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12)화 (212/393)

<던전리셋 212화>

“또 본다고? 나를 알아?”

정다운의 물음에 소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저번에 반다이크 경과 함께 있던 분 아닌가요?”

“……!”

대답을 대신한 정다운의 표정에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헤에, 역시 맞네요! 두 번이나 내 꿈속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 이름은…… 그냥 ‘마녀’라고 불러 주세요.”

정다운은 혼란스러웠다.

꿈이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여기가…… 네 꿈속이라고? 거인의 꿈이 아니라?”

“넵! 제 꿈이랍니다. 저번엔 반다이크 경을 통해 들어오셨었죠? 헤헤, 그 반지 사실 제가 만든 거랍니다.”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이는 소녀의 손은 너무나 작고 가늘어서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통통한 볼살과 새하얀 치아가 환하게 드러난 환한 미소는 구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지 엄청 잘 만들었죠? 어떻게 만들었냐면요, 일단 이 안에서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힘들었는데요…….”

무용담을 자랑하듯 자신이 반지를 만들었던 이야기를 종알거리는 소녀였다.

정다운이 말을 끊고 물었다.

“잠깐, 꼬마야?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맞아요. 우리 지금 분명 거미여왕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고요.]

“앗. 토끼다! 끼여워!”

[으익? 이, 이거 놔!]

덥석!

토끼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두 팔로 꼬옥 끌어안는 소녀였다.

토끼는 그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팔과 다리를 바동거렸다.

그런데 이게 또 묘하게 포근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뭐, 뭐지? 고향에 온 기분이야.]

결국 반항을 멈추고 소녀의 품에 순순히 안겨 있는 토끼였다.

그때였다.

[아이고! 마녀님!]

마녀의 얼굴을 확인한 바하무트가 펑펑 울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소녀는 자신의 앞에 엎드린 눈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세요?”

[접니다! 마녀님의 충실한 종! ……이었던 바하무트입니다!]

이 와중에도 현재의 본분은 잊지 않는 ‘전직’ 충실한 종 바하무트였다.

그런데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바하무트? 그게 누군데요?”

[헉! 설마 저를 잊으셨나이까? 접니다! 집사 바하무트!]

바하무트는 마녀가 자신을 전혀 몰라보자 크게 당황했다.

마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움, 미안해요. 이 ‘시절’의 나는 아직 그대를 만난 적이 없나 봐요.”

[그, 그럴 수가……!]

바하무트는 큰 충격을 먹었다.

“이 시절의 나?”

정다운이 묻자, 소녀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배배 꼬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걸 뭐라 설명해야 되지? 원래 애정을 담아 만든 물건에는 만든 사람의 추억이 스며들어 있답니다. 그리고 우린 그 물건을 통해 서로 추억을 공유하며 그 순간의 기억을 되새길 수 있어요. 그때의 분위기, 주변에 있던 물건들, 사람들, 그리고 그때 맛보고 즐겼던 맛과 냄새들까지도.”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되새긴다고?”

[추억팔이 끝판왕이네요.]

황당해하는 정다운과 토끼였다.

진짜 이놈의 던전은 매번 이렇게 극단적인 게 문제였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봐서는 추억을 되새기는 게 아니라 아예 끄집어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추억 속의 인물이 이쪽을 계속 기억하고 있다니.

“마법이라는 게 되게 신기한 거구나…….”

[이런 건 저도 처음 봤어요.]

<심연의 마법일 겁니다. 사념을 담은 아이템을 매개체로 자신의 기억 속으로 우리를 다이브(Dive)시킨 겁니다.>

알파의 설명이 뒤를 이었다.

<무릇,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법. 정다운 님이 이 꿈속에 들어왔었다면, 꿈의 주인이 당신을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들어오는 입구는 달라도 같은 꿈으로 들어온 겁니다.>

“응? 와아, 언니 너무 멋져요! 나도 나중에 크면 이렇게 예뻐지고 근사해지고 싶다.”

<……!>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황금빛 문자열을 보자 소녀가 탄성을 지었다.

소녀의 눈에는 마치 알파의 원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보입니까?>

“그럼요. 너무 멋진 언니세요. 크으, 시크하고 도도한 도시 여성! 하지만 내 남자에게는 따뜻하겠죠?”

<글쎄요. 남자가 없어 봐서 잘 모릅니다만.>

“…….”

소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익숙합니다.>

“…….”

그들의 만담을 뒤로한 채 정다운은 스마트폰을 껐다 켰다 하면서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마녀는 그렇다 치고, 사라진 거미여왕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이 틈에 갑자기 기습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아라크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아라크네는 어디로 숨어 버린 거지?”

그 말에 소녀가 손가락으로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제 거미를 찾으세요? 저기 있어요.”

“뭐? 저거라고?”

정다운은 눈을 의심했다.

허름한 다락방의 모서리엔 지저분한 거미줄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거미가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이 거미가 아라크네라고?”

“네, 제가 키우는 애완 거미 아라크네예요. 귀엽죠? 엄청 부지런한 아이랍니다. 모기도 잘 잡아 주고요.”

소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애 완거미를 자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밝아 보여서 바하무트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크흐흑!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우리 마녀님, 이 시절에도 친구가 없으셨구나……!]

바하무트의 입에서 마녀에 대한 슬픈 전설이 흘러나왔다.

<바하무트의 이야기 (feat.마녀)>

옛날 어느 땅속에 한 소녀가 살았답니다.

소녀는 언제나 심심했고 친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친구를 만들었죠.

신기한 친구, 귀여운 친구.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소녀는 점점 행복해졌어요.

하지만 동시에 슬펐답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소녀의 상상이었으니까요.

[크흡, 뭐지? 슬퍼.]

“친구가 없었구나. 그랬구나…….”

소녀는 욱했다.

갑자기 모두가 자신을 가엾게 보고 있었다.

“상상이라니요!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흥, 우리 아라크네는 상상이 아니라 여기 실제로 있거든요? 내 얘기도 항상 잘 들어 준다고요. 그렇지? 아라크네?”

바동바동.

“응, 그렇다는 말이지?”

조용…….

대답은 없었다.

거미는 그냥 집이나 열심히 짓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소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봐요. 아라크네도 그렇다고 하잖아요.”

“…….”

“왜요? 뭐. 왜. 왜 자꾸 그런 눈으로 쳐다봐요? 나 진짜 친구 많다니까요?”

“…….”

정다운은 그동안 자신이 상상하던 마녀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얘…… 진짜 깬다.

그냥 궁금한 거나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라크네의 마지막 시험은 뭐야? 우리를 왜 여기로 불러들인 거냐고.”

“말 돌리지 마요. 지금 다른 얘기 하고 있었잖아요. 나 진짜 친구 많…….”

[고민할 것 없이 그냥 저 거미를 잡으면 안 됨?]

토끼의 말에 소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네? 안 돼요! 아라크네는 제 유일한 친구라고요. 지금은 저렇게 작고 말도 못하지만, 나중에 크면 엄청 예쁜 공주님이 될 거라고요. 아니다, 우리 아라크네는 여왕님이 더 어울려. 그치? 아라크네?”

소녀는 종달새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그 모습이 참 귀엽긴 한데……. 뭐랄까.

[혼자 놀기를 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네요.]

토끼의 말에 정다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손톱만 한 거미 한 마리로 혼자 잘도 노네.”

[자기는 아닌 척하시네? 님도 개미 한 마리로 잘도 놀더만.]

“……네가 뭘 알아?”

이쯤 되니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녀가 남 같지 않았다.

“어? 안 돼요!”

갑자기 정다운이 거미에게로 손을 뻗자 소녀는 깜짝 놀라 그를 말렸다.

톡.

거미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자, 그 순간 마녀의 일기장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

[아라크네]

사람들이 말하는 탑의 마녀는 사실 내가 아니라 아라크네야.

왜냐하면 우리 아라크네야말로 사실 엄청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왕님이라서 사람들을 다 홀려 버리거든.

우리 여왕님의 거미줄에 꽁꽁 묶이면 모두 충성스런 노예가 되고 말걸?

아라크네 여왕님, 얼른 무럭무럭 커서 나를 지켜 주세요.

“그랬구나.”

일기장 내용을 확인한 정다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미를 향해 계속 말을 거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강의 사정은 이해가 됐다.

소녀는 원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탑의 마녀가 자신이 아니기를.

그리고 거기서 소녀는 또 한 가지를 원했다.

그 나쁜 소문들이 사실은 자신이 키우는 거미에게 하는 말이고.

그 거미가 소문처럼 진짜 그렇게 변해서 자신을 지켜 주기를.

그리고 그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정다운은 거미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라크네, 지금 듣고 있지? 뭘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지키는 거지? 그게 네가 말한 마지막 시험인가?”

“저를 지켜 주실 건가요?”

대답은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진난만하던 소녀의 얼굴에 처연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정다운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지켜 준다. 어떻게든 지켜 줄게. 친구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얼씨구. 친구 없음에 감정 이입했네, 이 양반?]

이죽거리는 토끼를 정다운이 쏘아봤다.

“그럼 안 불쌍해? 죽을 때까지 친구 하나 없었다는데.”

“윽, 그건 좀. 말이 심하신 것 같…….”

“아, 참고로 나한텐 동료들이 있다? 나는 이 정도로 심하지 않다고.”

정다운은 단호히 못을 박았다.

“아무튼. 이제 뭘 하면 되는데? 누구한테서 너를 지키면 되지?”

그의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마을로부터요.”

“이 마을이면 뭐? 마을 사람들?”

“아뇨. 이 마을 전체요. 나는 산 제물이거든요.”

“뭐? 산 제물?”

그 순간이었다.

창밖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함성? 아니, 틀렸다.

그것은 누군가의 비명이었고.

악다구니였으며.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었다.

“마녀를 죽여라!”

“불태워 죽여!”

“이게 다 마녀 때문이야!”

“저 마녀만 아니었어도!”

“찢어 죽여 버려!”

쭈뼛!

정다운은 깜짝 놀라 창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뭐야, 저건……?”

어느샌가 탑 주변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

경비병들.

수많은 사람들이 악귀에 물든 표정으로 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화르륵!

두 손에는 뜨겁게 일렁이는 횃불과 끔찍한 무기들이 들고.

그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말은 단 하나였다.

마녀를. 죽여라.

“아아아…….”

털썩.

소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원독에 찬 살기는 어린아이가 감히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눈을 감아도.

자신의 가슴에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무형의 살기들이 심장을 무참하게 난도질했다.

토끼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여린 어깨를 다독이며 다급히 소리쳤다.

[참가자들이 안 보여요! 설마 다 죽었나?]

간간히 그들의 시체가 보였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와 같이 다녔던 사냥꾼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인파에 떠밀려 탑 안으로 도망쳐 들어온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장면, 본 적 있어.’

정다운은 거인의 꿈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은 이 뒷일을 알고 있었다.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은 죽고.

생지옥이 되어 버린 이 도시에서 기사 반다이크는 목숨을 바쳐 마녀를 구해 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반다이크가 없었다.

그런 거인이 있었다면 벌써 눈에 보였을 테니까.

아마도 이 기억은 반다이크가 아니라 마녀의 눈으로 본 기억.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시험이 뭔지 알았어. 그리고 이 던전이 뭐 하는 곳인지도.”

이제 보니 미로를 탐험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 복잡한 미로는 보물을 숨기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보물을 훔치러 들어온 자들이 안에서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가둬두는 용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마지막 시험은…….

“우리는 마녀를 이 도시에서 탈출시켜야 해. 반다이크를 대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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