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201)화 (201/393)

<던전리셋 201화>

한가한 시절도 다 갔다.

크르렁!

다음 부유섬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부유섬과 가까워질수록 어째서인지 범독수리들이 하나둘씩 하늘 신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야? 왜들 갑자기 이러는 거지? 이젠 어둠이 안 무섭나?”

[심연의 안개가 좀 묽어진 느낌 안 들어요?]

“아, 설마?”

정다운은 원인을 깨달았다.

이유는 부유섬 표면에 붙은 태양석들 때문이었다.

태양석의 빛과 가까워질수록 어둠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고, 검은 기둥이 무서워 다가오지 않던 범독수리들이 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

크르렁!

쿠와앙!

범독수리들의 거친 공격이 시작되었다.

토끼가 발을 동동 굴렀다.

[히익? 노를 저을 것이냐, 공격을 막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다운이 명령했다.

“고릴라 골렘은 노를 젓고, 켄타우로스는 방어해!”

“크워어!”

“오오옴!”

방어는 기동력이 빠른 친구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 이거 아직 몇 개 못 만들었는데. 하나씩 들어!”

“오옴?”

정다운은 켄타우로스들에게 대장간에서 무기 하나씩을 챙겨 주었다.

[골렘용 삼지창 +2]

- 내구력 : 100/100(%)

- 옵션 1 : 단단함 (1레벨)

- 옵션 2 : 관통력 (1레벨)

예전에 대신전 앞을 지키던 가고일의 돌삼지창을 흉내 내어 만들어 본 무기.

하지만 아직 대장간 실력이 어설프다 보니 멀리서 보면 그냥 우악스럽게 큰 포크처럼 보였다.

그 포크로 이제 호랑이 치킨들과 싸워야 했다.

“공격!”

“오오옴!”

푹푹!

거대한 포크로 하늘을 찔러 대는 골렘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범독수리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일단 이걸로 최소한의 방어는 됐고.”

[던전 콩! 던전 콩! 아니지, 쟤네는 터프해서 콩알탄 따위는 소용없음. 그냥 얼른 튀죠! 섬이 코앞인데!]

상공에서 범독수리들과 싸우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게다가 하필 지금은 호박 포차에 뚜껑도 닫혀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불리했다.

“드디어 이걸 쓸 때가 됐구나.”

그가 이번에 대장간에서 들고 나온 건 길고 납작한 철판이었다.

얇고 날렵한 날개가 묘하게 휘어있었는데, 가운데는 손가락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그건 뭐임? 뭔가 만들다 만 것 아니었음?]

“이게 완성이라고.”

그는 씨익 웃으며 구멍에 손가락을 꽂았다.

“돌리기!”

비우우웅!

[……!]

프로펠러가 맹렬히 회전하며 강풍 이상의 바람이 생성되었다.

어느덧 6레벨이나 된 돌리기 스킬 덕분이었다.

[손가락 안 아픔?]

“내 손가락뼈는 튼튼하니까 괜찮아!”

[아, 거인의 뼈?]

“게다가 마찰열을 줄이기 위해 내가 구멍 안쪽에 슬러그까지 써서……!”

[말 좀 그만하고 뭐라도 해 봐요! 이 설명충아! 쟤네 자꾸 덤비잖아요!]

“오케이! 그림자 비술!”

니야앙!

의기양양하게 거들먹거리려던 정다운이 그림자 하인들을 전부 소환해 손가락에 프로펠러를 하나씩 꽂아 주었다.

“자, 돌려라!”

비우우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 하인들의 손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프로펠러들!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오호? 이걸 이용해 신전 속도를 높이시려는 거군?]

“고작 얘네들로 그게 되겠냐? 이렇게 무거운 신전을?”

[그럼 뭐 하게요?]

프로펠러가 헬리콥터만큼 크다면 모를까, 지금 수준으로는 무리였다.

“이건 이렇게 써야지.”

그는 그림자 하인들에게 프로펠러 바람을 범독수리들에게 겨냥하게 했다.

후우웅!

“크르릉!”

거센 바람이 날개를 뒤흔들자 공중에서 잠시 비틀거리는 범독수리들.

하지만 금방 균형을 잡고 무서운 눈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그때였다.

씨익.

정다운이 사악하게 웃으며 프로펠러 앞에 고춧가루를 뿌리기 시작한 건.

후우우욱!

“크륵!?”

“……!”

“키약!?”

당연한 말이지만 눈에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참 맵다.

시뻘건 고춧가루가 섞인 강풍에 휘말린 범독수리들은 괴성을 지르며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자기들끼리 충돌하기도 하고 방향을 못 잡아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으악! 제대로 못 뿌려요? 내 눈에도 들어갔잖아요!]

옆에선 토끼가 눈을 비비며 펑펑 울고 있었다.

치사하게 혼자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정다운은 용맹하게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노를 저어라! 드디어 육지에 도착했도다!”

결국 하늘 신전은 무사히 부유섬에 정박할 수 있었다.

위치는 저번과 같이 섬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합체시켰고, 그때 비로소 범독수리들의 공격도 끝이 났다.

*   *   *

섬에 도착하자마자 궁금한 건 역시 이거였다.

“알파? 승우 형은?”

<미니 제단은 다른 곳에서 느껴집니다.>

아쉽게도 류승우 일행이 도착한 섬은 이곳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네.”

[일단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게 먼저겠어요.]

“그래야겠다.”

정다운은 조바심 내지 않았다.

아무리 길이 꼬여도 어차피 딱 한 번만 같은 섬에 도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 후로는 이동 방식이 서로 다르더라도 같은 검은 기둥을 탈 수 있어서 계속 같이 다닐 수 있었다.

“한번 어떤 곳인지 올라가 보자고. 흙 뭉치기! 흙 뭉치기!”

그들은 땅을 파고 섬 위로 올라갔다.

토끼는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서 종알대기만 했다.

[앗, 조심해요! 어딘가에서 살기가 느껴짐!]

“너 그런 것도 느낄 줄 알아?”

[그럼요. 제가 또 왕년에 사람 죽이는 쪽으론 빠삭했죠. 암살왕 토끼라고 불러 주셈.]

토끼가 어깨를 우쭐거리며 으스댔다.

그 말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섬 위로 올라온 순간 정다운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왜 여기도 어둡지?”

놀랍게도 섬 위에 심연의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정다운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진짜 심연의 안개인가 본데? 스킬이 먹통이야.”

[방금 전까지도 흙 뭉치기는 썼잖아요?]

“그건 땅속이라 그랬나 보지. 지금도 바닥에 손을 딱 붙이면 흙 뭉치기 정도는 가능해. 안개에 직접적으로 닿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럼 골렘이라도 꺼내 오셈.]

“그래야겠다. 아이템은 사용할 수 있겠지?”

그가 바분의 황금열쇠와 자물쇠를 꺼내 들었다.

철컥.

파아앗!

그의 앞에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창고 정리 중이던 바하무트의 얼굴이 빼꼼 나왔다.

[주인님.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골렘들 좀 꺼내 줘.”

황금열쇠는 의외로 쓸모가 많았다.

부유섬에서는 좌표가 흔들려서 제단 위가 아니면 게이트를 열지 못한다.

하지만 마법 창고는 자물쇠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문이 열렸다.

미리 골렘들을 창고 안에 들어가 있게 하면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도 마법이라면 마법이었다.

[어? 안개가 창고 문을 녹이고 있어요! 얼른 나와, 얼른!]

“크워어…….”

결국 창고 문이 안개에 녹아 버렸고, 점점 줄어드는 문을 통해 간신히 밖으로 나온 건 사이즈가 작은 오거 골렘과 타조 골렘 2마리뿐이었다.

[구멍을 더 넓게 파서 밑에서 데리고 나오죠.]

“아냐. 일단 멀리 안 돌아다니면 되니까 여기에 베이스캠프부터 짓자.”

정다운은 올라온 땅굴 구멍 위에 일단 자동문을 설치해서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넓게 흙벽을 둘러 담장을 만들었다.

“좋아. 일단은 안심이야. 안개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붕까지 덮어 버리자고.”

하지만 지붕 작업은 끝까지 하지 못했다.

토끼가 계속 경고하던 살기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신입인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흠칫!

갑자기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정다운이 뒤를 돌아봤다.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토끼가 눈을 빛냈다.

[오호라, 피 냄새가 짙네요. 사람 좀 죽여 본 놈들인가 본데요?]

남자 둘, 여자 둘.

그들은 후배 참가자들을 노리고 섬 외각에서 대기하고 있던 참가자들이었다.

그들의 복장이 상당히 단출한 걸 본 토끼가 휘파람을 풀었다.

[휘유, 야해라. 거의 벌거숭이네요? 여자 몸매 좋다. 남자 몸매는 더 좋네요.]

고도로 발달된 근육과 날렵한 몸매.

그들은 모두 구호열과 같은 육체파 전사들이었다.

장비가 거의 없어서 자신들의 굴곡진 몸매를 밖으로 여실히 드러낸 그들의 모습에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거지들인가? 헐벗었네.”

움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거의 처음 본 정다운의 악의 없는 말에 그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토끼가 혀를 차며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귓말로 속삭였다.

[거지가 아니라 강도예요. 장비를 차고 있지 않은 이유는 자기들끼리도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르니까 그래요. 도둑놈들끼리 모여 다니는 거라 서로를 믿지 않는 거임.]

“아하, 난 또 진짜 거지인 줄.”

[님보단 거지겠죠.]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정다운과 그들의 복장에는 격차가 컸다.

하필이면 지금 그의 온몸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열 손가락에 금반지가 주렁주렁, 금목걸이도 주렁주렁.

던전 졸부 정다운의 모습을 확인한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대체 뭐 하는 놈인데 복장이 그따위지?”

“던전이 아니었어도 강도당하기 딱 좋겠군.”

할짝.

무심결에 입맛을 다시는 그들의 눈은 이미 정다운을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걸어 다니는 아이템 덩어리로 보였다.

“던전에서 괜히 저렇게 꾸미고 다니진 않겠지. 저게 다 아이템이라니 대박이군.”

사실 ‘괜히 저렇게 꾸미고 다니고 있는’ 정다운으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탐욕에 가득한 눈으로 무기를 잡고 정다운을 향해 동시에 덤벼들었다.

“흐흐, 아가야. 아무리 좋은 아이템들이 많아도 혼자 다니면 강도 맞기 딱 좋단다!”

“……!”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데도 상당히 빠른 움직임에 정다운은 솔직히 감탄했다.

“오, 엄청 빨라! 대박인데?”

[방심하지 마요! 무기들이 날카로워요! 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최소 2년 전에 던전 게임을 시작한 사람들임!]

토끼라고 모든 참가자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토끼는 재빨리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혹시나 자신에게 무슨 골탕이라도 먹었던 사람들이라면 괜한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 정체를 들키기 전에 빠져 주려는 것이다.

대신 토끼가 사라진 안개 속에서 거대한 곰돌이가 나타났다.

바로 오거 골렘!

“크워어!”

“……!”

“이런 젠장! 오거가 왜 여기 있어!”

막 정다운에게 칼을 들이대려던 참가자들이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세히 보면 얼굴이 곰 인형이었는데, 전신이 오거 가죽이라 착각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뒤로 빠진 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전열을 가다듬어 오거까지 사냥하기 위한 것!

“내가 맡을게요!”

피융!

뒤로 빠진 여자가 활을 쐈다.

그런데 화살이 노린 건 오거 골렘이 아니라 정다운의 목젖이었다.

콱!

“이런 건 안 통하지.”

정다운은 놀랍게도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 버렸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씨익.

“아무래도 처음에 섬 구경을 좀 하려면 가이드가 필요하겠지?”

콰앙!

그의 두 발이 땅을 박찼다.

서로 스킬을 사용 못 한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정체불명의 반격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심연의 안개 속에서도 외뿔 멧돼지의 기운은 여전히 그의 전신에 깃들어 있었다.

콰앙!

정다운이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가 서 있던 땅이 움푹 파인 걸 본 참가자들의 눈이 흔들렸다.

“일단 뒤로 빠져! 생각보다 강한 놈이다!”

심상찮은 느낌을 받자마자 능숙하게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기는 참가자들.

자신들은 사냥꾼!

사냥감을 잡기 위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쪽은 다수고, 원거리 공격이 가능했다.

“위치와 방향을 정확히 파악했으니 지금부터는 활만 쏴도 잡는다!”

그때였다.

띵동.

정다운의 손에서 스마트폰 카메라가 켜졌다.

“오, 역시! 이 안개도 마법적인 거라 카메라로 보면 잘 보이는데?”

과연 누가 사냥꾼인가.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안개 속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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