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03화>
사냥꾼들은 이 섬을 가리켜 ‘안개섬’이라 소개했다.
안개섬은 스킬을 무효화시키는 심연의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땅 위를 흘러 다니는 곳이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수시로 위치가 바뀌는 안개 지역을 피해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참가자들은 섬 중앙에 있는 ‘미로’에 모여들게 됩니다.”
“미로요?”
“네. 이 섬 중앙에는 복잡한 미로가 존재합니다. 미로 안은 높은 벽 때문에 안개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미로 중앙에는 높은 탑이 우뚝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 보물 상자가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목숨이 아까운 사냥꾼들은 정다운의 질문에 앞다투어 대답하고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비밀도 아니고 섬을 돌다 보면 금방 알게 되는 사실들이었다.
[음. 미로를 뚫고 들어가 선착순으로 보물 상자를 획득하면 이기는 게임인가 보네요. 선착순 게임임.]
간단하게 던전 게임의 요지를 정리하는 토끼였다.
그런데 정다운은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요. 미로 중앙에 보물 상자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무도 본 적 없을 텐데요?”
[음? 듣고 보니 그러네요? 본 사람들은 이미 다음 섬으로 넘어가고 없을 텐데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누가 소문을 내요? 도우미가?]
“아뇨. 그게…….”
사냥꾼들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깜짝 놀라는 정다운과 토끼였다.
[마을 사람?]
“마을이 있어요?”
“네. 미로의 입구 앞에는 마을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틈새 마을 같은 곳임?]
“아닙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참가자들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입니다.”
“……!”
[……!]
참가자가 아니라고?
던전의 주민?
순간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정다운과 토끼였다.
“가 보자.”
[개궁금.]
그러기 전엔 준비가 필요했다.
* * *
“뽀뀨?”
[어허, 일하는데 자꾸 알짱대지 말거라.]
“뀨우?”
마법 창고를 정리하던 바하무트는 뽀뀨가 부담스러웠다.
어딜 가도 자꾸만 쪼르르 따라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였다.
아니, 정확히는 두개골이 따가웠다.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된다. 내 두개골은 먹는 게 아니란 말이다.]
“뀨우우.”
바하무트의 황금 두개골을 목격한 뒤로 뽀뀨는 틈만 나면 바하무트를 졸졸 따라다녔다.
부비적.
바하무트는 자신에게 몸을 부비적거리는 뽀뀨의 애교가 너무 소름 끼쳤다.
‘에헤이, 그러지 말고 딱 한 입만.’이라는 느낌 아닌가.
[어허, 주인님이 네 집도 만들어 줬지 않느냐. 껄떡대지 말고 거기서 잠이나 자거라.]
뭉그적.
“끼육! 뽀끼……!”
바하무트는 빗자루 끝으로 창고 구석에 마련된 번쩍거리는 황금 투구 안으로 뽀뀨를 떠밀었다.
뽀뀨는 안 들어가겠다고 용을 써 봤지만 물렁물렁한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데굴데굴 굴러 투구 안으로 쏙 들어가게 된 뽀뀨.
그 안에서 뽀뀨가 막 심통을 부리려는 찰나였다.
들썩!
“뽀꾹!?”
갑자기 황금 투구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정다운이었다.
바하무트가 넙죽 엎드렸다.
[주인님 오셨나이까. 송구스럽게도 아직 정리가 덜 끝났나이다.]
“오, 그럴싸한데?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3세 된 기분이다.”
[송구스럽나이다.]
바하무트는 겸양을 떨었지만 창고는 처음에 비해 상당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특히 정다운이 마녀의 서재에서 공수해 온 널빤지로 만들어 준 선반이 압권이었다.
균일한 작은 칸막이 안에는 시계와 반지들, 그리고 스마트폰들이 예쁘게 진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정다운은 그것들보다 뽀뀨의 둥지로 쓰려던 황금투구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이리 벌러덩 저리 벌러덩거리던 뽀뀨는 그만 사래 들린 소리로 항의했다.
“삐꾹 삐꾹!”
“어? 미안. 놀랐어? 딸꾹질까지 하네.”
“삐꾹.”
머쓱하게 뽀뀨를 밖으로 꺼내 주는 정다운.
하지만 황금투구는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투구 안면부에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맞춰 대보며 말했다.
“흠. 뽀뀨한테 미안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게 딱이겠는데?”
“삐꾹?”
황금투구는 비록 장식용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실제와 똑같이 안면부에 ‘바이저(Visor)’라고 하는 눈가리개가 있었다.
위로 젖혀 놓으면 얼굴이 드러나고 전투 시에는 앞을 덮어서 얼굴을 보호하는 용도였다.
정다운은 눈가리개 안쪽에 스마트폰을 끼워 넣고 치실을 돌돌 묶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딸깍.
“봐. 내가 딱일 거라 했지?”
정다운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황금투구를 머리에 착용해 봤다.
물론 그 전에 카메라 어플을 띵동.
“오, 보인다, 보여!”
눈가리개를 내리자,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깥 상황이 시야로 들어왔다.
눈가리개가 너무 눈과 가까우면 오히려 초점이 안 맞았을 텐데, 서양인의 높은 콧대 때문인지 눈가리개가 조금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딱 맞았다.
“이걸 쓰고 다니면 안개 지역에서도 시야가 확보되겠지?”
이번에 스마트폰을 손으로 들고 싸워 봤더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머리에 고글처럼 쓰고 다니면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위기 대처에 용이할 것 같았다.
[어차피 횃불을 들고 다니면 안개가 물러날 텐데 굳이 이럴 필요 있어요?]
“횃불이 있다고 멀리까지 다 보이는 건 아니잖아. 상황에 따라 벗고 쓸 수 있다는 게 포인트라고.”
눈가리개를 위로 올리고 씨익 웃는 그의 모습에 토끼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그러고 돌아다닐 생각임?]
황금 투구는 쓸데없이 너무 화려했다.
* * *
“지, 진짜로 그렇게 다니실 겁니까?”
길 안내를 위해 땅에서 뽑아 준(?) 사냥꾼들은 정다운의 차림새를 보고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제정신인가 싶었다.
가뜩이나 서로 장비를 숨기는 분위기에서 황금투구를 쓰고 다닐 생각을 하다니.
“분명 이걸 보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을 겁니다.”
“뭐, 그때 가서는 다시 소지품에 넣으면 되죠. 어차피 안개 속에서만 쓰는 용도니까요.”
정다운은 지문 인식을 실패한 여벌의 스마트폰 하나를 사냥꾼들에게 건네줬다.
“자, 아저씨들은 이걸로 길을 찾으세요.”
지문 인식이 안 되었어도 카메라 어플 정도는 실행시킬 수 있었다.
“헉? 카메라로 보면 안개가 뚫려 보이네요? 처음 알았습니다.”
“어떻게 아직까지도 배터리가 남아 있을 수 있죠?”
“배터리가 100퍼센트야!”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 경악하는 사냥꾼들.
서로를 쳐다보는 표정에서 그 생각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쩐지 아까 우리 위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더라니! 이런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니!’
‘설마 핸드폰에 이런 기능이 있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대박이다! 앞으로 이거 하나만 있으면 심연의 안개도 무섭지 않겠구나!’
그들의 모습에 토끼가 귓말로 우려를 표했다.
[저거 그냥 막 줘도 돼요? 그러다 저거 들고 도망치기라도 하면요?]
“걱정 마. 어차피 저거 하루 이틀이면 배터리 끝나니까. 여기 충전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일부러 목소리를 내서 대답하는 정다운의 말에 움찔하는 사냥꾼들.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다운은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토끼를 매도했다.
“너는 너무 사람을 못 믿는 게 문제야. 인간은 배신을 모르는 동물이라고.”
[쟤네들이 님 죽이려고 했었는데도요?]
“그땐 모르는 사이였고. 지금은 서로 도움받는 관계가 되었잖아? 인간을 믿자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림자 비술.”
니야앙.
정다운은 그림자 하인들을 하나씩 사냥꾼들의 그림자에 달아 주었다.
사냥꾼도 넷, 하인들도 넷.
숫자가 딱 맞아서 사이가 참 좋아 보였다.
흉악한 쇠꼬챙이를 들고 사냥꾼들의 등 뒤에 바짝 서 있지만 않았다면.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착한 애들이니까요. 던전이 워낙 험악한 세상이다 보니 보디가드로 붙여 드린 거예요.”
“…….”
[낄.]
과연 누구를 위한 보디가드일까.
토끼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고, 사냥꾼들은 그냥 군소리 없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마을은 이쪽입니다.”
* * *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말이다.
“여기부턴 독사 밭입니다.”
“징그러우니까 돌아가죠.”
“여기부턴 전갈 밭입니다.”
“피해 가죠.”
“…….”
사냥꾼들은 허탈했다.
‘이 섬이 이렇게 한산한 곳이었다고?’
심연의 안개 덕분에 범독수리가 없으니까 안개섬은 거의 산책로 수준으로 한가로웠다.
괴물이 보이면 피해 가면 그만이고, 괴물들조차 안개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니 먼저 덤벼들지 않았다.
“나 핸드폰 괜히 버렸나 봐. 이럴 줄 알았으면 챙겨 둘 걸…….”
“난 아직 가지고 있는데, 충전을 못 하면 있으나 마나야.”
“저분은 대체 어떻게 충전을 한 거지? 배터리 충전 스킬이라도 있나?”
사냥꾼들은 이동하는 내내 한가롭게 뒤를 따라오는 정다운의 황금투구를 계속 힐끗거렸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귀금속들이 그 비밀일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
“저, 오래 걸어서 피곤하지 않으세요?”
“……?”
아까부터 사냥꾼 중 한 여자가 틈만 나면 정다운에게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장비를 걸치지 않았기에 굴곡진 몸매가 밖으로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본인도 그걸 뻔히 아는 듯 은근슬쩍 아슬아슬한 포즈를 취하며 정다운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돼. 그것만 알면 고생 끝이야.’
사실 정다운에겐 그냥 물어봐도 얼마든지 대답해 줄 용의는 있었다.
하지만 참가자들 사이에선 자신의 중요한 스킬이나 비밀들을 알려 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이상 아무리 궁금해도 먼저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친해진 뒤에…….’
그녀의 모습을 정다운이 황금투구 안에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뜨거운 시선을 느낀 여자는 쑥스럽다는 듯이 몸을 비틀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네, 더러움이요. 좀 씻고 다니지. 머리는 감고 다니나?’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리는 정다운이었다.
이놈의 던전은 진짜 씻는 게 항상 문제였다.
아무리 예쁘고 잘생겼어도 하루면 금방 꼬질꼬질해지는 것이다.
그동안 이 4명의 사냥꾼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살아왔는지는 그들의 꾀죄죄한 행색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친해지면 비누라도 줘야겠네.’
정다운은 설마 저 몰골로 자신을 유혹할 생각인지는 추호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런데요, 누나.”
“네? 제가 누나인가요?”
사실 너무 지저분해서 사냥꾼들의 나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니면 말고요. 아무튼 그 허벅지에…….”
“제 다리요?”
“네. 누나 허벅지가 왜 그래요? 묘하게 딱딱해 보이는데.”
“아, 이건……. 독사에게 물려서요.”
“독사요?”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회색빛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허벅지를 슬며시 감췄다.
“네. 안개섬의 독사에게 물리면 그 부분이 돌처럼 굳어 버리거든요. 전투 중에 그만…….”
“돌처럼이요? 진짜 돌이 돼요?”
그 말에 어째서인지 눈을 반짝이는 정다운이었다.
“네. 그래서 우리는 돌뱀이라고도 불러요.”
[석화 저주인가 본데요?]
그때였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사냥꾼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