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23화>
촤르륵!
투명한 머릿결이 찰랑이며 물보라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놀랍게도 수면 위로 나타난 존재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이었다.
매끈한 인어를 연상시키는 물빛 드레스.
긴 치맛자락은 발끝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살랑거렸다.
[대박. 물의 정령임!]
“정령이라고?”
아까부터 토끼가 정령 타령을 하더니 진짜 정령이 나타나버렸다.
여인의 고운 자태에 정다운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온몸이 투명한 사람이라니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지! 저런 게 진짜 정령이지! 넌 그냥 토끼고.”
[얼씨구? 이분 신나셨네? 이때다 싶죠 아주? 응?]
한 마디도 지고는 못 사는 토끼가 정다운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둘의 수다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위험합니다! 물의 정령 세이렌입니다!”
옆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아는 사이에요?”
정다운이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소지품에서 두꺼운 옷을 꺼내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귀를 막으세요! 세이렌은 물귀신입니다!”
“노래로 먹잇감을 유혹해 물에 빠트려 잡아먹는 괴물입니다!”
“……!”
큰일이었다.
겨우 옷 한 장으로 완벽한 방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세이렌의 목소리는 저 매혹적인 외모만큼이나 너무 아름다워서 듣는 순간 홀리게 된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건 재빨리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는 건데, 정다운의 텐트에서 벗어나는 순간 각다귀들의 총공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아아아-.”
결국 세이렌의 입이 벌어지며 영롱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다운은 대처가 한발 늦었다.
[듣지 마셈!]
토끼가 재빨리 그의 뒤통수에 달라붙어서 귀를 대신 막아주었다.
어차피 자신은 물에 빠져도 날아서 도망치면 되니까 홀릴 것을 각오한 것.
하지만 그조차 타이밍이 늦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여지없이 정다운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아아아-!”
“……목소리 진짜 좋은데? 노래 잘 부르네.”
정다운의 소감이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토끼의 따끈하고 말랑한 뱃살이 뒤통수를 간질이고, 건조하던 고막이 촉촉하게 호강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노래가 좋아도 물에 뛰어들고 싶은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혹시 나만 세뇌 안 당함?]
“나돈데?”
[으잉? 세뇌당한다면서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말을 한 당사자들을 쳐다보자 그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우, 우리도 괜찮습니다.”
“뭐지?”
“다른 던전에서 본 세이렌과는 다른 괴물인가?”
“아아-! 아아아!”
허밍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공기 반 소리 반의 실로 완벽한 배분.
숲 한가운데 뻥 뚫린 호숫가는 버스킹을 하기 딱 좋은 울림을 가진 공연장이었다.
그런데 세이렌의 노래는 사실 노래라기보단 뮤지컬에 가까웠다.
“아아, 아아아?”
그녀가 손짓발짓까지 섞어가며 음률이 섞인 목소리로 정다운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뭐라는 거지?”
[몸으로 뭔가 말하는 것 같은데요?]
“아우아?”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커다란 무언가를 야물야물 입으로 뜯어 먹는 시늉.
정다운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정답을 외쳤다.
“음, 호랑이!”
“아아아!”
고개를 세차게 젓고 다시 노래를 부르는 세이렌.
[틀렸나본데요?]
세이렌이 다시 입으로 야물야물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곰?”
“아아으-!”
[또 땡인가 봄.]
정다운의 오답 잔치는 계속되었다.
“고릴라?”
“아아!”
“오랑우탄?”
“아아우!”
“알았다! 동네 바보 형!”
[흠, 이번엔 맞춘 듯.]
“아아익!”
토끼까지 나서자 결국 세이렌은 토라진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새초롬한 표정조차도 몹시 매혹적이었고, 그런 얼굴로 두 팔을 열심히 흔드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귀여웠다.
그 와중에 노래는 또 너무 잘 불러서 정다운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알았어. 장난 그만 칠게. 돼지고기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이지?”
“아아아!!”
그제야 세이렌은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투명한 배를 팡팡 두드리며 꾀꼬리처럼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정다운은 냉큼 그 뜻을 알아듣고 되물었다.
“배부르다고? 이제 안 줘도 된다고? 아니면 또 달라고?”
“아아아!?”
표정이 살아있는 녀석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이 설마 그렇게 많이 주고도 먹을 게 또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거들먹거렸다.
“당연히 또 있지. 이 오빠가 사실 걸어 다니는 냉장고란다. 왜? 또 줘?”
“아우우.”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 와중에 노래는 또 너무 애절했다.
그 모습에 참가자들은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맙소사. 세이렌과 대화가 가능한 거였어?”
“왜 우리를 세뇌하지 않는 거지?”
그들은 물의 정령 세이렌을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괴물은 아니었지만, 가급적이면 안 마주치는 것이 최고인 상대였다.
물에서 나오지 않으니 싸우기도 까다로운데다가, 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잡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잡으면 뭐하겠는가?
어차피 물이라서 먹을 수도 없고 걸치고 있는 아이템도 없었다.
잡아봐야 얻을 건 없는데, 아차하면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는 상대는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세이렌의 손짓발짓 원맨쇼를 지켜보던 토끼가 불현 듯 깨달음을 얻었다.
[아하. 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음! 휴, 난 역시 천재인가.]
“뭔데 그래?”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대요. 그래서 우리를 잡아먹을 이유가 없는 거임.]
“아아아-!”
그 말에 또 세이렌이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만 벌써 몇 마리의 돼지를 먹었는지 포만감이 가득했다.
[오늘은 배가 불러서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할 이유도 없는 거죠.]
끄덕 끄덕 끄덕!
[휴, 역시 나다. 내가 다 맞췄네.]
그런데 세이렌이 굳이 밖으로 나온 용건은 따로 있었다.
스르륵.
우아한 자태로 수면 위를 걸어오는 세이렌의 모습에 참가자들은 본능적으로 흠칫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정다운은 오히려 앞으로 다가갔다.
“그거 나 주는 거야?”
세이렌의 두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툭 그 물건을 호숫가에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오, 설마 선물?]
세이렌의 선물은 녹색 이끼가 잔뜩 낀 무언가였다.
[닳아빠진 고무장화 +1]
[비활성]
- 내구력 : 0/100(%)
- 옵션 : 방수 (1레벨)
정보를 확인한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거 아이템이잖아?”
[쯧. 개털이네요. 물에서 쓰레기를 건져왔네.]
세이렌의 선물은 말 그대로 잡동사니 쓰레기였다.
그걸 또 선물이라고 주고 간 세이렌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고맙지?’ 라는 표정으로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아아…….”
[님아, 제발 표정이랑 노래 좀 통일하셈.]
토끼는 이미 물에서 사는 땅거지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세이렌을 하찮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아니었다.
휘황찬란한 황금갑옷을 입은 두 손으로 이끼가 잔뜩 낀 고무장화를 떠받드는 포즈가 마치 대물을 낚은 낚시꾼 같았다.
“이거 대박인데? 고무장화라니!”
진짜 대박이었다.
설마하니 던전에서 고무를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것이다.
“혹시 이거 다른 참가자들이 버리고 간 건가?”
[그야 모르죠. 쓰레기 주인이 누가 됐든.]
그는 개미가 열심히 만들어준 철수세미를 꺼내 반으로 갈랐다.
반쪽은 설거지할 때 쓰는 용도고, 나머지 반쪽은 더러운 걸 닦아낼 때 쓰는 용도였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는 바로 호숫가에 주저앉아 고무장화의 표면을 수세미로 쓱싹쓱싹 닦아냈다.
그러자 금세 반들반들한 고무가 드러났다.
“아하. 밑창이 닳아빠져서 물이 새긴 하네? 그래도 고무 부분만 오려 쓰면 언젠가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아아아-!”
[님들 지금 뭐함…….]
토끼는 슬픈 표정이었다.
쓰레기를 받고 신이 난 정다운과 그딴 선물을 주고도 도도한 표정을 짓는 세이렌.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거지들이었다.
옆에서 거지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참가자들이 불현 듯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아무래도 세이렌이 우리에게 호의적이 된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세이렌에게 저 보물 상자를 들고 오게 하는 건 어떨까요?”
“아아아?”
그 말을 알아들은 세이렌이 난감한 얼굴로 두 팔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물의 정령이라 물 밖으로 못 나가나본데요?]
보물 상자는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섬에 있어서 세이렌이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세이렌이 공격할 의도만 없다면 정다운은 얼마든지 다리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보물 상자는 가만히 놔두면 계속 저기 가만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이렌은 이제 가면 또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정다운은 손을 싹싹 비비며 간신배 같은 표정으로 세이렌을 불렀다.
“저기, 세이렌아? 혹시 이런 물건 더 찾아와 줄 수 있어?”
“아아아?”
세이렌은 눈치가 빨랐다.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옆으로 픽 돌렸다.
그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다운은 고단수였다.
“배부르다고 했으니까 입가심으로 디저트라도 줄까?”
“아힉?”
순간 세이렌의 노래에 삑사리가 났다.
솔깃한 표정이었다.
정다운은 얼른 소지품에서 수박화채를 꺼냈다.
그리고 바하무트를 불렀다.
“바하무트! 빨리 얼음 얼려!”
철커덕!
파아앗!
참가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갑자기 자물쇠가 열리고 허공에서 마법의 문이 열리더니, 말하는 눈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엄청난 위력의 마력을 방출하더니 수박화채 위에 소복하게 얼음을 쌓고 사라졌다.
정다운은 그걸 싹싹 비벼서 레이디에게 장미꽃과 반지로 사랑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정중하게 세이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디 맛있게 드셔주시길.”
그리고 퐁당.
“아아익!?”
세이렌은 깜짝 놀라 수박화채를 따라 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땐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새색시처럼 두 볼과 목덜미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수박 색깔이었다.
세이렌은 이번에도 답례로 또 선물을 하나 물가에 내려놓고 갔다.
[썩어빠진 청동방패 +1]
- 내구력 : 1/100(%)
- 옵션 : 단단함(1레벨)
[또 쓰레기네요.]
이름 그대로 썩어빠진 아이템이었다.
토끼는 또 혀를 찼고, 정다운은 또 쾌재를 불렀다.
“오, 이번엔 내구도도 남아 있어! 이러면 제물로 바치면 옵션도 얻을 수 있겠는데?”
[어차피 있는 옵션이잖아요?]
“하다보면 언젠간 좋은 게 나오겠지!”
그는 이미 랜덤이라는 도박에 중독된 도박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이렌, 아직 더 먹을 수 있지?”
“아아아-!”
세이렌은 갑자기 웅장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한리필집에 도착한 용맹한 전사의 노래였다.
“저, 저런! 아까운 식량을!”
그 모습을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참가자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그야말로 도박에 빠진 돈(?) 많은 호구였다.
그런데 돈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