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20화>
“구체적으로? 그걸 내가 알면 처음부터 물어보지도 않지. 뭐 의미심장한 느낌이 나는 곳은 없었어?”
정다운의 귓말에 오동민이 바로 답장을 보내 왔다.
<오동민 : 아! 하나 있었어요! 바위산 밑에 엄청 큰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텅 비어 있더라고요. 엄청 의미심장!>
“……응, 거긴 내가 파 둔 곳이고.”
오동민이 말한 곳은 정다운이 죽음의 산맥을 넘어오자마자 가장 처음 파 둔 동굴이었다.
기껏 열심히 파 뒀더니 괜히 새로 생긴 유적지니 뭐니 해서 참가자들에게 오해만 샀던 곳이었다.
“아무튼 동민아, 우린 먼저 출발할 테니까 생각나는 것 있으면 계속 알려 줘.”
그는 무작정 야수의 숲으로 향했다.
* * *
스테이지-4의 가장 첫 번째 던전인 ‘야수의 숲’은 죽음의 산맥 바로 앞에 붙어 있는 녹색지대였다.
식용 자원이 풍부해서 참가자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이 던전을 공략한 이들에게 허락된 땅은 숲의 초입까지였다.
그 이상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진입이 불가능했다.
물론 정다운은 예외였다.
그의 앞에선 보이지 않는 벽이 흐물거리는 커튼으로 변했다.
[오류! 던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장했습니다!]
“어, 그래.”
던전 들어갈 때마다 앞을 가로막는 경고 메시지는 이제 그냥 초인종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보스가 아마 트윈헤드 오거였지?”
[네, 오거 골렘도 그놈 가죽으로 만든 거였잖아요.]
“그런데 그놈을 잡았는데도 던전이 공략 안 되지 않았어?”
[맞아요.]
잠시 후 오동민의 귓말이 도착했다.
<오동민 : 야수의 숲은 보스가 총 3마리예요. 그놈들을 전부 잡아야 던전이 공략돼요.>
“아하, 3마리였구나. 어쩐지.”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토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토끼는 괜히 뜨끔했다.
[왜요, 뭐, 왜. 전직 도우미라고 이런 디테일까지 다 알아야 된다는 법 있음?]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흥. 나도 그냥 혼잣말한 거임.]
오동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오동민 : 그런데 야수의 숲에는 자잘한 유적지들이 워낙 많아요. 그중에서 보스들이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제일 까다로웠어요.>
정다운은 골똘한 표정으로 다시 토끼를 쳐다봤다.
“흠, 역시 뭔가 숨겨져 있다면 보스가 있는 유적지들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문제는 유적지들의 정확한 주소를 오동민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저번에 트윈헤드 오거가 있던 동굴조차 다시 길을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워낙 울창한 숲이었고 그 일대에는 비슷한 동굴들이 워낙 많았다.
[저번에는 내가 던전이 공략되는 순간에 마력의 흐름을 포착해서 찾아낸 거였잖아요. 지금은 아무것도 안 느껴짐.]
<그때 설치해 두셨던 게이트도 새로운 트윈헤드 오거가 이미 파괴해 버렸는지 좌표가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토끼와 알파의 말에 정다운은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트윈헤드 오거는 마법 저항력이 있어서 힘으로 게이트를 파괴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에이, 주변에 큰 병원이나 학교 같은, 기준이 될 만한 랜드마크가 있으면 찾기 편했을 텐데.”
병원이나 학교는 아니었지만, 오동민이 그래도 좋은 정보 하나를 알려 줬다.
<오동민 : 아! 유적지 근처에 큰 호수가 하나 있었어요!>
“호수? 그런 게 있었어?”
정다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하긴 이렇게 울창한 숲에 뭐는 없겠어? 그럼 일단 호수부터 찾아가 볼까? 전망대 설치!”
[전망대를 설치합니다.]
처처처척!
약 15분 후, 야수의 숲 초입에 전망대 하나가 우뚝 솟구쳤다.
굳이 미니맵을 열 것도 없이 그 꼭대기에서 숲을 천천히 둘러봤다.
소득은 없었다.
[유감. 사방에 시퍼런 나무 대가리들만 가득하네요.]
“더 깊숙이 들어가서 다시 살펴보자.”
[그건 좋은데……. 진짜 그 꼴로 들어갈 거임?]
“내 꼴이 뭐 어때서?”
[…….]
황금갑옷에 황금투구.
울창한 숲을 건너려는 탐험가의 행색치곤 세상 화려했다.
야수의 숲은 갑자기 던전 콩이 휙휙 날아오는 곳이었다.
그걸 맨몸으로 맞았다간 시퍼런 피멍이 들 정도로 아팠다.
하지지만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으면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그는 황금투구 안쪽에 달린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면서 말했다.
“중요한 단서가 환상 마법 같은 것에 숨겨져 있으면 어떡해? 여기선 직접 걸어 다니면서 천천히 조사할 생각이야.”
그는 평소에 항상 휠체어처럼 타고 다니던 타조 골렘조차 꺼내지 않았다.
“너무 빨리 가려 하다간 오히려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법이거든.”
[명언인 척 오지시네. 흥. 그림벨이 그렇게 좋으심? 그깟 방울 하나 얻어 보겠다고 사람이 갑자기 부지런해졌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응? 너 왜 갑자기 삐졌냐?”
[안 삐졌거든요.]
어째서인지 토끼는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 * *
정다운은 골렘을 대동하지 않고 야수의 숲을 돌아다녔다.
거대한 골렘을 데리고 다녔다간 괜히 괴물들의 이목만 끌게 되기 때문이었다.
괴물들과 싸우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조용히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 위험해지면 그때 가서 꺼내면 되니까.’
예전에는 게이트를 여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항상 골렘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하지만 요즘은 게이트가 설치되는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자신이 있었다.
니야앙.
먀오오옹.
이 얼마나 든든한가!
골렘을 대신해서 그림벨을 포함한 4명의 그림자 하인들이 사방에서 그를 호위하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걷는데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진짜 그림자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괴물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돌아다니기 딱 좋았다.
수다쟁이 토끼조차 조용히 날아다니며, 귓말로만 쉴 새 없이 종알거리고 있었다.
[님만 잘하면 됨. 나뭇가지 좀 밟지 말라니까요? 그 소리 듣고 자꾸 괴물들이 튀어나오잖아요.]
말은 쉽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소리 없이 걷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지끈!
와그작!
“이크.”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에 마침 근처를 거닐던 야수들이 그를 발견하고 덤벼들었다.
캬오오!
“쏴.”
피융! 파바박!
대처는 즉각적이었다.
그림자 하인들의 손에서 쏘아진 석화 화살들이 야수들의 몸에 푹푹 꽂혔다.
하지만 야수들은 몸 곳곳이 돌로 변하면서도 오히려 더 분노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정다운은 그 품으로 파고 들어가 망치를 휘둘렀다.
“돌 깨기!”
쩌적!
“크륵!?”
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야수의 두꺼운 다리 한쪽이 깔끔하게 동강났다.
그렇게 균형을 잃은 순간을 포착해 마무리 일격.
“드릴 스피어!”
콰르륵!
“크륵!”
육중한 괴물의 몸이 허무하게 뒤로 넘어갔다.
쿠웅!
“짠. 오늘은 고기반찬이야.”
[고기 없이 밥 먹은 날이 있긴 함? 흠, 아무튼. 그래도 꼴에 하위 던전이라고 골렘 없이도 잘 싸우네요.]
겉으로는 비아냥댔지만 토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흉포한 야수들을 상대로도 정다운은 더 이상 약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계속 4배의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어지간한 괴물들과의 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혼자였고 괴물들은 자꾸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도 사람인 이상 체력에는 한계가 있고, 괴물들에게 둘러싸이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날 새겠는데? 무슨 괴물들이 1분 간격으로 계속 나타나네.”
이렇게 밤이 되면 탐색은 더 어려워질 것이었다.
[사실 이게 진짜 던전을 탐험하는 맛이죠. 남들은 다 이러고 살고 있다고요.]
“신발을 한번 바꿔 신어 볼까?”
문득 정다운은 틈새의 땅에서 참가자들에게 소금을 팔고 받은 신발이 생각났다.
[깃털 장화 +2]
- 내구력 : 6/100(%)
- 옵션 1 : 가벼움 (1레벨)
- 옵션 2 : 방수(防水) (1레벨)
[호오, 발소리를 없애 주는 신발이네요? 그런데 내구력이 형편없네요.]
“이거 제물로 바치고 내 신발에 옵션을 옮겨 달자고.”
그는 그 즉시 게이트를 열고 틈새 신전으로 돌아갔다.
꿀꺽!
“신발 강화! 아, 아니다. 하는 김에 갑옷 전체를 다 가볍게 하자.”
<…….>
낡아 빠진 제물 하나 바치더니 그 열 배의 생명 에너지를 써 버리는 정다운이었다.
[황금 갑옷 세트 +1]
- 내구력 : 100/100 (%)
- 옵션 : 가벼움 (1레벨)
“오, 가벼워!”
펄쩍 펄쩍!
다시 야수의 숲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았다.
덕분에 숲을 탐험하는 것이 더욱 안전해지고 은밀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겨우 한때였다.
왜애앵-
“……!”
오싹!
숲 깊숙이 들어오자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오동민의 귓말도 도착했다.
<오동민 : 아, 맞다! 형, 그리고요. 숲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벌레였어요. 특히 모기가 엄청 많아요.>
“……참 일찍도 말해 준다.”
왜에엥!
웨이에엥-!
그렇다. 모기였다.
골렘들과 함께 성큼성큼 돌아다닐 땐 눈에 보이지도 않던 괴물들이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숲속에 모기가 많은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가 던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뭔 모기가 저렇게 커?”
사람 팔뚝만 한 크기의 모기들을 보며 그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리도 길고 몸도 길고, 입에 빨대처럼 튀어나온 주사 바늘도 길었다.
전신 갑옷을 입었으니 그마나 안전했지만, 비주얼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토끼가 말했다.
[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음. 어떤 것부터 들을래요?]
“음, 좋은 소식부터?”
[쟤네는 모기가 아니라 괴물 각다귀예요.]
“각다귀? 각다귀나 모기나. 그래서?”
[각다귀는 물가에 사는 괴물이에요. 이 근처에 호수가 있다는 말 아닐까요?]
정다운이 반색하며 좋아했다.
“오, 그거 진짜 좋은 소식인데? 그럼 나쁜 소식은 뭔데?”
[갑옷 입었다고 방심하면 안 돼요. 각다귀의 바늘은 갑옷과 갑옷 틈새를 노리고 들어와요.]
“그건 좀 유감인데.”
정다운은 우울한 표정으로 각다귀들을 피해 뒤로 도망쳤다.
그리고 대신 그림자 창병들을 앞으로 보냈다.
토끼가 혀를 찼다.
[누가 각다귀를 상대로 창으로 싸워요? 같이 찌르게요?]
“아니? 돌릴 건데?”
휘오오!
그림자 하인들이 양손으로 쇠꼬챙이를 돌리며 각다귀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공격력은 매서워도 워낙 방어력이 약한 놈들이라 스쳐 지나가는 쇠꼬챙이들에 의해 몸이 동강났다.
[쟤네들이 저 정도라면 님이 직접 돌리기 스킬까지 쓰면 더 잘 싸운다는 말 아님?]
“응. 하지만 난 그사이에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바빠.”
그는 마녀의 일기장을 꺼내 들고 공기 중에 나풀거리며 흩날리는 각다귀의 날개를 덥석 낚아챘다.
일기장에 뭔가 중요한 단서라도 나올지 모르지 않은가.
“오, 그런데 이 날개 좋은데? 얇고 질겨서 이걸로 여름옷 만들면 이름 그대로 날개옷이겠…….”
그 순간 마녀의 일기장에 새로운 내용이 나타났다.
[모기]
숲에 사는 모기는 너무 크고 무서워!
옷을 입었는데도 용케 그 사이로 내 피를 다 빨아 먹더라.
“야이!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클 필요는 없잖아!”
갑자기 메모리가 원망스러워진 정다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