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99화>
바분의 마법 창고에 들어선 순간, 휘황찬란한 황금빛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정다운은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박.”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금빛 찬란한 귀금속들.
황금왕관, 황금갑옷,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와 반지 등등.
이름 그대로 온갖 ‘금은보화’가 바분의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여기…… 진짜 보물 창고였네요? 황금열쇠라더니 진짜였네.]
토끼도 놀랐는지 입을 벙긋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창고는 골렘들이 다 들어와 앉아 있어도 될 정도로 넓었다.
이 넓은 비밀 공간을, 바분은 황금빛으로 가득 채우고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한구석에는 골드바로 만들어진 넓은 욕조도 있었다.
그 안엔 물 대신 온갖 금은보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바분이 벌거벗고 그 안에 들어가 황금으로 목욕하는 장면을 떠올려 본 토끼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니, 욕심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욕심쟁이었다고? 이딴 쓸모도 없는 장신구들이 뭐가 이쁘다고.]
토끼의 말에 정다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옷에 집착하는 놈이나, 보석에 집착하는 놈이나. 도우미들은 다 이래?”
[이거 왜 이래요? 패션을 모르시네. 이렇게 황금으로 똥칠하는 게 다 좋은 게 아니라고요. 천박하기만 하죠.]
“우리 솔직해지자.”
[……?]
정다운은 발에 채이는 굵직한 금 목걸이를 집어 들어 토끼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자.
[으악?]
쿵-!
목걸이의 무게를 못 이긴 토끼가 앞으로 납작 엎어지고 말았다.
정다운은 웃음이 빵 터졌다.
“너 그냥 귀금속이 무거워서 꾸미고 싶어도 못 꾸미는 거지?”
[흥, 아닌데요? 이건 그냥 다리가 아파서 누운 건데요?]
“갑자기?”
[네. 갑자기. 살다 보면 아무 데서나 눕고 싶을 때 없음?]
목걸이에 눌려 발만 동동거리면서도 끝까지 뻔뻔한 토끼였다.
정다운이 목걸이를 치워 주자 토끼는 천연덕스럽게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났다.
[아, 다 쉬었다. 개운하네.]
“푸핫.”
정다운은 낄낄대며 천천히 보물 창고를 거닐며 감상했다.
“나 갑자기 부자 된 기분인데? 보면서도 실감이 안 난다. 이게 다 얼마야?”
정말이지 엄청난 창고였다.
발에 채이는 게 금반지요, 금목걸이였다.
그야말로 부귀영화!
우직.
하나 들어서 이로 깨물어 보자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났다.
“오! 진짜 순금이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정다운.
그동안은 식량 부자였다면, 이번엔 진정한 의미의 부자가 된 것이다.
이것들을 고스란히 들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방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럼 뭐 해요? 여기서 당장 쓸 일이 없는데. 황금 갑옷 입고 괴물들이랑 싸울 것도 아니고요.]
의외로 실속파인 토끼였다.
보물들 중에는 장식구뿐만 아니라 금으로 된 칼이나 갑옷도 있었다.
하지만 이로 깨물어도 우그러지는 순금은 방어력도 공격력도 형편없었다.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치품일 뿐인 것이다.
“뭐 어때!”
하지만 정다운은 이미 신이 나 있었다.
그는 굵직한 보석반지들을 다 주워 열 손가락에 다 끼우고, 금 목걸이도 목에 디스크가 오기 전까지 주렁주렁 걸었다.
그랬더니 머리가 또 심심해서 황금왕관까지 쓰고 두 팔을 번쩍 들어 근엄하게 소리쳤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꼴값도 가지가지네.]
“어허, 짐에게 꼴값이라니! 내가 바로 왕이다. 아니지, 황태자다! 푸처핸접!”
선글라스까지 썼더니 최소 클럽의 황태자는 된 기분이었다.
“거울도 있네?”
한쪽 벽에는 또 보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전신 거울도 있었다.
던전에 와서 오랜만에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 정다운은 조금 충격을 먹었다.
“나 무슨 성장기야?”
오랜만에 봤더니 살도 찌고 키도 컸다.
혈색도 좋고 피부도 탱탱했다.
던전에 와서 그동안 그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거울은 좋네요.]
토끼도 그 옆에서 한껏 자신의 모습을 뽐냈다.
갑자기 허영덩어리가 된 둘은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결국 식상해졌다.
정다운은 부귀영화의 정점에서 결국 깨달음을 얻었다.
“허허, 삼라만상. 이깟 금은보화 따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범독수리도 아닌데.”
[벌써 질렸다고!?]
“산은 산이로되 금은 금이로다. 금 최고.”
[……?]
찰박 찰박.
정다운은 눈 돌아가게 번쩍거리는 황금 욕조에서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들려 나온 팔찌를 보더니 알파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놀랍군요. 이건 제국의 보물들입니다. 그 팔찌에 세공된 문양은 왕족의 상징입니다.>
“왕족의 상징이라고?”
<왕족의 보물에는 마법이 걸려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오? 강화 장비 말하는 거지? 그럼 여기 잘 찾아보면 쓸 만한 아이템도 있을 수 있겠는데?”
정다운은 눈을 빛내며 바자회에서 잡동사니라도 뒤지듯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두 손으로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렇다 할 만한 물건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바분이 생명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강화 아이템들은 전부 제물로 바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좋다 말았네. 알파, 너 생명 에너지 느낄 수 있잖아? 탐지 안 돼?”
<힘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빛을 왜곡시키는 보석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에너지 파장이 꼬여 버립니다.>
“아쉽네. 그래도 계속 찾아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보물들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이쯤 되면 바분의 전직이 의심스러웠다.
“바분 전직이 혹시 도둑이었나? 아니면 창고지기?”
<왕족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고물상 아님? 이거 보셈.]
“음? 그건?”
토끼가 발견해서 들고 온 물건을 본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은빛과 금빛, 예리한 바늘.
튼튼한 외관 속 스포티지한 디자인.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 오며 현대 남성들에게 부의 상징으로 여겨진 고가의 사치품을 토끼가 들고 있었다.
“시계네? 롤렉스?”
뜬금없이 명품 손목시계가 보물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도 있네?”
새로운 눈으로 다시 주변을 살펴봤더니 반짝이는 물건들 속에는 의외로 원래 세상의 사치품들도 상당히 섞여 있었다.
솔직히 귀금속들 디자인은 뭐가 이쪽 세상이고 뭐가 저쪽 세상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떡하니 로고가 쓰여 있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도 있네. 예쁘긴 하다.”
[이거 아무래도 바분이 참가자들이 죽을 때마다 빼돌린 것 같아요.]
어떤 메이커인지는 상관없이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면 무조건 챙긴 느낌이었다.
피케이 참가자들이 죽은 시체에서 장비와 무기를 챙긴다면, 그 후에 바분은 쓸모는 없으나 예쁜 사치품들을 챙겨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의외의 발견이 있었다.
“스마트폰? 아이패드? 뭐가 이렇게 많아?”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무거워서 보석들 바닥에 골드바와 함께 현대의 고가품들이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 이거 알아요. 이거 참가자들이 맨날 보물처럼 손에 항상 들고 다니는 물건이잖아요.]
토끼는 스마트폰을 알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던전 게임 초반에 진짜 보물이라도 되듯이 핸드폰을 항상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오지에 떨어졌으니 구조 요청을 하고 싶은데 전화도 인터넷도 터지지 않으니 답답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집에서 자신을 찾는 전화가 올지도 모르니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스테이지-2에 있던 바분은 스마트폰에 대해 토끼처럼 잘 알지 못했나 보다.
“앞뒤로 반짝거리니까 모르고 보면 색깔에 따라 귀금속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얼굴까지 비칠 정도니까.”
[바부바부 바분.]
“배터리 남은 거 있나? 오랜만에 음악이라도 듣자.”
꾹. 꾸욱 꾹.
물론 먹통이었다.
“그래, 이런 식이지 뭐.”
던전 초반에 참가자들이 밤이 되면 가장 먼저 사용하게 되는 기능이 바로 스마트폰 플래시 기능이었다.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나중엔 결국 횃불을 만드는 법을 익히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는 스마트폰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배터리를 눌러 봤지만, 안타깝게도 전원이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정다운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쉽다. 이렇게 부자가 됐는데 나는 핸드폰 하나 없는 인생이구나. 세상만사 다 헛거구나.”
[얼씨구? 이번엔 또 우울 모드임? 거의 조울증.]
“넌 이 기분 모른다…….”
허탈한 마음에 배가 고파졌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마음에 너무 신나게 놀았나 보다.
정다운은 보물 한가운데 힘없이 주저앉아 냄비를 꺼내 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쌀떡으로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왜 요리를?]
토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고추장이 생긴 후로 여러 가능한 요리들이 많아진 정다운.
자작자작하게 끓인 물에 떡을 송송 넣고 가진 야채를 뿌렸다.
그리고 보글보글…….
[아니, 갑자기 왜……?]
“휴우. 다 됐네.”
떡볶이는 방법만 알면 라면처럼 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요리였다.
정다운은 떡볶이를 만드는 내내 슬픈 표정이었다.
그리고 떡볶이가 다 되자 아이패드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렸다.
“이렇게라도 써야지…….”
사치의 정점.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냄비 받침이 탄생했다.
정다운은 슬픈 표정으로 아이패드 위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떡볶이가 흘리지 않게 스마트폰 하나를 턱 아래를 받치기도 했다.
“맛있네…….”
[…….]
그를 황당하게 쳐다보던 토끼는 주섬주섬 자기도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와서 옆에 앉았다.
[저도 주셈.]
“그래, 먹어라.”
그런데 그때였다.
알파가 스마트폰에 관심을 보였다.
<흥미로운 물건이군요. 겉보기엔 단순하게 생겼지만 안쪽에 마법진처럼 복잡한 에너지 회로도가 느껴집니다.>
“뭐!? 마법진처럼? 너 혹시 이거 작동시킬 수 있겠어?”
깜짝 놀란 정다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흡사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알파의 대답을 기다렸다.
<단순히 생명 에너지만 주입하는 거라면 물론 가능합니다만.>
“뭐! 진짜!?”
<물론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에너지 파장을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순간 들떠서 김칫국부터 마시려는 정다운에게 알파가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생명 에너지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힘입니다. 그 힘을 종말의 용은 ‘마력’이라는 형태로 사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오러’라는 형태로 사용합니다. 그 에너지는 전부 고유의 파장이 다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우리가 쓰는 생명 에너지를 이 장치의 회로도에 맞는 힘으로 바꾸기 위해선 연금술을 이용해 파장을 바꿔야 합니다.>
“연금술……? 마법도 모자라서 이번엔 연금술이야?”
[그럼 연금술사가 있어야겠네요? 낄낄.]
잔뜩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정다운을 보며 토끼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런데.
<제가 할 수 있습니다만?>
“헉? 가능해?”
<재료만 충분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재료는 여기 잔뜩 있군요.>
“……!”
그 말에 정다운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황금빛!
<연금술의 주재료는 황금입니다. 황금을 매개체로 소모한다면 에너지 파장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
어려운 말은 넘어가고, 여기 넘쳐 나는 금을 재료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음악을 듣자! 역시 클럽엔 음악이 있어야지!”
<효율이 엄청 안 좋습니다만. 정 원하신다면 살짝 해 보겠습니다.>
짠순이 알파도 처음 보는 스마트폰이라는 마법 장비(?)가 궁금하긴 했나 보다.
파아아앗!
알파의 말과 함께 정다운의 손가락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금반지들 위로 황금빛 기운이 새어 나왔다.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