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00화>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이런 망할 지문 인식!”
정다운은 ‘까맣게’ 켜진 액정 앞에 엎드려 좌절하고 말았다.
<지문 인식으로 잠금 인식을 5회 실패했습니다. 패턴을 대신 사용하여 잠금을 해제하세요.>
“패턴을 내가 어떻게 알아!”
세상일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기껏 옹골찬 금반지 하나를 통으로 녹여 핸드폰을 충전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가차 없었다.
<패턴을 잘못 입력했습니다.>
<패턴을 잘못 입력했습니다.>
<패턴을 잘못…….>
“…….”
아아, 이 얼마나 보안이 철저한 세상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 핸드폰을 열어 보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
결국 ㄱ, ㄴ, ㄷ, ㄹ 순으로 패턴을 아무렇게나 입력해 보다가 패턴까지 차단당하게 된 정다운이었다.
구경하던 토끼가 혀를 내둘렀다.
[얄짤 없네요. 어째 던전 공략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 같음.]
<사용자 인식 마법이라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장비였나 보군요.>
감탄하는 알파에게 정다운이 넌지시 물었다.
“알파야, 이거 혹시 풀 수 없어?”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사용자 인식 마법을 억지로 깨려고 했다간 폭발하거나 저주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저주씩이나? 그 정도는 아니라고.”
[결국 아까운 금반지 하나만 날린 셈이네요, 낄낄.]
토끼는 이미 놀릴 준비가 끝나있었다.
“아냐. 이 중에 분명 잠금 안 걸린 폰이 하나쯤은 있을 거야.”
어차피 금이라면 물장구치며 놀 정도로 많았고, 바닥에 널린 게 스마트폰이었다.
정다운은 다른 스마트폰을 주워 들고 희망차게 말했다.
“알파! 될 때까지 해 보자!”
<알겠습니다. 이쯤 되니 저도 궁금하군요. 금을 소모합니다.>
번쩍!
금반지가 또 하나 사라졌다.
하지만 계속되는 잠금 화면.
<지문이나 잠금 해제 패턴을 그리세요.>
“젠장. 다시!”
번쩍!
<지문이나 잠금 해제 패턴을…….>
“다시! 다시!”
번쩍! 번쩍!
<지문을…….>
<잠금 해제 패턴을…….>
“아니, 뭔 보안을 이렇게 꼼꼼히 해 놓고 사는 거야!?”
[에헤라디야! 축제로구나! 에블바리 얼쑤! 이히히히!]
오랜만에 정다운이 난항을 겪는 모습에 토끼만 신나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효율이 안 좋다더니 진짜였네요! 낄낄깔!]
이렇게 사치스런 가성비가 또 있을까?
사실 금을 녹여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시작 화면조차 볼 수 없다니…….
이쯤 되면 오기가 생겼다.
“진짜 내가 어떻게든 열어 보고 만다!”
번쩍! 번쩍! 번쩍!
정다운은 거의 도박 중독자가 패가망신할 기세로 계속 금을 소모시켰다.
역시 쉽게 얻은 돈은 쉽게 나가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는가.
[낄낄. 지금 이걸 죽은 바분이 봤어야 했는데, 이히히히!]
그랬다. 사실 토끼가 바닥을 뒹굴며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는 진짜 이유.
사실 패가망신하고 있는 건 정다운이 아니었다.
바분이 평생에 걸쳐 긁어모은 전 재산이 지금 한낱 전기세로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제발 그만 좀 해! 좀 말려 보라고!’
토끼에겐 들리는 기분이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바분이 옷을 찢고 분통을 터뜨리며 제발 저 인간 좀 말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목소리가.
[그런데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임? 이거 전투에 도움이 돼요?]
“된다!”
자신 있는 그의 말에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도움 된다고요?]
“응. 반드시. 내가 억울해서라도 어떻게든 전투에 써먹고 말거야.”
계속되는 실패 행진에 처음엔 그냥 음악이나 들어 보려던 그는 초심을 잃었다.
이젠 정 안 되면 스마트폰을 던져서라도 괴물을 때려잡을 기세였다.
물론 배터리 완충된 폰으로만 말이다.
그때였다.
“좋아, 이거라면 어떨까!”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는 정다운의 손에 효도폰이 들려 있었다.
<금을 소모합니다.>
파아앗!
드디어 성공!
액정 위로 효도폰의 아름다운 로고가 떠오르며 잠금 화면이 없이 환한 시작 화면이 떠오른 것이다.
“나이쓰! 열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누군지도 모르는 핸드폰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화면을 이리저리 넘겨보는 정다운.
“오?”
아무래도 폰 주인은 어머니뻘 되는 가정주부였나 보다.
사진첩에는 꽃 배경의 가족사진이 몇 장 들어 있었고, 어플은 자식들이 대신 깔아 준 것 같은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어플이라는 것들이…… 전형적인 주부 9단을 위한 어플들이었다.
[꿀팁 백과]
[상식 도우미]
……
소름이 돋았다.
“으악! 세상에 맙소사!”
거의 골렘을 처음 만들었을 때 수준으로 정다운은 감동을 먹었다.
그러한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토끼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왜요? 이게 뭔데 그래요? 갑자기 뭔 도우미임?]
“말조심해. 너보다 훨씬 훌륭한 분이라고.”
[……?]
정다운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어플 하나를 꾹 눌렀다.
그러자 액정에 놀라운 화면이 떠올랐다.
[상식 도우미]
-국수 쫄깃쫄깃하게 삶는 법
-두부 만드는 방법 “우리집표 손두부!”
-야채 스프는 암을 예방해요!
-질긴 고기를 연하게 하려면?
-껌딱지 붙은 옷 세탁법
-다이어트엔 과일 식초!
-수도꼭지 광내는 법
……
“대박. 진짜 대박이다. 진짜 보물을 발견해 버렸어!”
정다운은 엄청나게 흥분해 버렸다.
뜻밖에도 주부100단을 위한 꿀팁 어플들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오프라인용 어플이라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어떤 전투 상식보다 더 중요한 생활 상식들이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보물처럼 따라 올라왔다.
“이럴 수가! 나 전부터 진짜 수도꼭지 광내는 법이 너무 궁금했다고! 이렇게 하는 거였다니!”
[아니,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
“두부도 이렇게 만드는 게 정석이었구나! 이 방법을 쓰면 범독수리의 질긴 고기도 연하게 만들 수 있는 건가!?”
[……?]
어리둥절.
엄청나게 들뜬 표정으로 어플을 정독하는 정다운의 반응에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토끼였다.
그런데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나보다 더 훌륭한 도우미라고요?]
“음악도 한번 틀어 볼까?”
당연히 와이파이가 없으니 인터넷 스트리밍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장 메모리에 깔려 있는 음악들이 몇 개 있었다.
꾸욱.
“뮤직 온!”
쿵떡쿵떡! 아모X 파티~!
“크으! 이거지!”
신명난 음악과 함께 정다운의 어깨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왜 음악이 나와요? 이거 악기였음?]
들썩 들썩!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춤부터 추기 시작하는 토끼.
“부귀영화가 따로 없구나!”
[이 와중에 춤은 또 더럽게 못 추시네! 깔깔.]
언제나 그는 허리가 문제였다.
유연성이 통 없으니 팔다리만 허우적댈 뿐.
그런데 뜻밖의 변화를 토끼가 발견했다.
춤은 분명 못 추는데, 갑자기 그의 모든 동작에 절도가 생긴 것이다.
전에 없던 변화였다.
[헐, 설마 그거 거인의 뼈 효과임?]
“뭐?”
그 말에 정다운도 그제야 본인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거인 기사 반다이크의 뼈를 이어받은 후로 뼈가 곧아지고 튼튼해졌다.
그 결과 자세가 좋아진 것이다.
[님 혹시 이제는 제국창법을 제대로 펼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그러려나? 어디…….”
그는 솔깃한 표정으로 옆에 꽂혀있는 황금으로 만든 화려한 창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배운 기억을 토대로 창술 자세를 잡았다.
“하앗!”
아모X 파티~! 쿵떡쿵떡!
신나는 음악에 맞춰 펼쳐지는 제국창법!
그 동작에는 마스터 레벨의 외뿔 멧돼지의 기운으로 4배의 힘이 담겨 있었고, 올곧은 뼈 덕분에 창끝이 정확히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파창!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공기를 찢어발기는 황금창!
소리만 들어도 엄청난 위력이 느껴졌다.
그의 힘이 창을 타고 창끝까지 고스란히 실려 들어간 것이다!
[만세! 해냈다!]
“돼, 됐어?”
환호성을 지르는 토끼를 보면서도 정다운은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다시 해 봐요! 연결 동작으로 해 보셈!]
“이렇게?”
그가 멋진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창술 잡지가 있다면 표지 모델로 발탁될 기세.
하지만 좋아하기엔 일렀다.
파창! 파창!
[아뇨. 한 번씩 두 번 말고, 자연스럽게 연결해 보라니까요?]
“아하? 난 또. 이렇게 말이지?”
슝! 슝!
[아니, 연결하라니까요?]
토끼의 표정이 점점 짜게 식어 갔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이 와중에도 반복되는 신나는 배경 음악.
“이렇게?”
슝. 슝.
[아니라니까! 아따, 그놈의 유연성 진짜!]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아쫌! 저 망할 음악 좀 꺼요!]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누구 놀리나!]
찌르기를 반복할수록 그의 자세는 확실히 점점 제국창법과 흡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공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허리를 유연하게 잘 돌려야 가능한 문제.
잔뜩 기대했던 토끼는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다.
[에효, 애초에 뼈가 문제가 아니었네. 그냥 님이 몸치인 게 문제였음.]
기럭지가 쭉쭉 뻗은 모델들이라 해서 춤을 다 잘 추는 건 아니었다.
처음 공격 한 번에 상대의 균형이 무너지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그 빈틈을 통해 반격을 당하기 딱 좋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전보다 훨씬 강해지긴 했잖아. 이젠 좀 그럴싸하지 않아? 여기에 돌리기 스킬까지 접목하면 더 대단하고.”
[그래. 이럴 바엔 차라리 일격필살을 노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창끝에 독도 바르고 강화도 걸고 난리부르스 쳐 봅시다.]
아모르~
[아 쫌!]
…….
애꿎은 스마트폰에만 성질내는 토끼였다.
음악을 끄고 스마트폰을 집어 든 정다운이 말했다.
“그래도 이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라고. 인류 역사에서 스마트폰이 얼마나 대단한 발명인지 알기나 해?”
[괜히 말 돌리지 마셈.]
“들켰어?”
[내가 님을 하루 이틀 봐요?]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정다운은 피식 웃으며 카메라 어플을 틀을 틀고 토끼를 비췄다.
토끼의 성격이라면 분명 사진 찍는 걸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헐, 소름.”
[왜요?]
“너 왜 카메라에 안 비치냐?”
[그게 뭔데요?]
오싹하게도 토끼의 모습은 카메라에 전혀 잡히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도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마치 토끼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정다운은 식겁한 표정으로 토끼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너 진짜…… 유령에 가까운 존재였구나.”
[기왕이면 정령이라고 해 줄래요?]
“그럼 목소리는 들리나?”
이번엔 동영상 녹화 버튼을 틀고 토끼를 촬영해 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목소리는 또 녹음되는 것이다.
“와, 신기해. 너 진짜 유령이었네?”
[진짜 혼날래요? 정령이라고 했죠?]
문득 정다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이걸 이용하면 환상을 이용한 함정이나 망령 같은 거에 속지 않겠는데?”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 있던 그림자 고양이들을 향해 카메라로 그 모습을 비췄다.
니야옹?
“얘네도 유령이네.”
신기하게도 그림자 고양이들도 카메라에 찍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 비술을 이용해 그림자 하인들로 변신시켜 카메라를 들이대자 이번엔 또 보였다.
“그림자 하인은 유령이 아닌가?”
[그림자 비술은 환상에게 실체를 만들어 주는 비술이나이다.]
“아, 깜짝이야.”
옆에서 그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던 바하무트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마법 함정을 잠시 들어가 보더니 크게 감탄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제국의 보물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었을 줄이야. 주인님, 저에게 이 창고의 관리를 맡겨 주시겠나이까? 정리를 하다 보면 제가 알고 있는 보물들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보물 눈사람 바하무트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