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98화>
* * *
한편 류승우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두 번째로 간 부유섬은 처음보다 훨씬 넓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놀랍게도 선객들이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선배’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환영한다, 후배들아.”
그들보다 먼저 스테이지-5에 들어온 선배 참가자들.
그들은 류승우 일행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낌새가 이상했다.
꿀꺽!
류승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윤진수에게 온 귓말을 슬쩍 확인했다.
<윤진수 : 말은 환영한다고 하면서 왜 무섭게 입맛을 다시는 걸까요?>
<류승우 : 일단은 지켜보자고.>
이럴 때 귓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참 좋았다.
손등에서 올라오는 황금빛 글씨가 남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었지만, 글씨 크기도 작았고 무엇보다 이런 밝은 날씨에는 멀리서 보면 티가 안 났다.
문제는 여전히 용의 사도가 아니어서 귓말을 쓰지 못하는 구호열이었다.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선배 참가자들은 말로는 환영한다면서도 류승우 일행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무기를 꺼내 들고 스킬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뭐 하려는 겁니, 읍!”
눈치 없이 앞으로 나서려는 구호열을 윤진수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아저씨,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함정?”
키득.
“어머, 눈치 빠른 후배들이네?”
선배 참가자들 중 한 명이 입매를 삐죽이며 말했다.
눈매가 매섭게 생긴 여성 참가자였는데, 던전을 탐험하는 것 치고는 유독 장비가 단촐하고 몸매가 드러나 있었다.
‘왜지?’
이상한 복장이었다.
다시 보니 복장들이 조금씩 단촐했다.
“던전에서 저런 복장을 하는 경우는 두 가지뿐입니다.”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바로 오창석 촌장이었다.
“하나는 진짜 개털인 경우, 다른 하나는…….”
그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굳어 있었다.
“누가 자신을 죽였을 때, 자신이 들고 있는 장비들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경우.”
“……?”
그들 중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나이 어린 윤진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장비템을 노리는 피케이에 당하지 않으려는 거네요.”
“피케이(PK)?”
게임 용어인 플레이어 킬(Player Kill)을 말하는 것이었다.
던전에서 참가자들끼리 아이템을 노리고 서로를 죽이는 일은 간간히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죽인다 해서 죽은 사람의 소지품에 있는 물건까지 다 빼앗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얻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직접 들고 있는 물건들뿐.
그래서 혹시나 좋아 보이는 무기라도 가지고 있다면 언제 어느 날 같은 참가자들에게 뒤통수를 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서로 미연에 방지하고 있는 참가자가 있다면?
그들은 언제나 피케이를 신경 쓰는 이들일 것이다.
“정말 반가워, 얘들아.”
진심으로 후배들을 반가워하고 있는 선배 참가자들의 눈은 독사 같은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 * *
스테이지-1에서 뜯어 온 자동문은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바닥이 열리기도 하고.
천장이 열리기도 하고.
대리석처럼 생긴 것도 있고.
진짜 문짝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그중에서 정다운이 분해하고 있는 건 열쇠 구멍이 달려 있는 자동문.
“오, 던전에서도 나사를 쓰네? 그럼 더 편하지.”
문짝을 결속하고 있는 일(-)자 나사를 보고 정다운은 대장간에서 드라이버부터 만들어야 했다.
“십(+)자 나사였으면 드라이버 만들기도 조금 까다로웠을 텐데 잘됐다.”
역시 던전이나 어디나 사람들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보다.
필요가 발명을 낳고, 발명이 문명을 발전시킨다.
사실 현대 문명에서도 십(+)자 나사가 발명된 시기는 고작해야 1900년대 초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일(-)자 나사는 르네상스 시대 때도 흔히 사용되었을 정도로 인류의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무리 던전이라고 해도 예전엔 사람 사는 곳이었던 만큼 나사가 있는 것도 당연했다.
“아, 그럼 다른 함정들도 다 나사로 결속되어 있으려나? 다른 함정들도 나중에 발견하면 찾아봐야지.”
그는 신기해하며 납작한 드라이버로 나사를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돌리기.”
돌리기 스킬까지 썼더니 거의 전동 드릴 같은 기세로 나사가 풀렸다.
드르륵- 톡.
드르륵, 톡.
손바닥에 톡톡 나사들이 모여 갈수록 느껴지는 보람도 컸다.
[오오, 신기하다. 함정 해체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처음 봐요.]
옆에서는 토끼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 구경하고 있었다.
함정 해체 스킬들은 많이 봤는데, 이렇게 수동으로 일일이 해체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엇, 이건 이가 닳아서 안 돌아가네.”
개중엔 나사머리가 닳아서 드라이버가 헛도는 나사도 있었다.
아무리 리셋되는 함정이라도 제작 당시부터 망가진 나사였다면 그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음, 종이를 대고 같이 돌려 볼까?”
잠깐 고심하던 정다운은 빈 마법서를 한 장 뜯어서 나사머리 위에 덧댔다.
그리고 그 위에 드라이버를 올리고 꾹꾹 누르며 돌리자 거짓말처럼 돌돌 풀려 나왔다.
토끼의 눈이 동그래졌다.
[헐, 쩐다. 마술임?]
“훗, 뭘 이 정도 가지고.”
어쩌다 얻어걸렸으면서도 냉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코를 치켜드는 정다운이었다.
그 후로도 자잘한 난관은 계속 나타났다.
“이건 또 왜 안 빠져?”
[녹슬었나 본데요.]
“그럼 기름칠하지 뭐.”
나사머리에 미끄덩한 기름 한 방울을 톡 떨어뜨려 주자 금방 해결!
“이건 또 왜지?”
[몰라요. 왜 그럴까요?]
“이건 그냥 힘으로 뜯지 뭐.”
우지끈!
콰드득!
어떨 땐 요령과 잔머리로, 어떨 땐 힘으로.
요령과 힘이 합쳐지자 그는 분해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거 의외의 효과가 있는데?”
[뭐가요?]
한참을 쪼그려 앉아 드라이버질을 하던 정다운은 뜻밖의 효과를 발견했다.
사실 외뿔 멧돼지의 기운을 마스터하고 나서부터 그는 일상에서 힘 조절하는 것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예전에 뼈를 2배로 잘 부수게 됐을 때도 뼈 젓가락이 자꾸 부러져서 애를 먹지 않았던가.
예전엔 스킬을 쓸 때마다 외뿔 멧돼지를 자신에게 빙의시켜 힘을 빌려 쓴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이제는 온전히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
엄청난 힘의 고양감과 충만감이 계속 이어진다는 건 쉽게 말하면 끝내주게 건강해진 감각과 비슷했다.
마치 천 년 묵은 산삼이라도 먹은 듯이 전신에 힘이 펄펄 솟구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손을 바들바들 떨며 섬세한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힘 조절이 저절로 체득화되고 있었다.
“허허허, 삼라만상 모든 것들에 다 배울 점이 있구나!”
[그건 또 뭔 흉내임?]
토끼가 뭐라 하든 도사 정다운은 있지도 않은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계속 껄껄거렸다.
* * *
“흠.”
얼마 후, 어느새 그의 손바닥엔 나사가 한 주먹 모여 있었고, 그들 앞엔 자물쇠 잠금장치가 떡하니 분해되어 있었다.
“이거 막상 까 보니까…….”
[되게 복잡하네요?]
“은근 간단한데?”
[이게 간단하다고!?]
토끼는 눈을 반짝거리는 정다운이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울퉁불퉁한 잠금장치의 내부 구조는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왜 저렇게 장난감 선물이라도 받은 표정일까?
“좋은 생각이 났어. 차라리 아예 새로 만들 게 아니라, 이걸 조금 개조해서 열쇠랑 아귀를 맞추는 게 훨씬 쉽겠는데?”
[맘대로 하셈. 난 보기만 해도 피곤해져서 잠이나 자야겠음.]
그러고 보니 밖은 어느덧 밤이 되어 있었다.
[으, 징한 인간. 어떻게 하루 종일을 이러고 있냐.]
토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졌다.
그 후로도 정다운은 태양석 스탠드 아래서 한참이나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필요한 부품은 직접 대장간에서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바분의 황금열쇠를 비교하며 아귀를 맞춰 나갔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 쇠로 만들기 전에 미리 흙을 뭉쳐서 정확한 형태를 잡아 보기도 하고.
돌을 깎아 미리 실험해 보기도 했다.
그 작업들은 번거롭긴 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가 흙 뭉치기를 마스터한 지도 어언 1년째.
이제 그는 거의 흙으로 돌아가는 3D 프린터 수준이었다.
[세상에! 밤까지 샜다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정다운을 발견하고 토끼는 경악했다.
‘이럴 수가! 저 잠돌이가 밤을 새다니! 이건 바분의 저주가 틀림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졸리면 잠을 자는 인간이 날밤을 샜다는 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더 큰 사건은 눈 밑이 퀭한 정다운의 표정이 자신감이 넘쳤던 것이다.
“짠. 다 만들었지.”
[……!]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자물쇠가 들려 있었다.
묵직한 정육면체의 쇳덩어리는 투박하지만 견고한 디자인이었다.
왜 굳이 케이스까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부 구조가 다 보이던 잠금장치가 깔끔하게 정돈된 디자인으로 변해 있었다.
“만들다 보니 기왕이면 예쁘게 만들고 싶어서 좀 무리했어.”
[이상한 데서 완벽주의 쩌시네. 그런데 이거 진짜 돌아가요?]
“당연하지.”
씨익 웃으며 바분의 황금열쇠를 열쇠 구멍에 꽂고 돌리는 정다운.
철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쩌적 입을 벌렸다.
매우 성공적!
“흐흐, 대박이지?”
[인정. 님 진짜 오지네요. 너무 대단해서 극혐임. 거의 바퀴벌레.]
“칭찬이야 욕이야?”
[당연히 욕이죠. 아얏. 그런데 던전이 업적은 안 줬음?]
이젠 꿀밤을 맞아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가는 토끼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업적은 없었다.
이 황금열쇠 자체가 업적의 보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아직 생명 에너지 주입 안 시켜 봤음?]
“응. 일부러 너 있을 때 같이 하려고 깰 때까지 기다렸지.”
[오, 갑자기 이렇게 의리 있다고요?]
“아니, 무슨 일 생기면 안 되니까.”
[그럴 줄 알았다.]
감동할 뻔하다가 김이 새 버린 토끼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도우미의 유품을 사용했다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무래도 전직 도우미가 옆에 있는 편이 좋았다.
[이 바하무트도 있나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 목숨을 바쳐 주인님을 지켜 드리겠나이다. 이미 죽은 목숨이지만.]
바하무트는 이미 양손에 사신의 낫과 도살자의 칼을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골렘들도 노를 젓다 말고 다 모여 있었다.
[뭐 이렇게까지? 이쯤 되면 바분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안전할 것 같음.]
“자, 간다.”
정다운은 결연한 표정으로 자물쇠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황금열쇠를 신중히 열쇠 구멍에 꽂아 넣었다.
<그럼 생명 에너지를 주입하겠습니다.>
파아앗!
알파의 말과 함께 황금빛 기운이 열쇠에 스며들었다.
파앗! 팟! 팟!
열쇠에 새겨져 있던 기이한 문양들이 하나씩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몹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물쇠가 열렸다.
철커덕!
번쩍!
“……!”
[……!]
열쇠 구멍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마법 창고가 열립니다.]
번쩍!
“……!”
정다운은 자신의 앞에 생성된 빛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문이 열린 것이다!
[드, 들어가 보실?]
“너 먼저 들어가 봐.”
[아, 왜요!]
“들어가면 갑자기 낭떠러지면 어떡해? 넌 날 수 있잖아.”
[논리갑이시네. 하여간 말은 잘해요.]
결국 토끼는 투덜대며 마법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에서 정다운이 갑자기 토끼를 멈춰 세웠다.
“아니다. 그래도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먼저 들어갈래.”
[하나만 하셈!]
“그럼 손잡고 같이 들어가자.”
[오, 오케이.]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두렵기 마련.
정다운은 눈부실 것을 대비해서 선글라스까지 쓰고 마법진 안으로 용감하게 발을 들였다.
파아앗!