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06화>
정다운은 깨달았다.
이 마을은 마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틀림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 마을도 마지막에 다 불타고 무너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지금 이 마을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래. 그리고 그때 바닥에 죽어 있던 사람들 시체가 전부 좀비가 된 거라면 말이 돼.”
그는 마을을 둘러보며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이유까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줄곧 마녀가 생각했던 일들이 실제로 던전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갇혀 살았던 건물이 그 작은 아이의 눈에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미로처럼 보였을 거야.”
정다운은 마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아직도 자신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던 그 해맑은 미소가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태양처럼 밝으면서도 어딘가 그늘이 있었던…….
그는 애잔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기사 반다이크가 나한테 남긴 진짜 유품은 자신의 뼈가 아니라 그 아이의 미소였는지도…….”
[저기요. 초 쳐서 미안한데, 당근이나 뽑고 있으면서 그런 아련한 표정 짓지 말아 줄래요?]
“그럴까?”
토끼의 말에 정다운은 마녀보다 더 해맑은 표정으로 당근을 열심히 뽑았다.
그의 손을 따라 쑥쑥 잘도 뽑혀 나오는 싱싱한 당근들.
“으으, 이러면 진짜 안 될 것 같은데…….”
정다운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사냥꾼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어어어!”
“그아아악!”
극도로 흥분한 좀비들의 고성이 온 마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소중한 농작물을 건드린 서리꾼들을 잡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검은 안개 속에서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내는 좀비들의 모습은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물론 스킬만 쓸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섭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좀비들은 괘씸한 서리꾼들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절대 잡을 수가 없었다.
채소밭의 둘레는 이미 정다운이 쌓은 흙벽으로 인해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어차피 벽을 만드는 건 스킬도 아니라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채소밭은 하나가 아니었다.
정다운은 좀비들을 살살 피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밭이 보이는 족족 담벼락부터 쳤다.
정확히 뭐가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는 재미는 나중으로 미뤘다.
어차피 자신이 농부도 아니고 직접 뽑아서 생김새를 봐야 정확히 어떤 작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와서 안전한 담벼락 뒤에 숨어서 당근부터 뽑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점프도 못하는 좀비들에게 담을 넘어올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어어어!”
“응,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어차피 너네 채식주의자도 아니잖아. 좀 나눠 먹자고.”
“그아아악!”
“그런데 너네, 먹지도 않을 거면서 농사 진짜 잘 지었다?”
정다운은 좀비들에게 하나하나 대답(?)해 주며 밭을 옮겨 다녔다.
물론 땅굴을 파서.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푹푹! 팍팍!
“…….”
스푼으로 아이스크림 떠내듯 시원시원하게 뚫려 가는 땅굴을 보며 사냥꾼들은 이제 생각을 비우기로 했다.
일일이 놀라기도 지쳤고.
사방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소리에도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저런 스킬은 진짜 처음 봐요…….”
“뭘 어떻게 하면 저런 스킬이 생기는 거지?”
당최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땅을 파는 스킬도 아니고 흙을 뭉치는 스킬이었다.
“아, 이 안개 진짜 귀찮게 구네?”
땅을 파는데 자꾸 안개에 닿아서 스킬이 취소되자 정다운은 태양석들을 대거 꺼내 온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전부 리턴이 걸려 있어서 언제든 회수할 수 있기에 펑펑 뿌려 댔다.
그러자 안개가 점점 옅어지며 마을이 밝아졌고, 사냥꾼들의 표정 또한 덩달아 밝아졌다.
“어? 스킬을 쓸 수 있잖아?”
“이 돌을 어떻게 구하셨지?”
보통 부유섬 아래쪽에 분포되어 있는 태양석은 일반적인 참가자들이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이었다.
정다운은 당근을 일일이 뽑다가 귀찮다며 아예 당근 밭을 통째로 뜯어 버렸다.
그렇게 생겨난 네모난 당근 모종들을 신전에 옮겨 심을 생각이었다.
[얌얌. 달다.]
오독 오독.
“그만 먹어, 인마!”
아까부터 토끼는 자기만 한 당근 하나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야물야물 뜯어 먹고 있었다.
“원래 토끼가 당근 먹으면 죽는다던데……. 하긴, 삼겹살도 먹는 놈인데 상관없나?”
[히히.]
토끼는 마냥 신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더 신난 건 정다운 본인이었다.
아까부터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미로 안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미 들어가기도 전에 보물은 충분히 얻었다.
좀비들의 밭에서 키우는 건 당근 하나가 아니었다.
“오, 이건 상추가 아닌가!”
[상추가 뭔데요?]
“상추는 깻잎의 친구지!”
물론 원래 세상과 던전에서 자라는 농작물들이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었다.
농작물 중에는 이름도 모르고 생전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찾아 헤매던 보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배, 배추?”
그렇다. 배추를 발견한 것이다.
[배추도 깻잎의 친구임?]
“아니, 얘는…… 내 베프야. 크흑. 친구야, 보고 싶었다.”
털썩!
토실토실 잘 여문 배추 앞에서 정다운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결승 역전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으아아! 드디어 김치를 만들 수 있겠구나!”
“그어어어!”
“그아아아아!”
그의 세리머니에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좀비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그아아아아!”
[아, 진짜 시끄럽네! 좀비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월드컵 우승이 부럽지 않았다.
* * *
농작물 서리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중엔 사냥꾼들도 그의 눈치를 보다가 옆에서 주섬주섬 농작물을 따라 캐기 시작했다.
이럴 땐 먼저 줍는 게 임자였고, 정다운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따로 농사를 하면 되니까 양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휴, 이 정도면 미로에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들어가서 먹을 식량이 충분하네요.”
처음과는 달리 사냥꾼들의 표정엔 자신이 넘쳤다.
식량이 많아지니까 귓가로 바짝 들려오는 좀비들의 목소리조차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저 안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까?]
[들어가면 저주받을 거야.]
[아마 막상 보면 별것 아닐 거야.]
“그런데 쟤네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네요? 무슨 게임 NPC도 아니고.”
정다운은 꾸준히 들려오는 좀비들의 말소리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냥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워낙 좀비들이 많아서 계속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안에 계속 있다 보니 나름의 패턴이 느껴져요. 혹시 저 말 속에 미로에 대한 힌트가 들어 있는 게 아닐까요?”
“게임처럼요?”
그럴싸한 말이었다.
어쨌든 던전 게임도 나름 ‘게임’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최종 유적지 입구에 있는 마을에 어떤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때 한 명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지켜봤는데 좀비들 중에 조금 특이한 좀비들이 껴 있는 것 같아요.”
정다운이 그녀를 쳐다봤다.
“특이한 좀비요?”
“네.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하는 행동도 조금 다르고요.”
“……?”
‘특이한 좀비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펑펑 뿌려 댄 태양석으로 인해 온 마을이 환했으니까.
[딱 봐도 쟤네들인 듯?]
정다운을 잡기 위해 몰려온 좀비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개별 행동을 하는 좀비들이 있었다.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좀비들의 상태가 비교적 깨끗했다.
그런데 손에 농기구를 쥐고 있었고, 그 농기구들로 느릿느릿 새로운 밭을 일구고 있었다.
마치 밭을 빼앗기자 새로운 땅을 개간하려는 모양새였다.
“신기하네. 농부 좀비인가?”
[쟤네들이 농사를 지었나 본데요? 이쪽으로 안 오는 거 보니까 공격성도 없나 봄.]
진짜 신기한 놈들이었다.
멸망과 죽음이 가득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생산 활동을 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어어…….”
쪼르르 농부 좀비들에게로 날아간 토끼가 녀석들이 하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타까워.]
[에잉. 그 어린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성녀라고 떠받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선…….]
[쉿. 말조심하게. 자네도 경칠 일 있나?]
솔깃?
토끼의 귀가 쫑긋거렸다.
[음? 진짜 다른 놈들이랑은 완전 다른 말을 하는데요? 무슨 뜻이지?]
“쉿. 계속 들어 보자.”
정다운은 아예 공중계단으로 농부 좀비들의 머리 위까지 다가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성녀라고 떠받들 땐 언제고? 이거 느낌이 왠지…….’
계속 듣고 있으니까 왠지 머릿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안타까워.]
[불쌍해.]
[그 아이는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야. 오히려 축복이지.]
[쉿. 말조심하게. 자네도 경칠 일 있나?]
정다운과 토끼가 속닥거렸다.
“야. 아무래도 마녀를 말하는 것 같지?”
[그러게요. 마녀가 원래 성녀라고 였나 본데요? 그러게 내가 뭐랬음? 마녀라고 하기엔 너무 예쁘다니까요?]
“외모지상주의 봐라? 마녀가 원래 더 예쁜 거라고. 그런데 중요한 건 너 그런 말 한 적 없다.”
[아닌데요. 했는데요. 에베베.]
토끼가 얼른 말을 돌렸다.
[아무튼 얘네도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네요. 더 들을 것도 없음.]
좀비들에게서 알게 된 사실은 결국 마녀가 원래 전직 성녀였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정다운이 무심코 뒤로 몸을 돌리는 찰나, 바람 소리처럼 들려오는 애절한 목소리들이 있었다.
[제발 그 가엾은 아이를 구해 주세요, 반다이크 님.]
[우리는 결국 저주받을 겁니다. 부디 그 아이라도…….]
[행복하기를…….]
“어?”
휙.
정다운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더 이상 농부 좀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토끼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방금 그 말 들었냐?”
[뭔 말이요? 쉿, 말조심하게요?]
“아니, 반다이크가 어쩌고라고 한 말.”
[아뇨? 또 꿈 꿨음?]
“…….”
토끼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정다운은 소지품을 열었다.
“꿈이라…….”
그가 꺼내 든 건 반다이크의 반지였다.
거인의 손가락에나 맞을 법한 거대한 반지.
놀랍게도 그의 유품이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뭐야? 이 반지 갑자기 왜 발광함?]
“아무래도 내가 운이 좀 좋은 것 같은데?”
정다운의 손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반다이크의 반지를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반지에 맺혀 있던 빛이 가운데 원 안에 가득 맺혔다.
그리고 점점 앞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비눗방울처럼.
파아앗!
거대한 빛의 방울이 반지 앞으로 토옹 튕겨 나왔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거대한 미로의 벽을 향해 날아갔다.
[어? 뭐임? 뭔데요?]
토끼도 놀라고, 멀리서 지켜보던 사냥꾼들의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지만 정다운은 놀랄 겨를이 없었다.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간절한 목소리들 때문에.
[그 가엾은 아이를 구해 주세요, 반다이크 님.]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퍼엉!
빛의 방울이 터지며, 미로의 입구 옆에 새로운 구멍이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