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04화>
“이런 젠장! 포위됐습니다!”
좁디좁은 스마트폰 화면만 쳐다보며 걸었더니 어느새 주변은 다가온 괴물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쉬익! 쉭쉭!
성인 팔뚝보다 굵은 독사들의 입에서 독기를 머금은 쇳소리가 났다.
그 숫자가 못해도 최소 백 마리는 넘어 보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는 중이었다.
최대한 피한다고 피했지만, 괴물들에게도 움직일 수 있는 자유라는 게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근처에 뱀굴이 있었나 봅니다!”
“우리 발자국 소리를 듣고 몰려나온 것 같아요!”
바짝 긴장하며 서둘러 갑옷을 꺼내 입기 시작하는 사냥꾼들.
그와 동시에 횃불을 사방에 꽂아 주변 시야부터 밝혔다.
스킬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능숙한 대처에 토끼는 조금 감탄했다.
[호오? 사람을 상대하는 법과 괴물을 상대하는 법이 극명히 다르네요.]
어차피 참가자들처럼 스킬을 쓸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니까, 밝은 곳에서 싸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정다운 씨, 위험하니까 제 뒤에 계세요. 뱀과 싸울 땐 이런 무기가 있어야 돼요.”
정다운과 대화하고 있던 사냥꾼은 자루가 긴 도끼를 꺼내 들고 그의 앞으로 나섰다.
[후후, 이게 바로 던전 게임의 재미죠. 어제의 강도가 오늘은 동료. 서로 싸우다가도 고난 앞에선 일단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
토끼는 갑자기 외눈 안경을 쓰고 나타나 인생 다 산 현자처럼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쾅!
사냥꾼들은 도끼 끝을 길게 잡고 발밑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돌뱀의 목을 가차 없이 내리찍었다.
콰직! 쉬익!
단번에 토막 난 돌뱀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걸 신호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안개가 잠시 물러난 덕에 이곳에선 스킬 사용이 가능했다.
“실드!”
번쩍!
반투명한 배리어로 앞을 보호하고.
“깃털 이동!”
후웅!
몸을 가볍게 만들어 민첩성을 올리고.
“바람 칼날!”
파바박!
보이지 않는 칼로 돌뱀의 머리를 절단 냈다.
정다운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얘들아, 밟아!”
“크워어!”
“꼬꼬오!”
그의 곁에는 골렘들이 있었다.
혹시나 다른 괴물들을 자극할까봐 전부 끌고 오진 못하고 오거 골렘과 타조 골렘만 데리고 나온 것.
나머진 전부 마법 창고 안에서 얌전히 그가 불러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쿵쾅 쿵쾅!
“크워어!”
가차 없이 뱀들을 짓밟아 죽이는 골렘들.
잔뜩 성난 돌뱀들이 흙 골렘을 아무리 깨물어 봤자 아픔조차 못 느꼈다.
생명체가 아니니 독도 통하지 않았다.
[뱀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서 골렘이 상대하기가 까다롭네요.]
“그러게.”
다 뭉쳐 있으면 편했겠지만 서로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놈들을 상대하려면 골렘들이 엄청 발품을 팔아야 했다.
[열심히 잘 싸우고 있긴 한데, 부작용이 좀 있을 것 같은데요?]
토끼가 우려하는 바는 정확했다.
골렘들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근처에 있던 다른 뱀들까지 이쪽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앞에서 실드를 들고 싸우던 사냥꾼이 정다운을 돌아보며 외쳤다.
“아무래도 적당히 싸우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끝도 없는 소모전일 뿐입니다!”
“꺄악!”
그때 허벅지가 돌이 되어 있던 여성 참가자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리가 불편하게 싸우다 보니 돌뱀에게 또 빈틈을 허용한 것.
[와우, 님 방금 보셨음? 도끼 자루를 타고 올라와서 팔 토시랑 갑옷 사이의 빈틈을 골라서 깨물었어요!]
정확히 적의 취약점을 골라서 공격하는 뱀들의 지혜에 토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냥꾼은 팔등을 깨문 돌뱀을 황급히 떨쳐 냈으나 이미 뱀독은 퍼진 뒤였다.
순식간에 그녀의 팔등이 회색빛으로 물들며 딱딱한 돌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주위로 다른 돌뱀들이 몰려들었다.
“가서 도와줘!”
정다운이 그쪽으로 오거 골렘을 보냈다.
“크워어!”
쿵쾅 쿵쾅!
가차 없이 짓이겨지는 돌뱀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사냥꾼이 반색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어차피 돌뱀의 독은 길어 봐야 3일이면 사라지니까요.”
[아, 평생 돌이 되는 게 아니었음?]
“네. 시간이 지나면 독기가 빠지면서 돌이 된 부위가 원래대로 돌아와요. 그나마 물린 부위가 목숨과 직결되는 목이나 심장 쪽이 아닌 게 다행이죠.”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농담이 아니야. 진짜 큰일 났어.’
다리를 물린 게 바로 이틀 전 일이었다.
지난 이틀간 자신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던전을 도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런데 이번엔 팔까지 못 쓰게 된 것이다.
팔다리가 이런 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당장 같이 다니는 일행들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제 갑자기 적으로 돌변해 자신을 해코지하고 장비를 강탈해 갈지 몰랐다.
약하면 죽는 것이 던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회색빛으로 변한 그녀의 팔과 다리를 살펴보던 정다운이 토끼를 쳐다봤다.
“이거 혹시 정화되지 않을까?”
[될 듯요? 님 전문이잖아요.]
“어디……. 정화.”
파아앗!
파앗!
“어? 어어?”
사냥꾼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그의 손에서 생성된 새하얀 구체가 석화된 부위에 닿자 몸이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수가! 석화가 풀리고 있어!’
“음? 한 방에는 안 되네. 독이 강한가 보다. 정화, 정화!”
파아앗!
정화를 거듭할수록 돌이었던 면적이 좁아져 갔다.
그리고 결국엔 뽀얀 살결…… 아니, 지저분한 살결로 돌아왔다.
석화가 풀린 것이다.
“이, 이거 설마 정화인가요?”
“네. 맞아요.”
“세상에! 초반 스테이지에서 보고 한 번도 쓰는 사람을 못 봤는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어찌나 놀랐는지 전투 중인 것도 잊고 울먹거리며 정다운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다른 사냥꾼들도 정다운이 정화 스킬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크게 놀랐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화 스킬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니!”
“정화 스킬만 있으면 이제 돌뱀들은 전혀 걱정할 게 없습니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뱀은 안개섬에서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였다.
엄청 강한 괴물은 아닌데, 살짝만 물려도 곧장 움직임에 제한이 걸려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석화만 뺀다면 돌뱀에게 물리는 건 따끔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면!”
사냥꾼들은 정화 스킬을 믿고 자신 있게 뱀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갑자기 전투의 양상이 확 바뀌었다.
이제부턴 중요한 급소만 피하면서 싸우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석화된 부분은 뒤에서 날아오는 정화구체에 의해 즉각적으로 해결되었다.
“저희가 막고 있는 틈에 정다운 씨는 골렘을 타고 여길 지나가시죠!”
싸우다 보니 그들의 포지션은 점점 정다운을 둘러싸고 호위하는 모양새로 변했다.
게임으로 치면 힐러가 된 셈.
비록 돌뱀 한정이었지만 말이다.
정다운을 그들에게 철저히 보호받으며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잠깐만요.”
그런데 갑자기 그가 무슨 생각인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정다운 씨……? 안 가고 뭐 하십니까? 여기서 시간을 끌면 뱀들이 또 몰려들 겁니다.”
“뭐 하나만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
그는 양손에 목장갑을 착용하고 발 앞에 굴러다니는 돌뱀의 머리를 집어 들고 유심히 관찰했다.
‘아하, 처음 보는 괴물이라면 저럴 수 있지.’
사냥꾼들은 새삼 그가 후배 참가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그에게 다가와 조언을 건넸다.
“돌뱀은 아무리 잡아 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괴물입니다.”
“맞습니다. 괜히 잘못 만졌다가 손이 석화 저주에 걸려 버리면 정말 골치 아파서 가급적 안 건드리거든요.”
“식량으로도 못 써요. 석화 저주의 영향인지 고기 육질도 돌 씹는 것처럼 텁텁하고 뻑뻑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아까부터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자고…….”
하지만 정다운은 그들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돌뱀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흠. 이게 독니인가? 흉악하게도 생겼네. 독샘은 따로 없나?”
독니 끝에는 요사스러운 노란 빛이 맺혀 있었다.
[뭐 하셈?]
호기심에 다가온 토끼를 향해 그가 돌뱀의 입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불쑥.
“너 이거 한 번만 물려 볼래?”
[히익? 이게 뭐 하는 짓임!? 드디어 이 작자가 미쳤구나!]
“에이,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응?”
[저리 가, 이 악마야!]
화들짝 놀라 뒤로 빠지는 토끼.
그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정다운.
그들의 모습을 사냥꾼들은 어이없어하며 구경했다.
“살짝만 물려 봐라. 응? 생각보다 아프진 않을 거야. 뱀이 죽었어도 석화가 되나 궁금해서 그래.”
[정 그렇게 궁금하면 님이 직접 물려 보면 되잖아요!]
“난 아파서 싫어.”
[야잇! 이 소시오패스가! 그럼 나는 안 아프냐!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임!]
진심으로 버럭 한 토끼였다.
“저 사람들은 안 친하잖아. 내가 은근 낯가린다고. 걱정 마. 찔려도 진짜 따끔한 수준이래.”
[그러니까 님이 따끔하라고요!]
“난 따끔한 것도 싫어.”
[아, 어쩌라고!]
“쳇.”
정다운은 혀를 차며 별수 없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돌뱀 한 마리를 손으로 잡아 왔다.
쉬익!
물려고 머리를 치켜드는 놈의 뒷목을 손으로 냉큼 낚아채는 모습에 토끼가 어이없어했다.
[뭐지? 뜬금없이 잘 잡는 거 봐. 누가 보면 뱀꾼인 줄.]
“요령이지, 요령.”
요령도 요령이지만, 외뿔 멧돼지의 기운 덕분에 힘과 속도까지 추가된 덕분이었다.
그는 바둥거리는 돌뱀의 몸에 죽은 돌뱀의 입을 벌리고 이빨을 콱 박아 넣었다.
깨물!
쉬약!?
깜짝 놀라 몸을 비트는 돌뱀의 몸이 바로 돌로 변해 뻣뻣해졌다.
정다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되네? 내 생각이 맞았어! 죽었어도 효과가 있네!”
[아까부터 뭐 하려는 건데요? 그런데 그거 안 징그러움?]
“이 예쁜 놈이 왜 징그러워?”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석화된 돌뱀을 귀엽다며 토닥거렸다.
그러더니 귀여운 손주에게 꿀밤 때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딱밤을 때렸다.
“돌 깨기.”
따악!
쩌적!
[헐? 여기서 돌 깨기를?]
토끼는 경악했다.
놀랍게도 돌뱀의 석화된 부위가 진짜 돌처럼 금이 가 버린 것이다.
쩌저적, 투둑.
돌뱀의 몸이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오, 이젠 맨손으로도 돌이 깨지네? 거인의 뼈 덕분인가? 아니면 외뿔 멧돼지?”
돌 깨기는 돌보다 단단한 물건으로 때려야 스킬이 발동했다.
[와, 잔인해. 굳이 그냥 때려도 죽을 것을 굳이 돌로 만들어서 죽이다니. 이제 보니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였구나.]
겉으로는 빈정거렸으나, 토끼는 지금 정다운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석화의 저주와 돌 깨기 스킬의 조합이라니!’
지금까지 돌 깨기 스킬은 고작해야 동굴이나 파고 계단이나 깎는 생산 스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상대를 먼저 돌로 만들어 버린다면?
갑자기 어떤 돌이라도 깰 수 있는 스킬이 초강력 전투 스킬로 변해 버리는 셈이었다.
“좋은 무기를 얻었어.”
정다운은 눈을 빛내며 돌뱀의 입에서 독니를 뽑아냈다.
요사스러운 노란 빛을 머금은 독니를 세상 아름다운 보석을 바라보듯 기특한 눈으로 감상하며 말했다.
“이걸 가공해 화살촉으로 만든다면 어떨 것 같아?”
[아, 대박…….]
자기도 모르게 감탄해 버린 토끼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정다운의 머릿속에는 그림자 궁병들이 뒤에서 석화 화살을 쏘고, 돌로 변한 괴물들을 무참히 박살내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원샷원킬! 일격필살!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대체 누가 그랬던가.
아무리 돌뱀을 잡아 봐야 쓸모없다고.
“여러분, 아까 잡은 뱀들 전부 모아 주실래요?”
“…….”
갑자기 정육점에 온 손님처럼 주문을 넣는 그의 모습에 사냥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이미 자리를 펴고 그림자 하인들과 옹기종기 앉아 돌뱀의 입에서 독니를 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