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09화>
* * *
거미 여왕 아라크네.
중앙탑의 외벽을 타고 내려온 여인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후후, 나의 둥지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너희도 내 인형들이 되어 주겠니?]
거미 여왕 아라크네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인형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까딱거리자, 그 끝에서 얇은 거미줄들이 그물처럼 펼쳐져 쓰러진 참가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어어!
그어어어어!
[네임드 보스예요. 조심하셈! 역시 세뇌가 아니라 거미줄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거였어요!]
토끼마저 긴장할 정도로 그녀의 등장과 함께 분위기는 급변했다.
인형사와 가까워지자, ‘인형’들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거미줄을 잘라 내도 순식간에 다른 거미줄이 달라붙어 다시 그들을 움직였다.
약점이 사라지면서 상대하기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어머? 귀여운 토끼구나.]
[히이익! 난 신경 쓰지 마셈! 난 맛없음!]
문득 아라크네가 토끼를 발견하고 입맛을 다시자, 토끼는 기겁하며 정다운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정다운은 그런 토끼를 업어 주며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겁나게 예쁘네.”
정확한 표현이었다.
징그러운 거미의 하반신과는 상반되게 아라크네의 자태는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
거기에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도자기처럼 빛났고.
나른한 눈빛은 정말 여왕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진짜 무서웠다.
[예쁘면 뭐 하나, 아래가 벌레인 것을. 사람 말까지 하니까 더 징그럽네요.]
[어머나. 숙녀에게 그런 실례의 말을 하다니?]
토끼의 말을 들은 아라크네가 눈가를 살포시 찡그리며 삐딱하게 그쪽을 쳐다봤다.
[주둥이를 뜯어 버릴까?]
오싹!
[히이이이! 아니요!?]
토끼는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늦었어. 그런 못된 말을 하는 주둥이는 뜯어 버려야지. 오너라, 나의 아이들아.]
사삭! 사사사삭!
갑자기 수백 마리의 괴물 거미들이 온 사방에서 벽을 타고 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내 입이 방정이었네! 벌레 싫어!]
토끼는 자신의 방정맞은 입을 앞발로 때렸다.
“큭! 거미 여왕이 이 근방 모든 거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도망쳐야 할 것 같아요!”
앞에 나가 싸우고 있던 사냥꾼들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미 아까 전부터 정다운의 그림자 궁수들이 지원 사격을 해 주고 있었으나, 수백 마리의 거미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괜찮아요! 할 수 있음!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다가오는 순서대로 잡으면 그만임!]
“넌 좀 조용히 해!”
[네, 역시 그러는 게 낫겠죠?]
토끼는 그냥 찌그러져 있기로 했다.
어느새 녀석에게 반말을 하고 있는 사냥꾼들이었다.
정다운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그러고 보니 거미는 벽을 기어 다니는구나.”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어지간한 괴물들은 벽을 쌓아 진로를 방해할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상대가 거미라서 벽을 타고 올라오는 게 가능했다.
부유석을 띄운다 해도 거미줄을 타고 오면 답이 없었다.
“정다운 씨!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뒷걸음치며 싸우던 사냥꾼들은 어느새 코끼리 골렘의 근처까지 떠밀려 있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열려라, 마법 창고.”
철컥!
그의 앞에 창고 문이 열렸다.
파아앗!
[어서 오시지요, 주인님. 창고 정리가 이제 절반 이상 끝나 가고 있나이다.]
그 안에서 정중히 인사를 해 오는 하얀 눈사람.
바하무트는 사방에 가득 찬 거미들을 보자마자 질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이렇게 더러울 수가!? 더러운 버러지들이 감히 주인님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구나! 주인님, 저에게 이곳의 청소를 맡겨 주시겠나이까?]
참으로 믿음직한 집사 바하무트가 기세등등하게 빗자루를 치켜들다가.
[아, 이게 아니지.]
헛기침을 하며 사신의 낫으로 고쳐 들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정다운이 알파를 불렀다.
“알파, 들었지? 바하무트한테 생명 에너지 좀 보내 줘.”
<알겠습니다.>
더러운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건 바하무트나 알파나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순간.
[오오오! 이런 충만한 힘이라니! 크하하! 감사합니다, 주인님! 블리자드!]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쿠오오오!
미로의 중앙탑을 중심으로 엄청난 한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력을 아끼지 않은 최대 출력의 눈보라가 거미들을 집어 삼키고, 허공에 나풀거리는 거미줄을 쥐어 뜯어냈다.
“뭐, 뭐지? 이 마법은!?”
“뒤로 빠지자!”
사냥꾼들은 깜짝 놀라 정다운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들은 어느새 금속제 갑옷을 꺼내 입고 있었는데, 이런 냉기 마법에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갑옷이 급속도로 차가워지며 더욱 시린 냉기가 뼛속까지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자, 몸 좀 녹여요.”
“……!”
따끈 따끈.
정다운은 어느새 태양석 무더기 앞에 앉아 손을 호호 녹이고 있었다.
[어머나, 왜 이렇게 추워졌지? 이런 마법을 부리는 자가 있다니.]
거미 여왕 아라크네는 당황하면서도 우아함을 결코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극한의 추위에 몸이 오싹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냉기를 피해 탑 위로 성큼 올라가자, 토끼가 이때다 싶어 깔깔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낄낄, 그렇게 벗고 다니니까 춥겠지롱! 나는 털이 있어서 괜찮지롱!]
[어머? 저 주둥이를 찢…….]
[아뇨. 사실 저도 춥답니다, 여왕님.]
어차피 질 거면서 틈만 나면 기어오르는 토끼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바하무트는 오랜만에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 버러지들! 나 바하무트가 네놈들을 친히 싹쓸이해 주겠노라!]
쿠오오오!
성에가 낀 벽과 바닥.
냉기를 머금고 점점 차가워져 가는 미로.
놀랍게도 이 구조는 바하무트에게 몹시 친숙한 구조였다.
마치 마녀의 집을 크게 확대해 놓은 듯하지 않은가!
[크하하! 크하하하! 죽어라! 이 버러지들아!]
서걱 서걱!
키이잇!
얼어붙은 땅과 벽을 타고 순간이동하며 사신의 낫으로 거미들을 도륙해 나가는 바하무트.
일일이 목숨을 노릴 것도 없이 다리만 잘라 내서 움직임을 봉쇄했다.
극한의 추위는 거미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고, 반대로 바하무트에겐 물 만난 고기처럼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크하하하!]
그 모습에 정다운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네, 원래 피 보면 안 되는 것 아니었어?”
[매번 말하지만, 쟤는 태생부터 글렀어요. 이미 언데드잖아요. 쟨 안 될 거야, 아마…….]
토끼는 자신과는 다르게 자신의 격이 깎이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바하무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휘오오…….
얼마 후 바람이 잔잔해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쓱싹쓱싹.
바하무트는 괴물 거미들의 잔해를 열심히 빗자루로 쓸어 한곳에 모아 두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라크네에게 인형이 되어 있던 참가자들이 분리수거 당한 재활용품처럼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 이렇게 끝난다고?”
“뭐야, 이게.”
사냥꾼들은 허무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왜 자신들은 처음에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걸까.
만사가 다 허탈했다.
키잇, 키이이…….
구석에 쓰레기더미처럼 쌓여서 몸을 바들거리는 괴물 거미들은 바하무트의 몸에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다.
이쯤 되면 거미들이 더 불쌍할 정도였다.
애초에 스테이지-4의 최종 보스였던 바하무트와 스테이지-5의 자잘한 괴물들과의 전투는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최종 보스는 여전히 건재했다.
[후우, 나의 둥지에 재밌는 아이가 찾아왔구나.]
말없이 바하무트가 천방지축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라크네의 눈매는 처음과는 다르게 사납게 올라가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뽀얀 입김이 나왔다.
[잘도 나의 아이들을 이 꼴로 만들었구나. 감히…….]
그때였다.
토끼가 빼꼼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줌마, 왜 아까부터 말만 하고 아래로 안 내려와요?]
[아줌…….]
움찔.
순간 아라크네의 눈매가 급격히 휘어졌다.
하지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화사하게 웃으며 토끼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탑에서 못 내려간단다.]
[잉? 왜요?]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음? 그걸 누가 정해요? 던전이?]
고개를 갸웃하는 토끼.
왜일까? 그 대답을 하는 아라크네의 미소가 조금 슬퍼 보였다.
[자, 이제 마지막 시험이 남았단다. 견뎌 보렴.]
아라크네는 탑 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악장처럼.
[이걸 견뎌 내면 너희는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거란다, 후후.]
‘보물!?’
그 말에 정다운과 사냥꾼들의 눈빛이 변했다.
아무래도 마을의 좀비들이 알려 준 소문은 사실이었나 보다.
그런데 아라크네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다.
[저 말투, 왠지 우리들한테 보물을 주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지 않아요?]
[안달까지는 아니지만……. 한번 노력해 보렴, 귀여운 토끼야.]
오싹!
그 순간 아라크네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앙!
[꺄악!]
“……!”
갑자기 멀리서 날아온 화염구체가 아라크네의 머리에서 폭발했다.
크게 휘청하는 아라크네!
“아자! 내가 잡았다! 봤어? 내가 잡았다고!”
“웃기지 마! 아직 안 죽었다고!”
정다운은 갑자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낯선 얼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한 채.
“다 물러나! 보물은 우리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뭐지, 저 사람들은?”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갑자기 나타나서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모습은 마치 이쪽을 협박하는 것 같았다.
정다운과 사냥꾼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토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재밌게 돌아가네요? 저 사람들 아까 쇠구슬에 쫓겨 다니던 바보들이에요.]
토끼의 말에 웃음 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바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무장 상태가 너무 화려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들의 양손에 장전된 수많은 스킬들이 거미 여왕 아라크네를 향해 일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잡아! 저년만 잡으면 보물은 우리 거야!”
“죽여! 파이어 스피어!”
화르륵!
콰쾅! 쾅!
[꺄악!]
쇠구슬에 쫓겼던 것은 그들의 스킬이 대부분 원거리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인해 당황한 아라크네는 추가로 이어지는 그들의 맹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탑 위로 도망가려고 하면 그 위를 먼저 공격해서 움직임까지 차단하는 센스가 돋보였다.
토끼가 정다운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와, 이러다 뺏기겠는데요? 어쩌실?]
“어쩌긴 뭐 어째! 일단 구하고 봐야지!”
[네? 누구를요?]
설마 하는 표정으로 토끼가 그를 쳐다봤을 때는 이미 정다운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다급히 외쳤다.
“빨리 이쪽으로 피해! 공중 계단! 공중 계단!”
처처처척!
[꺄악! ……응?]
몸을 웅크리고 모든 공격들을 맞고 있던 아라크네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펼쳐진 계단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