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10화>
[……무슨 수작이지?]
“이쪽으로 도망치라고!”
처처처처척!
거미여왕 아라크네는 정다운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중 계단은 차곡차곡 쌓였고, 그 계단들은 중앙탑에서 시작해 미로 밖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육교가 되어 갔다.
자신의 거미줄보다도 훨씬 튼튼한 다리였다.
“일단 미로 어딘가로 숨어 있으라고! 나중에 우리가 따로 죽이러 찾아갈 테니까!”
[……?]
정다운의 말에 아라크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이상한 인간이 다 있을까?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도 이상한데, 나중에 죽이긴 하겠다니…….
‘진짜 뭐 하는 놈이지?’
하지만 이러는 와중에도 그가 만들어 내는 부유석들은 점점 넓고 크게 쌓여 가고 있었다.
이러다 중앙탑 앞에 새로운 탑 하나가 더 생겨날 기세였다.
“저, 저건 또 뭐야?”
거미 여왕을 향해 맹공을 가하던 참가자들은 잠시 주춤했다.
갑자기 하늘에 계단이 생겨나더니 자신들의 공격을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설마 최종 보스의 스킬인가?”
“설마 저 거미 여자가 밑으로 내려오기 위한 계단인가?”
“도망치려고?”
“순순히 기다려 줄 수는 없지!”
“이번에 놓치면 또 언제까지 여길 돌아다니게 될지 몰라!”
그들은 베테랑이었다.
최종 보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길 가만히 기다리는 건 바보나 할 짓.
거미여왕이 저 계단을 이용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해치우기로 했다.
번쩍! 파아앗!
“공격!”
“옆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여러 각도에서 공격해!”
“누가 저 계단도 부숴 버릴 수 있으면 부숴 버려!”
콰콰쾅! 쾅!
공중 계단을 향해 여러 스킬들이 폭발했다.
공중 계단에 듬성듬성 이가 빠지기 시작했다.
망령석이 파괴되어 부유력을 잃은 부유석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럼 또 만들면 되지. 차라리 여러 겹으로 만들어야겠다. 공중 계단! 공중 계단!”
처처처척!
정다운은 열심히 계단을 보강했다.
참가자들은 당황했다.
계단의 부피가 너무 커져서 옆으로 돌아가도 거미여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뭐지? 계단이 왜 자꾸 생겨나!”
“뭔 상관이야? 그럼 또 파괴하면 되지!”
“다 부숴 버리자고!”
콰쾅! 쾅!
참가자들은 용맹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며 공격을 퍼부었다.
엄청난 화력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꾸 생겨나는 부유석들의 주인이 정다운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어떤 참가자가 던전 보스를 구하려고 들어요? 님, 진짜 미친 거 아님?]
토끼는 정다운의 돌발 행동에 옆에서 종알종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님,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임? 설마 바하무트 때처럼 보스 빼돌리기라도 하게요? 상습범 쩌네! 이건 먼저 거미여왕의 생각부터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님? 이쯤 되면 그냥 납치라고요!]
[…….]
정작 아라크네는 계단 앞에서 꼼짝도 않고 망설이기만 하고 있었다.
밑에선 정다운이 그녀를 재촉했다.
“자, 얼른 건너라니까? 엄청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라크네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응? 왜?”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나는 절대 이 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아라크네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그리고 결국엔 너희들의 손에 죽겠지. 그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어? 자기가 죽을 걸 알아? 최종 보스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정다운.
아라크네는 결국 계단을 앞에 두고도 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탑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버렸다.
그곳엔 아라크네가 머무는 둥지가 있었다.
[저거 봐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던전의 법칙이 막 아무 때나 휙휙 바뀌는 게 아니라니까요? 님은 항상 던전을 너무 쉽게 생각함.]
토끼가 역사 선생님이나 쓸 법한 검은 뿔테를 콧잔등으로 치켜 올리며 정다운을 타일렀다.
[애초에 최종 유적지라는 건 던전의 괴물을 가두는 역할도 겸하는 거임.]
그렇지 않으면 참가자들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보스 괴물이 먼저 던전의 생태계를 다 파괴해 버릴 테니 말이다.
그 올무에서 자의로 벗어날 수 있는 괴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님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면 다 되지!”
[어? 어디 가요!]
무슨 생각인지 정다운이 갑자기 타조 골렘에 올라타 중앙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림자 비술!”
미야앙!
그림자 하인들도 쇠꼬챙이를 들고 타조의 그림자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또 뭐 하게요? 에잇! 진짜 손 많이 가는 양반이네!]
[후후, 토끼 선배여, 어쩌겠소. 주인님을 보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 어차피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선 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쫌! 반말을 하든가 존댓말을 하든가 하나만 하라고!]
토끼와 바하무트가 티격태격하며 정다운의 뒤를 따라 중앙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음?”
그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4명의 사냥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우린 뭘 어떻게 해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최종 보스와 싸우다가 갑자기 훼방꾼이 나타났고, 그 훼방꾼들에게서 최종 보스를 구하는 상황?
“정다운 씨는 대체 무슨 계획인 걸까요?”
“우리도 따라 들어가야 할까요?”
“……들어가긴 좀 무서운데.”
엄청난 수의 거미 군단과 기괴한 거미여왕을 봤더니 탑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들 앞으로 거미 여왕을 잡기 위해 달려온 열 명이 넘는 훼방꾼들이 당도했다.
그리고 보자마자 인상부터 험악하게 구겼다.
미로를 헤매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들은 거의 악에 바쳐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방해하지 마라! 저년은 우리가 잡을 거니까!”
“먼저 왔다 해도 소용없어! 설마 고작 너희 4명이서 우리와 맞설 생각은 아니겠지?”
“…….”
‘아니, 보자마자 협박부터 한다고?’
‘반대로 당해 보니까 기분 되게 나쁘네…….’
초면부터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을 윽박지르는 훼방꾼들을 보며 사냥꾼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짓했다.
생각이 복잡했는데 갑자기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최종 보스를 잡기 위해 완전 무장을 한 훼방꾼들의 몸에 아이템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자신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휘유, 이 친구들 아이템 좋은 거 많이 쓰네?”
“그러게요?”
뚜둑. 뚝.
그들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꺾고 두 팔을 스트레칭했다.
“하긴, 여기 숨겨진 보물이 뭔지는 몰라도 제 발로 걸어온 아이템을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자신들은 사냥꾼.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이템 사냥꾼이었다.
던전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저마다 다 다른 법 아니겠는가.
“하긴, 최종 보스보단 사람 상대하는 게 더 편하긴 하지.”
“어? 너희 설마 진짜 우리와 해보겠다는 거냐?”
“고작 그 인원수로?”
참가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리는 4명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 진짜 미쳤냐? 죽고 싶어?”
“이거 선물이다.”
피융!
“……!”
사냥꾼들의 손에서 정다운 공장의 신상품들이 빗발쳐 날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으니 과녁도 많고, 살짝이라도 스치면 효과는 최고였다.
“으악! 피해! 석화 화살이다!”
탑을 오르는 정다운의 뒤에서 번외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한편, 중앙탑 안으로 뛰어 들어온 정다운의 귓가로 서늘한 아라크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속삭이고 있었다.
[대체 어쩌려는 거지?]
[왜 자꾸 올라오는 거야?]
목소리는 벽을 기어 다니는 크고 작은 거미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에서 소문을 들려주던 좀비들처럼.
[보물을 찾는 거야?]
[맞아. 보물은 탑의 꼭대기에 있어.]
정다운은 탑을 올라가며 그 목소리들을 향해 대답했다.
“아냐. 보물도 보물이지만, 나는 널 통째로 훔쳐 갈 거야.”
[뭐?]
[보물이 아니라 나를?]
[왜?]
[나를 훔치겠다고? 왜?]
“왜긴! 널 사랑하니까!”
[으익? 아무 말 쩌시네.]
둘의 대화에 토끼는 오글거린다며 온 몸을 벅벅 긁었다.
[이러다 결혼하시겠네. 님 취향이 거미였음?]
“푸하하. 얼굴은 확실히 예쁘잖아!”
[히익? 여자는 얼굴 뜯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고요! 몸매도 좀 보라고! 몸매가 거미잖아요!]
“하긴, 내 어릴 때 꿈이 스파이더맨이긴 했지.”
틈틈이 토끼와 수다를 떨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숨 가쁜 상황의 연속이었다.
“바하무트! 앞길에 함정 있나 확인해!”
[명을 받들겠나이다!]
후오오오!
함정 처리는 바하무트가 도맡았다.
하지만 곳곳을 기어 다니는 거미들 때문인지 탑 안에 숨겨진 함정들은 거의 없었다.
이곳은 애초부터 함정이 아니라 좁은 계단을 따라 달리며 몰려드는 거미들을 상대하는 곳이었다.
“이때다! 더 빨리 달려!”
“꼬꼬오!”
그는 타조 골렘의 궁둥이를 팡팡 때리며 사방에서 몰려오는 괴물 거미들을 전부 무시하고 무작정 위층을 향해 내달리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꼭 탑 꼭대기에 납치된 연인을 구하러 가는 왕자님인 줄 알겠네요. 백마가 아니라 타조 골렘 탄 왕자님이네.]
토끼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님, 이러다 나중에 꼭대기에서 괴물들에게 포위당하면 진짜 위험해지는 거 알죠? 어쩌려고 그래요?]
“괜찮아. 여차하면 그때는 공중 계단 밟고 내려가면 되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요. 대체 무슨 목적인 거임? 흙 골렘이나 바하무트 때는 요행이 따랐었지만, 아무리 봐도 이번엔 뜻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 거미 아줌마 본인이 싫다는데 어쩔 거임?]
정다운은 토끼에게 대답 대신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바로 마녀의 일기장이었다.
[갑자기 이건 왜요?]
“아까 혹시나 해서 이 탑을 만졌더니 이런 게 뜨더라고.”
[탑의 마녀]
나 이번에 진짜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어!
마을 사람들이 나더러 사람을 홀리는 불길한 마녀라고 부른다더라?
그리고 얼굴 예쁜 거에 절대 속지 말래. 창밖에서 안 보이는 다리는 엄청 징그러운 괴물처럼 생겼다며.
흥. 진짜 웃겨! 본 적도 없으면서!
내 각선미가 쫌, 제법이거든?
게다가 마녀가 탑에서 안 내려오는 이유도 사실 꼭대기에 엄청난 보물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더라?
아니, 누구는 내려가기 싫어서 안 내려가는 줄 알아?
어디 보물이 그렇게 탐나면 올라와 보라고!
제발 부탁이야…….
내용을 확인하자 토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잉? 이거 설마 거미여왕 얘기임? 얼굴만 예쁘고 다리는 징그러운 괴물?]
“그렇지 않겠어?”
거미 여왕과 토끼가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정다운은 평소 습관처럼 마녀의 일기장을 꺼내 보고 있었다.
그동안 거미들이 너무 징그러워서 만지기도 싫었는데, 중앙탑을 만지는 순간 이런 내용이 뜰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마녀가 살던 건물이 이렇게 커졌으니, 이 건물 자체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앞다투어 아라크네를 죽이려 들자, 그는 일단 그녀를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상 마녀의 일기장은 일종의 게임 개발자 노트 같은 거야. 여기 적힌 내용들이 고스란히 던전 게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잖아.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어려운 말은 때려치우고요. 그래서 님은 마녀가 던전을 만들었다고 보는 거임? 종말의 용이 아니라?]
정다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생각엔 마녀는 아이디어 제공만 했을 거야.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 일기장을 남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주고 싶겠어?”
그는 확신했다.
마녀의 일기장만 본다면, 그 내용은 그냥 불쌍하게 살던 어린아이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애초에 마녀 본인이 던전을 만들었다면, 자기 일기장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해석했을 리 없지. 다른 누군가가 중간에 끼어든 거야.”
<종말의 용.>
한동안 조용히 있던 알파가 입을 열었다.
<정다운 님은 종말의 용이 마녀의 일기장을 토대로 던전 게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맞아. 원래 아이디어 내는 놈 따로 있고 만드는 놈 따로 있거든. 세상이 원래 그래.”
정다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일기장 내용대로라면…….
“어쩌면 거미여왕이 마녀일지도 몰라.”
그 말에 바하무트의 눈빛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