….]
보물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는 과거에 찬란했던 영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정다운과 토끼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서로 속닥거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혼자 심각한 척한데?”
[그러게요.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어지간히도 게으르네. 상자 하나 들고 오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니까요.]
“에라, 치사해서 그냥 내가 하고 만다.”
기다리다 못한 정다운이 부유석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아, 아니다! 내가! 내가 직접 하겠다! 크르렁!]
“……!”
콰르릉!
갑자기 루갈의 전신에서 엄청난 투기가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흡사 전쟁터에 부모의 원수라도 죽이러 가는 듯한 기세에 옆에 있던 애꿎은 참가자들만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 엄마야……!’
‘심장 멎는 줄!’
‘제발 자꾸 자극하지 좀 말라고!’
그들은 모기 좀 피해 보려다가 늑대를 만난 햄스터들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가, 간다!]
파앗!
루갈은 정다운을 제치고 높이 뛰어올라 보물 상자 앞으로 내려섰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보물 상자를 번쩍 들고 다시 날아올랐다.
한편 세이렌은 머리 위로 자꾸 휙휙 지나가는 도우미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면 위에 늘어지게 누워 하품이나 찍찍하며 아련하고 애절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쿠웅!
정다운은 자신의 앞에 보물 상자가 도착하자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싹싹 비볐다.
“흐흐, 좋았어. 뭐가 들어 있나 한번 보실까나?”
끼이익.
보물 상자의 뚜껑이 천천히 열리자, 그 광경을 뒤에서 병풍처럼 지켜보는 다른 참가자들의 입에서 동시에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도우미가 친히 들고 온 보물이라 감히 욕심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보물 상자는 언제나 강렬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뭐가 들어 있을까?’
‘무기? 방어구?’
‘식량?’
‘의외로 함정일지도…….’
쿠웅!
드디어 뚜껑이 열리고, 정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오, 이건?”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작은 손도끼였다.
[빙의된 정령 도끼 +4]
내구력 : 100/100 (%)
옵션 1 : 리턴 (1레벨)
옵션 2 : 벌목 (2레벨)
특수 옵션 : 정령의 추적 (1레벨)
“세, 세상에…….”
“4강 무기라니…….”
“맙소사. 화살도 아니고 도끼에 추적 옵션이 붙어 있어!?”
참가자들의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보물이 그곳에 들어 있었다.
토끼도 엄청나게 감탄하며 말했다.
[우와, 대박! 우리 진짜 대박 났음! 이 ‘정령의 추적’이라는 옵션은 도끼를 아무렇게나 대충 던져도 목표한 적을 향해 날아간다는 말이라고요!]
“유도 미사일 같은 거네?”
유도 기능이 있는 투척용 손도끼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리턴 기능까지 있으니, 적을 맞추는 것도 자동이고 돌아오는 것도 자동이라는 말이었다.
정다운은 신기해하며 손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손바닥이 찌릿하며 기이한 힘이 그의 몸을 훑어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움찔.
“누가 내 몸을 더듬는데?”
[크릉, 당황할 필요 없다. 도끼에 빙의된 정령이 너를 탐색하는 것뿐이다.]
루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던전이 리셋되면 또 생겨나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일족의 보물을 갖다 바친 기분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디 어떻게 쓰는 건지 실험해 볼까?”
정다운은 빙의된 정령 도끼를 들고 거미줄 텐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각다귀 들을 노려보며 도끼를 부메랑처럼 힘차게 던졌다.
“으랏챠!”
쐐애액!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는 손도끼가 발생시키는 공기의 진동에 각다귀들은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서걱!
“……!?”
도끼는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공중에서 ㄱ자로 방향이 꺾이며 옆으로 피신한 각다귀들의 허리를 작살내고 지나갔다.
쿵!
“…….”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리턴.”
파아앗.
빛무리에 감싸여 정다운의 손으로 다시 돌아온 정령 도끼를 바라보는 참가자들의 표정은 경악에 차 있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살짝도 아니고 저 무거운 무기가 직각으로 방향이 꺾였어.’
생각보다 훨씬 더 놀라운 무기의 능력에 그들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알고 당하면 모를까, 저렇게 극단적으로 방향이 꺾이는 투척 무기를 세상에 어느 괴물이 피할 수 있단 말인가.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목이 잘려 나갈 것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바로 리턴을 쓰면 상대에게 무기를 빼앗길 염려도 없지 않은가.
‘진짜 대박이다…….’
이쯤 되니 그들은 정다운을 질투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반응에 루갈은 코를 쓱 훔쳤다.
[킁.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너무들 놀라는군. 이게 바로 우리 일족의 보물인 정령 도끼다.]
그 뒤로도 정다운은 몇 번이고 도끼를 던져 각다귀들을 잡아 봤다.
그런데 의외로 정령의 추적 옵션이 겨우 1레벨이라 그런지 도끼가 방향을 꺾는 건 단 한 번뿐이었고, 그 이상 방향을 꺾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한 번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커다란 투척용 무기를 피하기 위해선 몸을 단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굳이 지그재그로 피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목표를 잘 설정하고 꺾이는 방향을 잘 고려한다면 일타이피, 일타삼피도 가능했다.
[오! 한 번에 4마리 성공!]
“와!”
결국 동시에 각다귀 4마리까지 성공하자 정다운과 토끼가 얼싸안으며 만세를 불렀다.
[놀고 있군, 크르륵.]
루갈은 혀를 찼고, 참가자들은 부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휴, 잘 놀았다. 알파?”
도끼 놀이를 마친 정다운이 알파를 부른 것은.
“그럼 이거 제물로 바칠게.”
[뭣이라고!?]
[크륵!?]
동시에 화들짝 놀라는 토끼와 루갈.
그가 쿨하게 빙의된 정령 도끼를 상납한다고 하자 알파마저 당황했다.
<그런 보물을 진짜 제물로 바치실 생각이십니까?>
[바쳐서 뭐 하게요? 추적 옵션은 엄청 희귀한 거라고요. 특수 옵션이라서 강화 시스템에 등록도 안 된다고요!]
토끼가 뜯어말려 봐야 애초에 그는 말을 들어먹는 위인이 아니었다.
“에이, 이걸로 추적해서 뭐 해? 나 어차피 과녁도 보이잖아. 그리고 벌목 옵션은 재활용되잖아.”
그는 벌목 옵션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무려 2레벨이었다.
게다가 빙의된 정령 도끼가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어차피 리셋하고 다시 찾으러 와도 되는 일이었다.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번쩍!
잠시 후 세이렌의 호수 위에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와 연결된 곳은 틈새 신전의 워프 게이트.
바로 제단 위였다.
그는 주저 없이 루가루 일족의 보물을 그 안으로 집어 던졌다.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크르륵!]
그 꼴을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는지 루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울컥 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아, 아아아-!”
한편 세이렌은 호수 위에 드러누워 빵빵해진 배를 튕기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들 자꾸 자신의 앞마당에서 소란을 피우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명랑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씨익.
그리고 정다운은 그 즉시 마법창고 문을 열고 바하무트를 불렀다.
[주인님, 부르셨나이까.]
“창고에 쓸 만한 도끼 좀 있어?”
[황금 도끼가 제법 있나이다. 그러나 금으로 만든 무기는 강도가 좋지 않아 금방 날이 무뎌질 겁니다.]
“괜찮아. 어차피 강화해서 쓰면 되니까.”
[금방 가지고 나오겠나이다.]
쿠웅.
[여기 있나이다.]
“오, 비싸 보이고 좋네.”
천박할 정도로 휘황찬란한 황금도끼였다.
정다운은 그걸 바로 강화했다.
[황금 도끼 +3]
- 내구력 : 100/100 (%)
- 옵션 1 : 단단함 (1레벨)
- 옵션 2 : 벌목 (2레벨)
“흠, 좋아. 딱 적당하군.”
<…….>
알파는 허무했다.
제물 하나를 얻자마자 막대한 양의 생명 에너지를 바로 소모해 버린 것이다.
강화가 중복될수록 소모되는 에너지는 2배씩 늘어난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도끼에 빙의된 정령이 상당한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남겨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고스란히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부활을 위해 전적으로 사용될 터…….
“바하무트, 도끼 4개만 더 가져와. 그림자 하인들에게도 똑같이 하나씩 만들어 주게.”
<……!?>
그렇게 정다운은 빙의된 정령 도끼 한 자루를 바치고 황금 도끼 다섯 자루를 얻게 되었다.
알파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적자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사전 정보가 없었던 참가자들은 어느샌가부터 생각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보물 도끼는 어디가고 갑자기 황금 도끼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난데없이 바닥에서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키더니 도끼 하나씩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골렘들 10마리가 나타났다.
“크워어!”
“오오오옴!”
“……헉!?”
멍 때리고 있었더니 갑자기 그들 눈앞에 철갑으로 무장한 거대한 골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괴, 괴물!?”
“최종 보스인가!?”
[님들은 호들갑 떠는 스킬이라도 있으심?]
자꾸 깜짝깜짝 놀라는 그들을 보며 토끼가 낄낄댔다.
지금까지 괴물들의 관심을 끌기 싫어서 골렘들을 끌고 다니지 않았던 정다운이 갑자기 골렘들을 불러낸 이유가 있었다.
“세이렌과 노느라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어. 일일이 마녀의 흔적을 찾아다니기도 귀찮으니까 날이 저물기 전에 방식을 좀 바꿔야겠어.”
정다운은 골렘들과 그림자 목수들을 앞에 세워 두고 명령했다.
“요즘 땔감도 거의 다 써 가는데 마침 잘됐어. 벌목 도끼도 생긴 김에 나무나 하자.”
“크워?”
마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반나절이나 돌아다녔는데도 고생만 했다.
사실 흔적이 안 보이는 이유는 전적으로 숲에 가득한 나무들 때문이었다.
이 울창한 나무들을 다 없애 버리면 뭐라도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러다 마녀의 흔적까지 없어질 확률도 있었지만.
‘그때는 리셋하고 다시 오면 되지 뭐.’
그냥 쉽게 가기로 했다.
정다운은 엄지로 자신의 뒤에 가득한 나무들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골렘들 너희는 눈에 보이는 나무들을 전부 뽑아 와. 그림자 하인들은 나랑 같이 소지품에 들어가는 크기로 장작이나 패자.”
“크워어!”
“먀옹!”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의 역할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는 골렘들과 그림자 하인들이었다.
쿵! 쿠쿵!
“크워어!”
우지끈!
야수의 숲이 급격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병풍처럼 서 있기만 했던 참가자들에게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바로 골렘들이 나무를 쿵쿵 쓰러뜨릴 때마다 깜짝 놀라 숲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레벨 업하기 딱 좋은 기회였으나, 어차피 선택지는 없었다.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괴물들과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했다.
쿠쿵! 쿠쿵!
야수의 숲에 나무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 없던 그 급격한 변화는 던전에 오류를 불러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오류가 아닐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을 뿐.
크드득!
[……맙소사. 트리가드가 깨어나 버렸나.]
루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랜 세월 야수의 숲을 묵묵히 지켜오던 숲의 정령들이 분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