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17)화 (217/393)

<던전리셋 217화>

던전 게임의 ‘소지품’은 용량이 얼마나 될까?

무한할까?

아니면 한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도 몰랐다.

참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아직 소지품의 허용량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넣으면 계속 들어가기는 하는데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아이템을 모은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 흙이라도 퍼서 안을 채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도우미들조차 ‘제물’들의 소지품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명확한 기준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럼 소지품에는 아무거나 다 넣을 수 있을까?

그건 또 아니었다.

‘아이템(Item)’만 수납이 가능했다.

물론 아이템의 기준이 컴퓨터 게임처럼 명확하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건 아니었다.

늘 그렇듯이 던전 게임은 지극히 불친절한 게임이었고, 결국 참가자들은 경험을 통해 아이템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하나씩 깨우쳐 나가야 했다.

일단 소지품에는 산처럼 너무 큰 물건이나 살아 움직이는 건 수납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동물은 안 되고 식물은 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죽은 동물은 되고, 너무 큰 동물은 조각내서 넣으면 들어갔다.

또한 흐르는 물처럼 형태가 유동적인 것들도 아이템이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물통에 담아 형태를 고정시키면 수납이 가능해졌다.

땅에 붙어 있는 물건도 아이템이라 볼 수 없었다.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안 되지만, 자르거나 뽑아내서 작게 썰면 들어가는 식이었다.

반면에 너무 작은 물건은 들어가긴 하는데 넣고 빼기가 너무 번거로웠다.

아마 정다운이 흙 알갱이를 한 톨씩 소지품에 수납했다면, 아직까지도 그는 깊은 땅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준에 따라…….

‘골렘’은 크기도 크고 움직이기까지 하니 소지품에 수납이 불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바분의 보물창고는 골렘을 들여놓기 딱 좋은 아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기준으로 ‘건물’도 크기도 크고 땅에 붙어 있는 종류라서 수납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퍼즐처럼 조각내서 담는다면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그 작업이 엄청난 노가다라서 힘도 들고 그럴 이유도 없어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허참.”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바로 눈앞에서.

“맙소사.”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이, 사라졌다.

통째로.

좀비가 돌아다니던 그 을씨년스러운 마을이 전부 조각조각 나뉘어 정다운의 소지품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세상에…….”

휘이잉-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터 위에서 그들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마을에서 쓸 만한 물건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마을을 통째로 챙긴다고?’

그동안 숱한 참가자들을 만나 봤지만, 살다 살다 이런 별종은 그들도 처음 봤다.

‘대체 건물 벽을 챙겨서 뭐에 쓰려고?’

반면에 정다운의 표정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고 상자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나중에 시멘트로 붙여서 다시 조립하면 엄청 예쁘겠지?”

거인의 꿈에서 본 마을은 정말 아름답고 예쁜 풍경으로 가득했다.

그때보다 많이 파손됐다 해도 조각들을 요리조리 붙여서 재활용한다면, 앞으로는 꿈에서 본 것만큼 그럴싸한 건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게요. 그동안 흙집은 너무 거무튀튀해서 지겨웠는데 잘됐네요.]

토끼의 말에 정다운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무슨 소리지? 우리 집이 지겹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와, 그게 신경 쓴 거였다고!? 코끼리 골렘한테나 먼저 사과하셈!]

“흠흠, 아무튼 앞으로는 예쁜 집을 지을 수 있겠어.”

정다운은 말을 돌렸다.

쿠르릉!

흠칫!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거친 지진에 참가자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어서 깜빡 잊고 있었지만, 리셋은 이미 시작되는 중이었다.

[던전이 리셋됩니다.]

쩌저적! 콰르릉!

메시지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었다.

땅이 갈라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지진도 그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다음 섬으로 이동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전부 떨어져 죽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물 앞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는 정다운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전 갑자기 정다운이 폭탄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먼저들 가세요. 나는 여기서 볼일 좀 보고 나중에 뒤따라갈게요.”

그 말은 그들이 던전에 와서 들었던 말 중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

“네? 저희들만 가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 남으시겠다고요? 왜요?”

“남으시면 죽을 겁니다! 고집부리지 마세요!”

“정다운 씨, 그냥 저희와 같이 가시죠!”

“아뇨, 저희와……!”

하지만 아무리 말려도 정다운은 요지부동이었다.

“어? 아직도 안 갔어요? 먼저들 가시라니까.”

귀찮은 파리 쫓든 손을 휘휘 젓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인간은 뭐가 잘못된 걸까 싶죠? 응, 나도 알아요-.]

토끼가 옆에서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나도 굳이 설명해 주기 귀찮으니까 그냥 먼저들 가셈.]

그들에게 하늘 신전에 대해 말해 줄까 싶었으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관뒀다.

알면 분명 태워 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참가자들이 던전을 벗어나는 건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했다.

괜히 누구를 하늘 신전에 태웠다가 투명한 벽에 막혀 추락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큰 낭패였다.

[어차피 님들도 우리가 누구네랑 같이 갈지 눈치만 보고 있잖아요? 나중에 뒤따라갈 테니까 나중에 우리 마주치면 복권 당첨됐다 생각하고 반갑게 인사나 해 주셈.]

“…….”

토끼가 정곡을 훅 치고 들어오자 그들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쿠르릉!

어차피 더 시간을 끌 여유도 없었다.

이러다 지진이 우물까지 파괴해 버리면 정말 큰일이었다.

“아, 안 되겠다. 가자고!”

“이러다 큰일 나겠어!”

번쩍!

결국 참가자들은 하나둘 다음 섬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이 미련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다운에게 인사를 해 왔다.

“무슨 계획이신지는 모르지만,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네네. 볼 수 있으면 또 보자고요.”

“그런데…… 저희 이름은 기억하시죠?”

움찔?

“…….”

정다운의 표정을 본 사냥꾼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을 같이 다니긴 했으나, 역시나 정다운은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첫인상이 문제였나…….’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 따위는 정다운에게 일일이 기억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정다운이 이번에 보여 준 놀라운 업적들을 생각해 보라.

그에 반해 자신들은 그냥 뱀꾼 1, 2, 3, 4였다.

이번에 자신들이 한 일이라곤 고작해야 돌뱀의 독니 뽑는 일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후우, 초면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저희도 살려고 애쓰다 보니 그만…….”

하지만 여전한 정다운의 표정에 그들은 중간에 말을 멈췄다.

그렇다. 더 변명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누구나 사정은 있다.

이럴 땐 그냥 후일을 기약하며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정다운 씨,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부디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꾸벅.

무너져 내리는 안개섬 위에서 그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또 봐요.”

정다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계속 골똘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가슴에 똑똑히 박아 넣었다.

“저희 이름은…… 나중에 또 만나 뵙게 되면 그때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때는 부디 저희가 정다운 씨에게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가자가 되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냥꾼들은 검은 기둥 안으로 사라졌다.

그 우물 앞에 홀로 남겨진 정다운는 아까부터 계속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토끼야.”

[왜요?]

“나 진짜 기억 안 나서 그러는데. 저 사람들, 나한테 이름 말해 줬던가?”

[음, 아뇨?]

“휴, 역시 그렇지?”

[바보들. 말을 해 줘야 알지. 자기들끼리 진지 빨고 있네요.]

뒤늦게 의문이 풀리자 정다운의 표정이 상쾌해졌다.

“아무튼 이제야 다 갔네. 그럼 한번 시작해 볼까?”

[뭘요? 그냥 섬이 다시 붙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 아니었음?]

“계속 생각해 봤지. 어떻게 기다려야 잘 기다렸다고 소문이 날까.”

[그래서 결론은요?]

“부유섬 완성되기 전에 미리 거미여왕 앞마당에 딱 붙어 있자고.”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양손에 마법 창고 열쇠와 자물쇠를 들었다.

철커덕!

“바하무트!”

번쩍!

[소인 바하무트, 여기 대령했나이다!]

쿠오오오!

콰르릉!

바하무트의 대답이 들려온 순간, 때마침 그가 서 있던 땅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고 문에서 꾸물꾸물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문어 골렘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타시지요.]

정다운은 문어 골렘에 성큼 올라탔다.

콰르릉!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서 있던 땅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검은 기둥을 생성하고 있는 3개의 우물가는 멀쩡했다.

[중요한 건축물들은 형태가 남아 있어야 기능이 유지되나 봄.]

“중앙탑도 그렇겠지?”

[그런 것 같네요.]

그들은 곧장 하늘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늘 신전을 미로 안으로 이동시켰다.

쿠구구……!

지진으로 미로의 벽이 무너져 내리며 검은 안개가 밀려 들어왔다.

저번 섬에 비해 안개섬이 좋은 점은 딱 하나였다.

이 안개 덕분에 리셋 중에도 범독수리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

[탑이에요! 거미여왕은 없음!]

미로의 중심, 중앙탑이 위치한 넓은 땅은 이 난리통에도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무너지긴 했으나 리셋이 끝나고 나면 예전처럼 깔끔해지리라.

“그림벨! 형이랑 같이 땅이나 파 볼까?”

“먀옹!”

[그런데 얘 수컷으로 정해진 거임?]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럼 여자겠냐?”

[중성화했을 수도 있죠.]

“죽을래?”

정다운은 하늘 신전을 중앙탑 바로 아래로 이동해 아래서부터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림벨과 나란히 서서.

“흙 뭉치기! 흙 뭉치기!”

“먀옹! 먀옹!”

그 속도는 2배!

순식간에 두꺼운 안개섬 아래에 주차 공간이 뻥 뚫렸다.

그 구멍에 하늘 신전을 무사히 꽂아 넣은 후, 그는 그 기세로 머리 위에 좁은 터널을 계속 뚫어서 중앙탑으로 올라가는 길을 연결시켰다.

“그림벨? 나 밥 먹고 올게. 그동안 돌 깎아서 계단 좀 만들고 있어.”

“먀옹.”

밥만 먹고 계단이 생겼다.

“좋았어!”

돌아와서 그가 한 일이라곤 중앙탑 1층 바닥에 자동문을 설치한 것뿐이었다.

“중앙탑에 세 들어 사는 기분이네. 월세라도 내야 하나?”

탑 앞마당이 워낙 넓어서 월세 대신 농사를 지어 주기로 했다.

그는 리셋이 끝날 때까지 이번에 구한 여러 씨앗들을 전부 꺼내 앞마당에 뿌렸다.

[앗? 비료는 내가! 내가 할 거임!]

토끼가 쥐똥 비료를 앞마당에 골고루 뿌려 주자, 금방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뽀뀨?”

뽀뀨도 새로 생긴 앞마당이 신기한지 코를 킁킁대며 이리저리 땅을 파고 돌아다녔다.

“좋은데? 덕분에 흙이 골고루 섞이겠어.”

“뀨잇!”

정다운의 칭찬에 뽀뀨는 신이 나서 더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안개섬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합쳐졌다.

*   *   *

파아앗!

거미 여왕 아라크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늘 그렇듯이 서늘하고 축축한 그늘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후우우.]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건 왜일까.

언제나 그렇듯 아라크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허락된 기억은 오로지 절망과 공포로 점철되었던 ‘그 순간’의 기억뿐…….

아라크네는 앞을 바라봤다.

이 어둑한 다락방에 허락된 유일한 빛.

네모난 창문에서부터 스며들어 오는 한 줄기 빛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라크네는 괴물 같은 다리로 천천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아.]

그녀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찬란한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노랗게 익어 가는 벼.

파릇파릇 자란 채소들.

그 가운데 한가롭게 서 있는 허수아비.

그리고 그 위를 길게 가로지르는…….

늘 그렇듯이, 그녀를 가두고 있던 거대한 벽들을 꿰뚫고 거대한 다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결국 아라크네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